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22화 (22/163)

21. 우리는! 사나이니까!

“사나이의 스포츠!”

“팔씨름이다!”

동시에 시합 명을 말한 장 이장님과 심 할아버지는 어느새 오른팔을 서로 크로스 하고 있었다.

팔을 교차한 채 서로를 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꼭 TV 예능에 나오는 바보 형제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염병. 지랄허네.”

강 할머니가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행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모양이다.

“지랄허네가 뭐여! 지랄허네가! 자네가 사나이들의 스포츠를 알어?”

강 할머니의 신랄한 비판에 심 할아버지가 펄쩍 뛰었다.

“암. 잘 알지. 작년에 2등이 누군지 잊어버렸나 보네?”

“작년의 2등? 당연히 알···.”

강 할머니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하던 강 할아버지가 말을 하다 말고 우뚝 멈췄다.

무엇인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가만있으면 반이라도 가는 건데···. 쯧쯧.”

그런 심 할아버지를 보며 장 이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오른팔 크로스는 깨진 지 오래였다.

태엽이 모두 풀린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심 할아버지.

“흥. 이제야 기억이 났나 보네. 작년 2등 내가 했제? 근데, 심가랑 장 이장은 몇 등?”

강 할머니가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강 할머니가 작년에 2등을 했음에도 졌다면···.

“커흠. 사나이는 말이제, 사소한 지난 일 따위는 가슴에 묻어버려서 모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펄쩍 뛰던 심 할아버지가 점잖게 얘기했다.

“허이고. 사소한? 사-소한? 퍽이나. 그래서 둘 다 예선도 통과도 못 해서 그렇게 몇 달을 우울해 있었나 보제?”

강 할머니가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가소롭다는 눈빛.

맹수 같은 강 할머니의 눈빛에 장 이장님이 백기를 들었다.

“와이라노.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나는 심가와는 다르다는 선언!

하지만 눈치 없는 심 할아버지는 심지 굳게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그때는 대진 운이 없어서 그랬다! 그 뭐냐. 죽음의 조였다. 우리가. 안 그러나 장 이장?”

“어. 아니다. 죽음의 조는 강 할매 쪽이었지. 암만.”

“장 이장···. 니 그럴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심 할아버지를 모른 척하는 장 이장님.

이제야 장 이장의 배신을 깨달은 심 할아버지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가 있냐!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뭐라노. 내는 우리의 강력한 우승 후보를 위해 주는 것뿐이다. 안 그나?”

하지만 장 이장은 모르쇠를 택했다.

장 이장의 배신에 부르르 떤 심 할아버지는 숨겨왔던 비밀을 터트렸다.

“뭐라카노! 니 내랑 맨날 같이 연습하면서 타도 강순자를 외쳤···. 읍!!”

찹.

장 이장님의 손이 심 할아버지의 입을 찰지게 막았다.

“심가 이 양반이 술에 취했는가 보다.”

“읍! 으으읍!!!”

눈을 부릅뜬 심 할아버지가 버둥거렸다.

하지만 장 이장도 필사적이었다.

“오늘 술 없지 않았나?”

“어? 아이다. 심가만 마셨나 보다. 허이고 술 냄새. 집에서 부터 마시고 왔구먼? 자자 내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가세.”

눈을 가늘게 뜬 강 할머니가 추궁하자, 장 이장은 이곳을 뜨는 것을 선택했다.

이름하야 작전명. 줄행랑.

“읍! 놔라! 술 안마셨···. 읍!”

“한울아, 내 따로 전화할게. 오늘 맛있게 먹었다. 임자, 어서 가입시다.”

“어? 벌써 간다고예? 한울아, 잘 먹었데이. 나중에 집에 놀러 온나.”

순식간에 심 할아버지와 꽃분이 할머니를 데리고 사라지는 장 이장님.

“네. 들어가세요.”

서둘러 인사를 했지만.

끼익.

나무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만 남아 방금 누군가가 나갔음만을 알릴 뿐이었다.

“...”

북적거렸던 마당이 훌빈해지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제 끝난 거냐? 파가 이렇게 맛있는 건지 몰랐다 컁! 찹쌀이랑 포동이도 맛있다고 전해달랬다!]

별안간 턱하고 내 뺨에 폭신한 감촉이 느껴지나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입 주변에 검댕을 묻힌 노을이 어느새 내 어깨에 앉아 꼬리를 살랑대고 있었다.

파를 굽는 중간중간 부지런히 가져다주긴 했지만, 직접 먹는 걸 못 본 터라 걱정했었는데.

슬쩍 노을의 뒤를 보니, 입가와 몸 군데군데 검댕이를 묻힌 찹쌀과 포동이 창문에 찰싹 붙어 있었다.

쟤들은 왜 저기에 붙어서 여길 보고 있을까.

밖이 궁금하면 나와도 될 텐데.

강 할머니가 대문을 노려보고 있는 틈을 타 노을의 검댕이를 슥슥 닦아주자니, 푸힛 웃은 노을이 말을 이어갔다.

[찹쌀이랑 포동이는 낯가린다고 안에 있겠다고 했다!]

우리 눈치 빠른 노을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 눈빛만 보고도 척척 내가 궁금한 바를 대답해 준다.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자신의 용맹함을 자랑하는 노을에 내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용감하네.”

아뿔싸.

속으로 말한다는 게 그만 튀어나오고 말았다.

움찔.

용감하다는 내 말에 강 할머니의 어깨가 반응했다.

[저 여자 사람한테서 살기가 느껴진다 캥!]

내 어깨에서 노을이 털을 부풀리며 전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저 영감탱이들, 지금 도망간 거 맞제?”

강 할머니의 기세는 이제 나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마치 에너지가 강 할머니 곁에서 일렁이는듯한 기분.

“하, 하하. 아닐걸···. 요?”

애써 가라앉혀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가려면 먹은 거라도 다 치우고서 가든가···!”

아무래도, 심 할아버지와 장 이장님.

며칠 동안은 몸 사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눈에 띄기만 해봐라!!”

마을이 작아서 힘드시겠지만, 힘내시길.

[후엥! 무섭다! 컁!]

노을이도 강 할머니의 살기에 꼬리를 말고 내 뒤로 숨어버렸다.

**

다음날 밤.

나는 호출을 받고 심 할아버지의 집 옆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저 왔습니다······?”

창고 문을 열자마자 훅 풍겨 나오는 더운 공기.

“후훅. 왔나?”

“읏차. 니도 와서 하나 들어라!”

하얀색 러닝셔츠를 입은 장 이장님과 심 할아버지가 운동 중이셨다.

머리에는 컬러풀한 에어로빅 헤어밴드를 두른 채.

“예?”

“니도 연습해야제! 이겨야 하지 않겠나!”

“저 나가기로 결정된 겁니까?”

어제는 분명 팔씨름 시합에 관해서만 얘기했을 뿐, 참여 여부는 확정하지 않았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어르신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와···? 안 나가려고?”

“안 나가고 싶으면 우리가 강요는 하면 안 되지. 암. 근데···.”

“어제 아랫마을 이장한테 전화해서 자랑해 놨는데···.”

“내도 아랫마을 동섭이한테 각오 단디 하라고 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우리가 훈련을 더 열심히 하면 된다!”

“그래! 훈련 더 열심히 하자···!”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탄식하던 어르신들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런 아령 10개쯤을 우습게 들것 같았던 어르신들의 아령이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아이고···. 힘이 없네.”

“늙어서 그렇다 늙어서. 아이고. 늙으니까 강순자한테도 지고···. 내 몸뚱어리는 말을 안 듣고···.”

“이번에 이겨서 자존심도 좀 회복하고 당당하게 다녀볼라 캤는데···.”

“우린 이제 틀렸다. 연습해봤자 다 무슨 소용이고.”

“아···. 어르신들···.”

“괘안타. 위로 안 해도 된다.”

세상 모든 의욕을 잃은 듯한 어르신들을 위로해주려 손을 뻗을 때였다.

내 양어깨 위를 살랑거리며 돌아다니던 노을이 반짝, 눈을 빛내며 말했다.

[거짓말! 저 남자 사람들은 아까와 몸 상태가 똑같다! 컁! 위대한 노을이는 알 수 있다!]

그래?

노을의 확신에 찬 앞발을 본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어르신들 너무 걱정 마십쇼! 모내기 그까이꺼 제가 오늘부터 이양기 모는 법 배워서 한 힘 보태겠습니다!”

어릴 적 동네에서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던 난, 가끔 황당한 말로 어른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으잉?”

“그···. 잘 생각해봐라 한울아. 이양기 그거 쉬워 보이제? 근데 막 쉬운 게 아니야 그게. 그거보다 팔씨름 한번 하는 게 더 쉬울 구로?”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으로 이양기를 배우겠다는 나를 멍하게 쳐다보는 두 분.

“에이. 저 트랙터도 몰아봤는데요 뭘. 괜찮습니다.”

“아이고마. 다르다! 트랙터랑은 달라! 그리고 이양기 몰 때는 모판도 계속 추가해야 하는데 그거도 힘들다! 안된다!”

“그래요?”

“암! 힘들지! 힘들고말고! 대신 팔씨름은 말이다. 쉬워!”

어떻게든 이양기를 모는 것보다 아랫동네 사람들과 팔씨름 하는 게 더 쉽다고 설득하셨지만, 글쎄.

“에이. 강 할머니도 2등 하셨으면 저야 뭐, 승산 있나요?”

“아이고 뭔 소리 하는 거고! 강 씨보다 니가 훨씬 세지! 아닌 말로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니같은 젊은 아를 어떻게 이기겠노? 안 그러나?”

“그라제! 못 이긴다! 니가 휙 하고 넘겨버리면 저 사람들은 훅! 하고 날아갈걸?”

휙! 하면, 훅! 날아간 다라.

안 될 말이었다.

“오우. 그럼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다치시기라도 하면···.”

상대방이 날아가다 팔이라도 부러지면 다 내 손해지 않는가.

위험해서 안 되겠다며 고개를 젓자, 심 할아버지가 덥석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아이고! 걱정하지 마라! 다들 용가리 통뼈다!”

내 손을 잡은 채로 옆의 이장님의 옆구리도 쿡쿡.

얼른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신호였다.

심 할아버지에게 찔린 장 이장님은, 번쩍 생각이 난 듯, 황급히 덧붙였다.

“아 맞다! 이기는 사람한테는 상금도 있다! 200만 원!”

“200만 원이요···?”

“그래! 팔씨름 한번 하고 200만 원 얻는 거다! 얼마나 좋노? 안 그러나?”

분명 매력적인 보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르신들이 이렇게 시합에서 이기려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시합에서 이기려고 하시는 거예요?”

“왜냐니! 당연히 우리는!”

“사나이니까!”

또다시 크로스를 만드는 두 어르신의 모습에 나는 작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예···. 그럼. 화이팅!”

심드렁한 반응 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그때.

턱.

내 팔을 붙잡은 장 이장님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이고. 한울이 니도 참.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안카나. 그 아랫마을 놈들이 희희낙락하는 꼬라지를 더는 못 보겠다!”

빠드득.

“맞다! 읍내 나가기만 하면 놀려대는데···! 우리 모내기하고 있을 때 금마들은 논두렁에서 고기 구워 먹고 있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며, 심 할아버지 또한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 어르신들의 승리욕이 대단하긴 했다.

뭐든 지는 것도 못 참고.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부모님이 없다고 놀리는 아이와 싸우고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산에서 훌쩍거리고 있을 적, 길길이 날뛰던 심 할아버지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한울이 니가 부모가 왜 없어! 한울이 부모 할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어떤 호랑 말코 같은 잡놈이 우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한테 그런 말을 하노! 한 번만 더 우리 한울이 놀리면, 그때는 내가 가서 다리 몽둥이를 마 뿌사뿐다고 해라!’

아예 그다음 날 학교로 찾아와 선생님께 정식으로 항의한 장 이장님 또한.

‘많이 먹고, 우리 한울이랑 친하게 지내야 한다. 알았제? 안 그러면 무서운 할아버지가 다리 몽둥이 뿌수러 올 거다.’

'히익-!'

친구들에게 점잖게 햄버거를 나눠주며 무서운 경고를 아무렇지 않게 하며, 장 이장님은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시곤 했다.

그렇게.

항상 어르신들은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셨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 차례인 것 같다.

“흠···. 그건 정말 좀 너무 한 것 같습니다. 일하는 사람들 옆에서 고기를 구워 먹다니. 안 되겠네요.”

“그, 그제···?”

“그라믄 니···. 하겠다는 거 맞제?”

나의 참가 선언에 반색하는 어르신들께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이번에는 저희가 옆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노래도 부르죠!”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우자.

내 어깨와 머리, 그리고 발치에서도 의지를 활활 태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200만 원···? 돈! 먹을 거다! 컁!]

[꽈악? 노래를 부르는 거냐?]

[고기···. 츄릅···.]

아무래도 이번 팔씨름 시합은, 지는 게 더 힘들지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