16. 전야제
소문의 시작은 언제나처럼 미미했다.
한 대학병원의 진료실 앞.
여느 병원이 그렇듯, 복도 안쪽으로 전공과목이 적힌 의사들의 진료실들이 쭉 늘어져 있었다.
따뜻한 베이지색의 벽과 그보다 조금 더 진한 타일로 마감한 병원 복도.
복도 가운데에는 대기하는 환자들을 위해 TV와 의자가 놓여있었다.
반대편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의자까지 들어와 그들을 감쌌다.
따뜻함이 전해주는 나른함이 복도를 가득 메우는 가운데.
“아으. 이제 또 오후 진료 시작이네.”
복도 끝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간호사 두 명이 오후 진료를 위해 진료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왔는지 손에는 믹스커피가 든 종이컵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있던 환자들은 그런 간호사들의 모습을 보고 그저 ‘이제 오후 진료가 시작되려나 보네’ 할 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간호사들의 대화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믹스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간호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아 맞다. 정 쌤 그거 알아요? 아니 글쎄, 그 환자분 혈당 수치가 정상이 됐대요.”
혈당 수치가 정상이 되었다고?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로비에 켜진 TV에 나오는 뉴스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환자들의 눈에 생기가 반짝 돌았다.
“누구?”
“왜 그 맨날 아들분이랑 같이 오는 할머니 있잖아요.”
“아아. 그분. 근데 심각한 거 아니었어? 연세도 있으시고, 합병증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어?”
당뇨는 당뇨 자체로도 무서운 병이였지만, 그래도 다른 병들과는 달리 운동과 식이요법, 그리고 약 등으로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노령 환자의 경우 합병증으로 인한 위험까지 고려해야 하는 만큼 모든 면에서 더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노령 환자의 혈당 수치가 정상화 됐다니.
대기 중이던 환자들의 귀가 점점 간호사들에게로 쏠렸다.
“네. 맞아요. 저번 정기진료 때는 눈도 잘 안 보이신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혈당 수치가 정상이 되었다고?”
“네. 그렇다니까요? 선생님도 놀라셔서 뭐 특별하게 하셨냐고 물어보셨어요.”
“뭐 하셨다는데?”
“그게 말이죠···.”
꿀꺽.
누군가 TV까지 음소거를 시켜놓은 진료실 앞 대기실은, 이제 상대방의 침 넘기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간호사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그때.
-지이잉
“...아, 잠깐만요. 네. 여보세요?”
별안간 간호사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서둘러 진료실 안으로 사라졌다.
““하···.””
간호사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간 후.
탄식 같은 한숨이 대기실 안을 채웠다.
“어? TV가 왜 음소거 되어있지?”
대기석의 앉아있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간호사가 음소거 되어있는 TV를 발견하곤 소리를 다시 켰다.
-다음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시금 조용해진 대기실에는 TV 뉴스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햇살에 둘러싸여 나른함을 쫓던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멍하니 TV나 핸드폰을 보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진료실로 향해있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
이윽고 진료실 문이 열리고.
“이혁규 씨 들어오실게요.”
차트를 들고나온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을 호명하자.
벌떡.
호명된 환자는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결연한 눈빛으로 진료실을 향해 걸어갔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물어볼 것이 아주 많은 듯한 눈빛이었다.
**
“어우 왜 이렇게 오른쪽 귀가 가렵냐.”
요즘 들어 자주 가렵기 시작한 오른쪽 귀.
손가락으로 후빌 수는 없어 손날을 만들어 비벼대고 있으니, 어김없이 TV 신봉자들이 쪼르르 나타났다.
“잘 씻은 거냐? 잘 안 씻으면 가렵다고 그랬다!”
“물이 필요하냐? 꽉?”
나의 더러움을 운운하는 노을과,
더러움이 있다면 씻겨주겠다는 찹쌀.
마음은 너무 고마웠지만, 오해는 금물이었다.
아니, 아침저녁으로 씻는데.
여기서 더 씻으라니.
“정말 고마운데 얘들아. 옛날부터 말이지, 오른쪽 귀가 가려우면 다른 사람이 내 칭찬을 하는 거라더라.”
“칭찬? 칭찬하는데 왜 귀가 가렵냐? 오른쪽은 칭찬이면 왼쪽은 뭐냐 컁?”
내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노을이 고개를 갸웃거렸나.
이해가 안 갈 만하지.
나도 어렸을 적 할머니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대체 무슨 원리냐고 물어 할머니를 곤란하게 했던 적이 있었으니.
“그냥 옛날부터 전해 내려져 오는 미신이야. 왼쪽 귀가 가려우면···.”
내 대답을 기다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을의 모습에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왼쪽 귀가 가려우면···?”
대답을 하다말고 나는 손을 뒤로 몰래 뻗어 내 무릎에 앉아있는 노을의 왼쪽 귀를 긁었다.
노을이 고개를 돌리기 전 재빨리 손을 회수한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왼쪽 귀가 가려우면 누가 날 욕하는 거래.”
“호에에? 나 방금 왼쪽 귀가 가려웠다! 누가 내 욕을 하는 것 같다! 나쁘다! 컁!”
왼쪽 귀의 가려움의 원인을 말하자 화들짝 놀라며 노을이 두 앞발을 들어 제 귀를 잡았다.
“그럴 때는 귀를 비빈 다음에 이렇게 휙 털고 퉤퉤퉤를 하면 돼.”
내가 해결책을 말해주자, 노을은 황급히 들었던 앞발로 고양이 세수하듯 귀를 비비더니 홱 털고는 ‘컁컁컁!’했다.
“이,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냐···. 컁?”
“푸흡.”
눈썹을 잔뜩 내린 채 흡사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는 노을의 모습에, 아까부터 참고 있던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 반대편 무릎에 앉아 일련의 과정을 보던 찹쌀은, 그런 노을의 모습을 보며 세상 한심한 표정을 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꽈-악. 바보 노을.”
“찹쌀이 너냐? 결투다! 컁!”
“하하. 아니야 노을아. 내가 장난친 거야. 미안해.”
“장난···? 역시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욕할 존재는 없다! 나는 위대하고 대단한 여우정령이다! 컁!”
금방이라도 찹쌀이와 결투를 할 것 같은 노을의 모습에 장난이라고 고백하자, 자신감을 금방 회복한 노을이 코를 높이 치켜들었다.
역시 알고 있었다니.
찹쌀과 결투를 하려던 건 어디 사는 여우였지?
태세전환이 번개 같은 노을의 턱을 긁어주자, 노을이 만족스럽게 고롱거렸다.
노을의 고롱거림을 들으며 찹쌀의 등도 쓰다듬으며 여유를 즐길 때였다.
삐약삐약
마당에서 병아리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배고프다고 한다! 밥줄 시간이다 꽉!”
깃털 속에 파묻었던 고개를 번쩍 든 찹쌀이 병아리들의 언어를 해석해 주었다.
병아리들은 많이 자라 이제는 중닭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읏차.”
병아리들은 먹고 싸는 게 일인만큼, 먹이 급여도 자주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자율급식을 해 주었지만, 먹성들이 얼마나 좋은지, 비만이 될 것 같아 이렇게 찹쌀의 도움을 빌려 배식을 했다.
탁.
“그럼 우리도 먹어볼까?”
병아리들에게 먹이를 주고 나는 창고에 들러 감자를 세 개 들고 집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먹방이 곧 음식 권유 방송이라더니.
모이를 정신없이 먹는 병아리들의 모습을 보고 나니 배가 출출해졌다.
**
잘 자란 감자는 그저 삶아서 소금에 찍어 먹기만 해도 맛있다.
뜨거운 감자의 껍질을 벗겨 입에 넣어 식혀가면서 먹노라면, 감자 한 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버터 냄새다! 컁!”
“맞아. 오늘은 버터에 굴려서 먹을 거야.”
“맛있겠다! 꽉!”
식탁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는 노을과 찹쌀에게 포슬하게 삶아진 감자를 껍질을 벗겨 한 알씩 놓아주었다.
감자를 삶기만 했을 뿐, 아직 요리는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요리가 다 될 때까지 먹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챱챱.
“호에? 하얀 가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뿌린 것 같다!”
“밑간을 해서 그래. 그거 먹으면서 조금만 기다려. 금방 해 줄 테니까.”
“천천히 해라 꽉!”
역시나.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내가 의도한 바를 알아듣는 영특한 정령 둘은, 야무지게 김이 폴폴 나는 감자를 집어먹었다.
“하하. 알았어.”
오늘 내가 만들 간식은 휴게소에 들린다면 꼭 먹어야 하는 필수 간식!
‘감자 버터구이’이다.
감자 버터구이를 만드는 방법은 쉽다.
삶은 감자를 버터에 굴려 구워내기만 하면 끝!
“일단 껍질을 다 벗기고.”
장갑을 끼고 냄비에서 감자를 꺼낸 나는, 칼을 이용해 감자 껍질을 슬슬 벗겼다.
깨끗하게 씻은 뒤 삶은 거라 껍질째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개인적으로 껍질의 그 비늘 같은 식감을 싫어해 모두 제거해버리는 편이다.
껍질을 다 벗겼다면 다음은 썰기.
“먹기 좋게 썰어서···. 노을아, 찹쌀아, 지금 사이즈 어때? 먹기 좋아?”
노을과 찹쌀의 합작품은 언제나 그 사이즈가 보통을 넘기에, 한입 크기 사이즈로 자르는 건 필수다.
“컁!”
“꽉!”
그저 삶기만 한 감자도 맛있는지, 입안 가득 물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둘.
“오케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사이즈에 동의하는 모양.
너무 적어도 감자가 버터 맛에 덮이고, 반대로 너무 커도 버터의 풍미가 감자 맛에 덮어져 버린다.
“이제 버터에 굴려볼까나.”
미리 예열해둔 프라이팬에 손을 올려 온도를 확인한 나는, 감자를 넣기 전 무가염 버터를 큼직하게 잘라 투척했다.
치이이-.
버터가 프라이팬에 떨어지며 맛있는 소리를 낸다.
그와 동시에 주방 가득 풍미 가득한 버터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냄새가 너무 좋다! 컁!”
“꽉! 얼른 주라!”
주방 가득 버터 향이 퍼지자 노을과 찹쌀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려댔다.
“짜식들. 거의 다 했어. 조금만 기다려. 이제 감자에 버터만 입히면 돼.”
둘과 대화를 하는 세에 버터가 다 녹았다.
프라이팬을 들어 살살 돌리니 훌렁거리는 게, 준비가 됐다.
“자, 이제 감자 들어간다!”
프라이팬을 제자리에 놓고, 가장자리를 보글거리며 끓고 있는 버터에 미리 썰어둔 감자를 조심스럽게 넣자.
차라락.
감자들이 버터에 자글자글 튀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감자는 튀기는 게 진리지.”
휴게소 감자는 버터로 ‘코팅’하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버터에 잠긴 감자가 살짝 노란 빛이 돌기 시작하면, 도구를 이용해 골고루 뒤집어 준다.
“불을 좀 줄이고···. 설탕 한 스푼이랑 소금 약간.”
뜨거운 팬과 만난 설탕은 순식간에 캐러멜 라이징이 되어 감자의 바삭함을 더 살려준다.
캐러멜라이징되어 갈색이 된 설탕에 감자를 조금만 더 굴려주면,
“자, 다 됐다!”
쫀득하면서도 바삭한 겉면과 부드러운 속살.
버터 향과 감자의 포슬함이 만나 중독적인 맛을 선사하는 감자 버터구이.
프라이팬에서 갓 꺼내 김이 폴폴 나는 감자에 설탕과 소금을 조금씩만 솔솔 뿌려주면 완성.
“호엥···. 자꾸 들어간다. 멈출 수가 없다! 컁!”
“꽉! 너무 맛있다!”
오늘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내 요리를 먹는 둘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감자 하나를 입에 넣었을 때였다.
“한울아, 집에 있나?”
대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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