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성장하는 신비농장
이른 아침.
까맣던 하늘이 붉은색을 더해가며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따사로운 햇볕이 온 대지를 밝힐 때쯤.
반짝.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노을이 눈을 떴다.
“꺄웅-!”
한울이 사준 푹신한 쿠션에서 몸을 일으킨 노을이 앞발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뾱뾱뾱
발가락까지 기지개를 켰더니 눈치도 없이 발톱들이 튀어나왔다.
“컁! 안된다.! 들어가라!”
이 눈치 없는 날카로운 발톱들 때문에 여태 찢어진 쿠션만 하나, 둘, 셋, 넷···.
발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세어보려 했지만, 모자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노을은 이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괜찮다!”
한울이 괜찮다고 했다!
찢어진 쿠션을 수습하려 방방 뛰던 첫날.
해가 뜬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노을을 찾던 한울에게 들키고 말았다.
‘노을아 뭐해?’
‘컁! 미안하다! 폭신이를 내 발톱이 찢었다···.’
미안함에 두 귀를 축 늘어뜨리고 사과를 하자, 한울은 화를 내는 대신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 노을아 미안. 내가 노을이 발톱을 생각 못 하고 너무 약한 쿠션을 줬네. 더 튼튼한 거로 사줄테니까, 우울해 하지 말고. 어서 나와서 아침 먹자.’
‘호에···. 정말이냐? 정말 내 잘못이 아니냐?’
‘그럼.’
싱긋 웃으며 제 잘못이 아니라며, 혼내기는커녕 더 튼튼한 쿠션을 사준다고 말하는 한울은 천사 같아 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한울은 약속대로 더 튼튼한 쿠션을 사와 노을에게 건넸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밖에 안 찢어졌다!”
전날 보다 덜 찢어진 쿠션을 한구석으로 밀어 넣은 노을은, 앞발로 얼굴을 슥슥 닦으며 몸단장을 시작했다.
밤새 쿠션에 눌린 볼부터 문질문질.
발을 조금 위로 뻗어 눈을 마사지하고, 쫑긋 서 있는 귀까지 문질문질해주면 끝!
몸단장을 마친 노을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쿠션 옆에 있는 거울 앞으로 가 제 모습을 비추었다.
“오늘도 나는 완벽하다 컁!”
*
거울에 비친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노을은 방을 나섰다.
“꽈과곽...꽤애···.”
방을 나서자마자 들리는 찹쌀의 잠꼬대 소리.
TV 앞에서 자는 걸 보니 어제도 잠들기 직전까지 TV를 본 모양.
분명 숲에서는 어떤 정령보다 먼저 일어나 햇살에 비치는 물방울 따위를 감상하던 찹쌀이었는데···.
이제는 제일 늦잠꾸러기가 되어버렸다.
찹쌀을 유심히 보던 노을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쿠션을 가져왔다.
발톱에 공격을 당해 상처 입은 쿠션이었다.
“이렇게 뒤집으면···. 됐다! 컁!”
찢긴 부분을 아래로 가도록 뒤집으니 보이지 않았다!
다시 멀쩡해진 쿠션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던 노을은, 꼬리를 살랑거렸다.
“맨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간댔다! 이거라도 베고 자라! 컁!”
언젠가 TV에서 봤던 여자 사람의 말투를 따라 한 노을은 쿠션을 찹쌀에게 밀어주고 만족스러운 듯 꼬리를 살랑였다.
“꽈아악···.”
노을의 말을 들었는지, 찹쌀이 의미 모를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더듬더듬 머리를 쿠션 위로 올렸다.
찹쌀의 입이 돌아가는 걸 방지한 노을은 후련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츄릅.
항상 한울이 환상적인 맛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이 공간은 발을 들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탁.
침을 꼴깍 삼킨 노을은 식탁 위로 올라가 접시를 덮은 덮개를 열었다.
“컁! 호박엿이다!”
오늘의 아침 간식은 호박엿.
챱.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린 호박엿 하나를 입에 넣은 노을은 꼬리를 살랑이며 식탁에서 내려왔다.
다시 덮개로 덮어진 접시에는 찹쌀이와 포동이의 몫인 호박엿 2개가 남아있었다.
“캬하항!”
입안을 달콤하게 만들어주는 호박엿을 입안에서 살살 굴리며 노을은 흡족하게 웃었다.
“아침을 먹기 전에 텃밭에 다녀와야겠다!”
달콤함을 맛보았으니 이제 텃밭으로 가 뜀박질을 할 차례였다.
한울이 정성 들여 키운 작물들 사이를 총총거리며 뛸 때면 작물들이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한울이는 못 들으니 내가 해줘야 한다!”
한울은 텃밭만큼은 노을의 노래와 찹쌀의 물대포 도움을 받지 않고 가꾼다고 했지만, 노을이 보기엔 한울은 안타깝게도 농사에 별 소질이 없었다.
“내가 도와줘야 한다! 컁!”
노을은 자신이 한울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푸힛!”
농작물들을 돌본 뒤 한울에게 쓰담쓰담을 받을 생각에 한껏 들뜬 노을은 보무도 당당히 텃밭으로 향했다.
*
총총거리며 텃밭에 도착한 노을은 자신보다 텃밭을 먼저 차지한 선객을 발견했다.
“오오! 이건···! 어떻게 이렇게 빛깔이 고울 수가 있지?”
대파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가며 감탄을 한다.
“...마치 전공 서적의 예시 그림에서 당장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이 비주얼!”
그저 평범한 대파일 뿐인데 손을 부르르 떨며 감격을 하는 선객은 며칠 전부터 신비농장에 합류한 남자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무상으로 일하겠습니다!’
‘개처럼 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한울에게 이곳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남자 사람은 한울에게 퍽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한울은 요리는 잘하지만, 사진은 정말로 못 찍었다.
하지만 이 남자 사람의 사진은 TV 광고에 종종 나오던 작물들처럼 생동감 있었다.
게다가 한울의 말에 의하면 상품 상세페이지를 논문처럼 업데이트해 놓은 덕분에 요즘 들어 문의하는 고객들의 수가 줄어 좋다고 했다.
폴짝.
상품 상세페이지와 논문이 뭔지 정확히 모르지만, 한울이 좋다고 하니 노을도 좋았다.
“어? 뭐지?”
그러니 남자 사람이 텃밭에 자신보다 먼저 와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았다.
남자의 머리 위로 폴짝 뛰어오른 노을이 저 멀리서 종종걸음으로 한울의 집을 향해 오고 있는 포동이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캬항! 역시 높은 곳에서 보는 뷰가 좋다!”
**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보이지 않는 노을을 찾으러 텃밭으로 나갔다가 박준혁의 머리 위에 있는 노을을 발견했다.
둥지에 앉은 새처럼 박준혁의 머리 위에 자리 잡고 앉아있는 노을의 모습은 퍽 편해 보였다.
“거기서 뭐 하니?”
원래 자신의 자리인 마냥 편하게 앉아있는 노을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먹기 전에 텃밭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아 맞다. 박준혁은 노을이를 못 보지.
[좋은 아침이다! 나도 텃밭 관리하고 있었다! 이 위에서 보니까 편하다! 컁!]
박준혁에 이어 해맑게 답하는 노을의 대답을 들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머리 위에 올라갔나 했더니.
박준혁을 움직이는 감시탑 정도로 사용하는 모양.
“아침 일찍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며칠 전, 비닐하우스의 흙과 사진 교환을 요청했던 박준혁은 흙을 받는 것을 마다하고 도비를 자처하며 이곳에 눌러앉겠다고 하였다.
박준혁의 주장하는 바는 이러했다.
‘사장님, 아니 선생님. 제가 이 아름다운 선생님의 작품들을 찍으면서 깨달았습니다.’
‘...?’
‘아아. 선생님의 작품의 발끝이라도 따라가려면, 흙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
사진 좀 찍어달라고 했더니.
그동안 뭘 깨달았는지 나를 선생님이라 칭하며 정령들과 함께 키운 작물들을 작품이라 말했다.
박준혁의 말이 맞긴 했다.
공식적으로 텃밭은 나 혼자 관리하는 곳이긴 하지만, 노을과 찹쌀은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밭을 돌보곤 했다.
그 결과 텃밭에서 키우는 작물들의 품질 또한 비닐하우스에서 나는 품질과 같아졌다.
그저 크는 속도만 다를 뿐.
“아닙니다! 어제 교수님의 허락도 떨어졌습니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유의미한 성과를 가져가지 않으면······. 않으면······.”
“알았어요. 거기까지 하죠.”
[컁? 우는 거냐?]
박준혁은 스스로가 장담했던 것처럼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진도 잘 찍는 건 물론이거니와.
내가 대충 만들어놨던 상세페이지도 업체에 맡긴 것처럼 탈바꿈시켜놓았다.
거기다 하루가 멀다고 달려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구매자 리뷰에 대한 답변도 단 며칠 만에 끝내버렸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루는 어마어마한 양의 일을 처리하는 박준혁에게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냐는 질문했더니, 박준혁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 삶이 이렇게나 행복했다는 걸 다시 깨달았습니다! 매 끼니 먹을 수 있는 따뜻한 밥! 매일 3시간 이상 불안에 떨지 않고 잘 수 있는 아늑한 잠자리! 이 상쾌한 공기! 마음껏 원하는 만큼 흙을 만지고! 완벽한 상태의 작물을 관찰하며 비료를 연구할 수 있는 환경! PPT에서 벗어 난 것만 해도···. 커흡. 이곳은 제게 천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전혀 무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합이 빡 들어가 자신의 안락함을 말하는 박준혁은 세상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는데, 그 미소를 본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생의 삶이 힘들다고는 들었지만, 저렇게 힘들 줄 몰랐기에. 교수와 연구실 얘기만 꺼내면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리려는 20대 청년의 모습은 조금, 아니 많이 안쓰러웠다.
‘처음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지.’
힘을 잃은 나풀거리며 두피에서 탈출하려는 머리카락으로 인해 못해도 40대인 줄 알았건만.
그저 눈물 많은 20대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안쓰러움이 배가 되었다.
그나저나. 교수의 허락이 떨어졌다니.
“잘 된 거 맞죠?”
“네! 맞습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이곳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거니 지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집은 어떻게 강 할머니 댁에서 계속 머무는 건가요?”
“네. 밥도 너무 맛있고, 선생님 집과도 가깝고. 월세도 저렴해서 계속 살 것 같습니다.”
“혹시 또 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아닙니다! 그보다 혹시 여기 있는 작물들 모두 하나씩 구매할 수 있을까요?”
“하나씩?”
“네. 이곳에 오기 전 선생님네 오이의 영양소를 분석했었는데 일반 시중 오이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의 영양소가 발견되었습니다. 해서, 다른 작물들도 저희 랩실로 보내 분석해보고 싶습니다.”
분석이라.
사실 작물을 제공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텃밭에 상주하는 박준혁이 작물들을 가져갈 방법은 무궁무진할 터였다.
뭐, 훔쳐 가면 그 순간 노을이와 찹쌀이에게 걸려서 들킬 테지만.
여하튼.
벌써 오이도 외부에서 구매한 뒤 분석한 마당에, 다른 작물들의 분석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왕 연구실 자료로 제공해 주는 거, 나도 이득이 있어야 계속해서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법!
“네. 얼마든지요. 대신, 분석지는 제가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어때요?”
어떤 물건을 구매하든, 시험 성적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신뢰성은 차이가 나기 마련.
원물에 대한 시험 성적 의뢰 시 한 품목당 몇십만 원의 시험비용이 들어간다.
지금 여기 텃밭에 있는 작물들만 20여 종.
한 작물당 최소 10만 원씩만 치더라도 200만 원 이득!
연구소에서 분석한 자료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앉아서 돈 버는 격이라 할 수 있다.
“네! 얼마든지요! 저희 대학 마크까지 달아 드리겠습니다!”
오. 대학 마크라.
한국 대학의 마크라면, 상품에 대한 신뢰성은 더욱 높아진다.
벌써부터 기존 구매자들의 아우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판매자님, 제발 수량 좀 늘려주세요!’
이제 도비도 생겼겠다.
판매 수량을 늘리는 날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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