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23화 (23/163)

22.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도래했다.

“후우. 긴장하지 마라. 연습 한 것처럼! 그치로만 하면 된다!”

비장한 목소리의 심 할아버지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덜덜덜덜.

하지만 비장한 목소리와는 달리, 심 할아버지의 오른쪽 다리는 태풍을 맞이한 갈대처럼 떨리고 있었다.

“하이고. 세상 긴장은 혼자 다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한테 긴장하지 말라고 하는 거고.”

이제는 온몸으로 긴장을 표현하는 심 할아버지를 본 강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다! 이거는 준비운동이다. 준비운동! 이렇게 해서 혈액순환이 잘돼야···.”

“헛소리하지 마시고. 이거나 드소.”

“...고마우이.”

강 할머니가 건넨 플라스틱 통을 받은 심 할아버지는 바로 말을 멈추고 닫고 황금색 환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우황청심환이었다.

평소에는 견원지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투덕거리는 두 분이셨지만, 이렇게 챙기는 걸 보면 사실 막역지우가 아닐까.

“어제까지 연습 많이 하셨으니, 좋은 결과 나올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심 할아버지는 이번 팔씨름 시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팔씨름 대회를 위해 실제 시합에서 쓰는 장비까지 사놨으니 말 다 했지.

덕분에 장 이장님과 나는 매일같이 실전처럼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아마 올해는 작년과 다를 게 분명했다.

저 긴장만 좀 풀리신다면.

“자, 할아버지. 차 타시기 전에 심호흡 좀 하실게요.”

청심환을 씹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다리를 떨고 있는 심 할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심호흡법을 알려주었다.

차를 타고 시합 장소까지 이동해야 하는 만큼, 긴장으로 인해 멀미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으응? 그래! 심호흡 좋지.”

후후하.

후후하.

몇 번의 심호흡 후.

입에 남아있던 청심환까지 모두 삼킨 심 할아버지는 비로소 떨림을 멈추었다.

“이제 됐다. 가자 한울아.”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

백미러로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씩 웃으며 차 시동을 걸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안전벨트 매세요.”

**

팔씨름 시합이 펼쳐지는 경기장 안.

경기 진행을 위해 먼저 도착한 장 이장은 아랫마을 차 이장과 같이 온 청년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차 이장. 옆에 있는 그 청년은 누구여? 설마 오늘 출전하는 선수는 아니겠지?”

최소 자신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우락부락한 몸에, 핑크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청년.

아무리 따뜻해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봄.

쌀쌀한 봄바람에 오늘도 얇은 자켓 하나를 겉에 입고 온 장 이장은, 청년의 모습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이. 장 이장. 잘 지내셨는가. 아, 내 옆에 이 청년이 궁금혀? 궁금하면 오백 원~ 하하하!”

“...”

장 이장은 생각했다.

사람이 진지하게 물었을 때, 저런 철 지난 개그를 하는 사람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도 되는 법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짜게 식은 장 이장의 모습에, 혼자 배를 잡고 웃던 차 이장이 눈물을 닦으며 제 옆에 있던 청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농담이다 농담. 농담을 그리 다큐로 받아드리니까 매번 지는 거 아녀. 자. 이 청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마을의 떠오르는 샛별! 확신의 승부사! 마동태!다. 동태야, 인사해라.”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요란한 차 이장의 소개가 끝나자, 핑크색 덩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꺼운 팔을 양옆으로 늘어뜨리고 인사하는 모습에 장 이장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도 우리가 지는 거 아녀···?’

농사꾼보다는 누아르 적인 직업에 더 어울리는 비주얼을 가진 마동태.

마동태를 찬찬히 보던 장 이장은, 차 이장에게 항의했다.

“아니, 차 이장. 내가 알기론 이 청년은 자네 마을에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용병 데려오는 건 반칙 아니여?”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

용병임을 확신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차 이장은 만만치 않았다.

“아이고. 장 이장.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고 그래 싸. 마동태도 우리 마을 사람이여!”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차 이장네에 저런 청년이 있었데? 지난번 통화할 때만 해도 없던 걸 내가 아는디!”

“그때는 그때고. 용병 아니고, 우리 마을 사람이니 그렇게만 알아. 아니, 그러는 장 이장댁도 젊은 사람이 한 명 출전한다며? 그럼 똑같은 거 아닌가?”

장 이장이 뭐라고 하든 능글맞게 웃으며 대응하는 차 이장의 모습에 장 이장이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아니! 한울이는 원래부터 우리 마을 토박이고!”

“아아. 한울이었어? 난 또 뭐라고. 에이. 괜히 걱정했구먼. 자네 별로 긴장하지 않아도 되겠어. 쉬엄쉬엄하세. 알았제?”

젊은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차 이장은, ‘괜히 걱정했네’라고 중얼거렸다.

“네. 알겠습니다.”

마동태의 대답에 고개를 만족스럽게 끄덕이던 차 이장은 돌연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장 이장네는 긴장 좀 해야 할 거야. 우리 마을의 승부사는 말이제, 사과도 한 손으로 부순다니께.”

“사과를···?”

“하모! 장 이장 나중에 손 조심하시게. 하하하!”

사과를 손으로 부수는 사람이라니.

큰일 났다.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빨리 알려야 했다.

**

“한울아 큰일 났다!”

“이장님, 왜 그러세요?”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오며 큰일 났다고 말하는 장 이장님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차 이장 저 노마가 진짜 선수를 데리고 온 것 같다.”

“선수요?”

“몰래 잘 보래이. 내 뒤쪽에 오른편에 있는 핑크색 덩치 보이나?”

힐끗거리며 뒤를 가리키는 장 이장님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 핑크색 덩치.

“점마 뭔데? 내가 자랑 할 때도 저런 사람은 없었어! 다들 올해는 우리가 이길 거라고 했다니께! 분명히 우리가 한울이 얘기해서 어디서 데려온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말이다. 내도 엊그제까지 확인했을 때는 저런 사람이 없었거든? 용병인 게 분명한데, 차 이장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란다. 이걸 우짜면 좋노?”

대번에 심 할아버지가 역정을 냈지만, 장 이장님의 말처럼 이제 와 핑크색 덩치를 몰아내긴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몰아내지 못한다면, 이기면 그만 아닌가?

“어르신 걱정 마세요. 제가 이기면 되죠. 뭐.”

“니가 저 등치를 어떻게 이끼겠다고 그러나. 딱 봐도 2배는 차이 나는데.”

“팔씨름에는 물론 힘과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집중력과 전술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여러 가지로 연습한 만큼, 피지컬 적인 요소를 이겨낼 자신이 내겐 있었다.

“그렇긴 한데···. 체급 차이가 너무 난다 아이가.”

“장 이장, 한울이가 저리 자신 있어 하는데 뭐라도 있겠지! 우리 둘이 해도 여태 한 번도 못 이겨 봤다 아이가! 그럼 니만 믿는다 한울아!”

“애한테 너무 부담 주지 마라. 지면 모내기하면 되지! 마 괘안타!”

자신 있다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걱정된다는 듯 말을 흐리는 장 이장님과 그런 이장님에게 그런 걱정 말라며 어깨를 두드리는 심 할아버지.

그리고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져도 괜찮다는 강 할머니까지.

괜찮다니.

마음에도 없는 말 하시기는.

각자만의 방법으로 나를 걱정하는 어르신들에게 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컁! 내 사전에는 지는 것이란 없다!]

[꽉! 나는 언제든지 노래 부를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만 믿어라! 킁!]

걱정 마세요. 제가 이기겠습니다.

제가 혼자가 아니라, 지는 게 더 힘들 것 같거든요.

**

‘뭐지?’

마동태는 생각보다 강한 산골 마을 주민들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저 할머니만 조심하면 된다고 했는데···.’

산골 마을 사람들의 예상대로, 마동태는 아랫마을 주민이 아니었다.

그저 200만 원을 준다는 소리에 오늘 하루만 아랫마을 청년을 하기로 한 용병인 셈.

모내기가 걸렸다고 했지만, 알게 뭔가.

그저 돈만 받으면 되는 것을.

상대 마을에서 출전하는 사람들은 거진 어르신들이란 걸 확인한 후로 마동태는 어서 시합을 끝낸 뒤 그저 200만 원을 받아 어디에 쓸지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옘병. 대진표 누가 짰노? 내가 이 등치랑 대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살살 해라잉?”

첫판부터 차 이장이 경고한 욕쟁이 할머니가 걸려 힘을 뺏기는가 싶더니.

“자네,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나? 진짜 저쪽 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기권하게.”

두 번째 판에서는 상대 마을의 이장님이 걸려 라운드 내내 양심에 대한 설교를 들으며 심적으로 피곤함을 느꼈다.

“흐압!!!! 흐아야아아뵤옷!!”

거기다 세 번째 판에서는 온갖 화이팅을 외치는 어르신까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어르신들은, 몸도 다 압축 근육으로 이루어졌는지 생각보다 많은 힘을 써야만 했다.

거기다 조금만 강하게 힘을 쓰려고 하면 엄살을 부리며 죽는소리를 하는 통에 시합을 하는 내내 신경 쓸 것들이 많아 죽을 맛이었다.

“후.”

그 때문에 고작 3라운드를 치른 마동태의 몸은 마치 30명과 경기를 치른 것과 같이 피로함을 호소했다.

뻐근한 어깨를 휘휘 돌리며 마지막 시합을 위해 경기대 앞에 서자.

“안녕하세요.”

피곤함에 찌든 자신과 달리 땀 한방울 흘리지 않은듯 산뜻한 얼굴을 한 마지막 상대가 인사를 건넸다.

마치 산책하다 마주친 사람에게 인사하듯 싱긋 웃는 모습에는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운동을 좀 했나 보지.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아쉽게 됐수다.”

운동 꽤나 한 것 같은 몸을 가졌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비하면 조족지혈 같은 모습.

이제서야 제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온것같아 씩 웃어 보일 때였다.

“뭐,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당차게 포부를 밝히는 상대방.

하지만 마동태에게 그런 상대방의 모습은 가소로움 그 자체였다.

“길고 짧은 걸 대봐야 알면 하수지. 그래도 내가 자존심은 상하지 않게, 바로 넘기지는 않을 테니, 피차 적당히 합시다. 오케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긴장이라도 하지.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도 체급 차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생각은 다른 모양.

“궁금한 게 있는데, 여기서 지게 되면 그쪽도 모내기에 참석하는 겁니까?”

“모내기?”

“여기서 지는 마을이 모내기 하는 거잖습니까. 제가 이기게 되면 그쪽 마을 어르신들이 다 하셔야 하는데, 걱정돼서요.”

벌써 자신이 이기기라도 한 마냥 걱정하는 상대방의 모습에 마동태는 코웃음을 쳤다.

“하이고. 걱정도 팔자라는 말 아십니까?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만약에 내가 지게 되면 뭐, 나도 참석 하는 거로. 됐죠?”

“뭐, 그럼 안심이네요. 양심에 조금 찔렸거든요.”

“양심 찔릴 일이 진짜 없나 보네. 실없는 소리 말고 후딱 끝내고 가죠.”

상대방의 질문에 대충 대답한 마동태가 팔씨름 바를 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쉰 소리 하지 말고 경기나 어서 시작하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자자 두 분 다 팔에 힘 빼시고···. 좋습니다.”

각 마을의 마지막 선수들이 손을 맞잡자.

사방에서 응원이 들끓기 시작했다.

“한울아 한 번에 넘겨버리라!”

“이겨보자!!! 이길 수 있다!”

“마동태! 점마만 이기면 200만 원이다!”

“보여주라!!!”

자신과 경기를 치른 어르신들의 목소리가 특히나 컸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제 10초도 안 돼서 그들의 응원 소리가 탄식으로 바뀔 것을 아니까.

“....그럼 준비하시고, 시작!”

와아아!

심판의 시작선언과 동시에, 마동태는 여태까지 참아왔던 힘을 발산시켰다.

어깨부터 손까지 투두둑 일어난 힘줄은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3초.

툭.

한쪽의 손등이 터치패드에 닿았다.

동시에,

경기가 시작되며 참았던 사람들의 함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으아아! 이겼다!!! 한울아! 니가 최고다!”

“김한울!!! 내는 니가 이길 줄 알았다!!!”

사람들의 함성에 들리는 상대방의 이름에 멍하니 터치패드에 닿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던 마동태는 비로소 현실을 자각했다.

자신이 패배했음을.

“....말도 안 돼”

**

그 시각.

어느 농대 대학원의 연구소 안.

툭.

한창 연구 중이던 대학원생들을 불러 모은 교수는 들고 있던 오이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교수가 내려놓은 오이 둘은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어리둥절하게 오이를 보던 대학원생 중 한 명이 고심 끝에 질문했다.

“이게···. 뭡니까 교수님?”

“오이지. 여러분들은 이 두 오이의 차이점을 알겠나?”

“하나는 일반 오이인 것 같고, 하나는 저희 연구실에서 키운 오이 같은데 맞습니까?”

“그래. 맞어. 그럼 과연 어떤 쪽이 우리가 키운 오이일까?”

“당연히, 이쪽 아닙니까? 굵기로 보나, 윤기로 보나, 색으로 보나. 저희가 종자 개량에 성공한 오이인 것 같습니다!”

“틀렸어.”

“네?”

“틀렸다고. 자네가 방금 우리 연구실에서 키운 것 같다는 오이가 내가 밖에서 가져온 오이고, 볼품없다고 한 오이가 우리 연구실에서 키운 거지.”

“...”

꼴깍.

다크써클이 턱 끝까지 내려온 대학원생들이 모두 동시에 침을 삼켰다.

교수의 다음 말을 예상한 터였다.

“다들 내가 할 말을 알고 있겠지. 이 오이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아보고 오도록.”

맙소사.

지금 하는 연구들도 산재해 있는데···.

또다시 추가된 과제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대학원생 중 한 명이 조심히 손을 들어 올렸다.

“교수님, 이 오이의 구매처를 알 수 있을까요?”

부디, 오이를 키운 농가가 가까운 곳에 있기를 바라며.

“미화리. 신비농장.”

용감한 제자의 질문에 오이의 출저를 말한 교수의 눈은 먹잇감을 노린 매처럼 날카로웠다.

따뜻한 봄날.

신비농장을 향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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