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서리태!
“네! 얼마든지요! 저희 대학 마크까지 달아 드리겠습니다!”
내 부탁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박준혁의 모습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 좋고, 능력도 뛰어난 데다, 말귀까지 잘 알아듣는다.
재주도 많아 박준혁은 사회로 나간다면 분명 짧은 시간 안에 능력을 인정받아 꽤나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 확률이 높았다.
그런 사람이 법정근로시간 따위 가볍게 무시하며 도비를 자처한다?
그럼 똑같이는 못 해주더라도, 그에 준하는 보답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넘한테 주는 걸 아깝다고 생각하지 마라. 특히 니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는 더 퍼주라. 왜냐고? 그거 나중에 다 돌아온다.’
할머니는 항상 사람은 베풀고 살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도리를 아는 사람이면 같이 잘해주려고 할 테니까 계속 잘 지내면 된다. 근데 니보다 더 니한테 잘해주려는 사람이 있다? 그럼 그 사람은 무조건 옆에 두어야 하는 사람인기다.’
‘그 반대는요?’
‘반대? 그건 낸중에 알려줄게. 근데, 한울아. 할미가 신기한 거 알려줄까? 좋은 사람 옆에는 좋은 사람들이 모이게 돼 있다. 나중에 봐라. 이 할미 말이 맞을 거다. 끌끌끌.’
아직까지 삶을 덜 살아서 그런지 할머니의 말에 100% 동의 할 수는 없었다.
요즘 시대에 잘해주기만 하다가는 호구 소리 듣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스스로 무상노동을 외치는 고학력자 도비는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도비에게는 소속감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
소속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된다.
“고마워요. 근데 혹시, 콩물 좋아해요?”
가령 콤플렉스를 해결해 준다거나.
도비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고민을 해소 시켜 준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은인이라 칭하며 따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불변의 진리니까.
**
콩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콩을 구해야 한다.
보통 때라면 마트에 가서 구매했겠지만, 지금 나는 박준혁에게 특별한 콩물을 만들어 줄 생각이다.
그러니 좋은 콩 종자를 구하는 게 우선.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어. 왔나? 저기 꺼내놨다. 가져가라.”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심 할아버지에게 괜찮은 콩 종자를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여쭤봤더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서리태가 미화리를 통틀어 최고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심 할아버지 댁 마루에는 미리 꺼내놓은 서리태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이렇게나 많이는 안 주셔도 되는데···.”
이렇게 다 주고 나면 심 할아버지는 뭘 심으려고 하시냐고 묻자, 걱정도 팔자라며 심 할아버지가 끌끌 웃었다.
“아니다. 많기는. 한번 심을 때 이 정도는 심어야지. 내는 쪼매만 있으면 된다. 올해는 한울이 니 덕분에 벼농사에 집중을 더 할라고.”
모내기를 해주니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고. 이 편한걸 2년 동안 잊고 산 게 너무 억울하다며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하하. 내년에도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그럼 콩은 제가 올해 농사 잘해서 내년에 배로 갚아 드리는 거로 하겠습니다.”
“갚기는 뭘 갚노. 남는 상추나 좀 있으면 도. 저번에 논두렁에서 삼겹살 구워 먹을 때 니네 집 상추에 싸 먹으니까 그렇게 맛있더라.”
어쩐지 삼겹살 한 점에 상추를 3장씩 드시더니.
입맛에 맞으셨던 모양.
상추라면 텃밭에 군락을 지어있다.
아무리 베어먹어도 다시 자라나 처치 곤란이었는데.
그런 상추를 원하신다니, 오히려 땡큐였다.
“네. 상추 말고도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저희 텃밭에 있는 건 얼마든지 가져다드릴게요.”
“니가 키우는 거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라고 기다린다더니만. 콩 쪼매 주고 이러면 내는 완전히 남는 장사네? 다른 거 필요한 거 없나? 내가 씨앗은 거의 다 가지고 있다. 아. 콩이랑 옥수수랑 심으면 좋다. 아나. 이 옥수수도 가져가라.”
텃밭의 작물들의 자유 출입권을 드리니 심 할아버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손뼉까지 짝하고 친 심 할아버지는 창고 한켠에 있던 미니 냉장고로 가 빨간 봉투로 싸인 옥수수 씨앗을 가져와 건넸다.
“감사합니다. 근데 색이 희한하네요?”
빨간 봉투를 여니 보이는 핑크색 옥수수 알갱이들.
원래 옥수수 씨앗은 노란색이 아니었나?
처음 보는 빛깔의 옥수수에 의문을 표할 때였다.
“어? 아. 니는 처음 보나? 빨간 거는 소독해서 그렇다. 씨앗부터 소독하면 병충해 없이 잘 자란다.”
요즘엔 더욱 더 건강한 작물을 얻기 위해서 씨앗부터 소독한다고.
“그래요?”
모르긴 몰라도 박준혁 같은 대학원생들이 연구를 열심히 하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심 할아버지가 옥수수의 비밀을 알려준다며 손짓했다.
귀를 가까이 대 보라는 뜻이었다.
키가 작은 심 할아버지를 위해 고개를 숙이자, 옥수수의 비밀을 속삭이셨다.
“어. 그리고 그 옥수수는 그냥 옥수수가 아니라 초당 옥수수라는 기다. 흘흘흘.”
“오···?”
“아나 보네? 그래. 잘 키워서 나중에 내 하나만 도.”
스테비아 토마토 모종 세트를 줄 때도 그러더니.
아무래도 심 할아버지의 취향은 달달한 작물인 모양.
“당연하죠. 그럼”
하나가 뭔가.
좋은 모종을 얻었으니, 한 포대는 드려야지.
**
서리태.
서리를 맞은 후 수확하는 콩이라 붙여진 이름.
껍질은 검은색이지만, 속은 파래서 속청이라고도 불리는 검은콩이다.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고 불릴 만큼 영양가가 많은 서리태는 안토시아닌이 풍부해 비만과 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제일 유명한 건, 1000만 탈모인들이 인증한 효과지.”
서리태에는 모발 성장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성분인 시스테인이 있는데, 시스테인은 모발을 건강하게 만들어 빠지지 않는 데 도움을 준다고.
뿐만 아니라 서리태에 풍부한 단백질과 불포화 지방산은 두피와 모근에 영양공급을 해 튼튼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렇게 탈모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서리태.
나는 이 서리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 생각이다.
“노을아, 찹쌀아 부탁해.”
바로 우리 정령들을 통해서.
서리태를 가지고 비닐하우스로 온 나는, 한구석에 조그마한 구멍을 파고 서리태를 넣었다.
그리고 호미로 땅을 팔 때부터 내 주위에서 기웃거리던 노을과 찹쌀에게 부탁했다.
고개를 쭉 빼 들고 내가 하는 걸 지켜보던 노을과 찹쌀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리태가 심어진 땅에 달려들었다.
“컁! 맡겨만 줘라! 내일 간식 호박엿 하나 더 줘라!”
“오늘은 요술봉을 날려줘라. 꽉!”
언젠가 TV 뉴스에서 특별수당이라는 단어를 들은 노을과 찹쌀이 무엇인지 물어봐 그 뜻을 식사와 간식에 비유해서 말해주었더니, 그 뒤로부터 이렇게 내가 따로 부탁하는 일을 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특별수당을 외쳐댔다.
“호박엿이랑 요술봉 오케이!”
외치는 특별수당들이 하찮기 짝이 없어 들을 때마다 박장대소가 터질 것 같았지만, 당사자들은 진지하기 짝이 없어 매번 웃음을 참는 게 고역이었다.
“컁!”
“꽈아아악!”
스스스슥.
나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노을과 찹쌀의 활약으로 서리태는 순식간에 자라 콩깍지가 열렸다.
톡톡.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르기 시작한 콩깍지가 제 몸을 비틀며 속에 있는 검은색 서리태를 내보였다.
“이야. 잘 익었는데? 고마워.”
“컁! 이 정도는 기본이다.!”
“고마우면 요술봉 2번 날려줘라!”
“컁? 찹쌀이는 욕심쟁이냐? 한울, 나는 호박엿 하나면 충분하다!”
입에는 침이 가득 고인 채.
처음 말한 것보다 더한 특별수당을 요청하는 찹쌀을 꾸짖는 노을.
꾸짖으면서도 나를 힐끌힐끔 쳐다본다.
누가 여우 아니랄까 봐.
게다가 가만히 꾸중을 듣던 찹쌀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자니. 이 깜찍한 특별수당 조작단의 목적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오케이. 알았어. 특별수당에 하나 더 얹어서 특별 간식. 어때?”
“컁! 원하던 바다!”
“꽉! 그걸 말하면 어떡하냐! 바보 노을!”
“후엥···?”
특별 간식을 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을과 이제는 그런 노을을 꾸짖는 찹쌀.
허술하기 짝이 없는 특별수당 조작단에 더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으하하”
“왜 웃는 거냐 꽉?”
“푸힛! 한울이 웃으니 나도 웃음이 나온다 컁!”
갑자기 웃는 나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찹쌀과 그저 내가 웃으니 저도 기쁘다며 웃는 노을이.
표정은 사뭇 달랐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는 둘의 모습에 잦아들었던 웃음이 다시금 터졌다.
확실히.
정령들을 만나고 나서 웃음이 많아졌다.
**
탁.
비닐하우스에서 돌아오자 어느새 날이 저물어 집안이 어두웠다.
탁.탁.
현관에 들어서며 현관 앞에 있는 등을 켜자, 나보다 먼저 집으로 들어선 노을이 도도도 뛰어가 거실과 주방의 등을 켰다.
“고마워 노을아.”
“별거 아니다! 조심해라! 컁!”
코를 치켜들며 내 칭찬을 즐긴 노을은 다시 도도도 뛰어와 내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어깨로 손을 뻗어 노을의 턱을 긁어주자, 만족스러운 듯 골골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찹쌀아, 이것 좀 불려 줄 수 있어?”
찹쌀의 턱을 긁어주며 주방에 도착한 나는, 조금 전 비닐하우스에서 털어 온 서리태를 봉투에서 꺼내 동그란 스탠볼 안으로 쏟아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스탠볼 옆에서 서리태를 빤히 보고 있는 찹쌀에게 부탁했다.
“찹쌀아, 서리태를 불리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니?”
“꽉? 불리기만 하면 되는 거냐?”
“어. 찹쌀이가 불려주면 특별한 간식을 빨리 만들 수 있어.”
일반적인 콩을 사용한 요리는 할 때 가장 먼저 콩을 물에 불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딱딱한 콩을 볼에 넣고 물을 가득 부은 뒤 하루 정도가 지나면 콩은 물에 불리기 전보다 몇 배는 불어 부드럽게 변한다.
“꽈아아악!”
간식을 빨리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찹쌀의 입에서 작은 물대포가 쏘아졌다.
“오. 이게 되네? 이야 찹쌀아. 너 완전 대단한데?”
혹시나 했는데.
찹쌀이 뿜어낸 물대포를 맞은 콩들은 툭툭 제 몸집을 불러댔다.
“꽉! 이 정도면 되냐?”
내 칭찬에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물대포를 뿜어내던 찹쌀이 고개를 들었다.
찰랑.
서리태만 가득했던 스탠볼에는 물이 찰랑거렸다. 물에 잠긴 서리태는 처음보다 몇 배는 불어나 언뜻 초록색 제 속살도 보였다.
아주 잘 불려졌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콩 불리기가 끝났으니 나머지는 쉬웠다.
“고마워. 찹쌀아. 그럼 얼른 만들어 볼까?”
우선 두 군데로 나누기.
하나는 박준혁을 위한 콩물용이었고.
하나는 노을과 찹쌀을 위한 특별 간식을 만들기 위해서.
“포동이도 줘야 하니까 조금 더 해야겠네.”
“맞다! 포동이는 아침에 오면 그때 주면 된다!”
포동이는 노을, 그리고 찹쌀이와는 달리 숲속에서 출퇴근했다.
숲에서 뒹굴뒹굴하는 게 좋다나 뭐라나.
생김새가 다른 만큼 다양한 성격의 정령들이라 하루도 심심한 날이 없었다.
아무튼.
“콩물은 갈면 되니까 일단 소금만 넣고.”
콩물은 콩을 불리기만 하면 그다음은 아주 쉬웠다.
그저 믹서기에 물을 조금만 더 붓고 갈기만 하면 끝.
“자 그럼 간식을 만들어 볼까. 다들 빵 좋아해?”
“꽉! 좋다!”
“무슨 빵이냐? 나는 발라먹는 게 좋다! 컁!”
빵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찹쌀은 날개를 파다닥 거리며 좋아했지만, 미식가 노을이는 앞발을 내 볼에 가져다 대며 진지하게 빵과 함께 곁들여 먹을 스프레드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딸기잼.
초코잼.
살구잼.
포도잼.
여태 먹어본 잼들을 다 나열하며 침을 꼴깍거리는데, 얼른 만들어 주지 않았다간 내 어깨가 노을의 침으로 다 젖어버릴지도.
“조금만 기다려봐. 아주 근사한 스프레드를 만들어 줄테니까.”
노을의 침으로 어깨가 젖기전에 나는 얼른 냄비 하나를 꺼내 불에 올렸다.
촤아악.
열기를 머금은 냄비 안에 물에 불린 콩을 넣으니 김이 솟아올랐다.
“컁! 안보인다!”
“하하. 미안. 빨리하느라.”
끓기 시작하는 냄비 안에 소금 한꼬집과 설탕 한 스푼을 넣었다.
나중에 꿀을 더 추가할 거라 설탕은 한 스푼이면 충분했다.
보글보글.
서서히 물이 졸아들고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우면, 서리태가 다 삶아졌다는 신호다.
잘 삶아진 서리태 하나를 주걱에 올려 숟가락으로 눌렀다.
푹.
서리태가 부드럽게 뭉개지는 걸 보니 이제는 꿀을 넣을 타이밍이다.
꿀을 넣고 한 번 더 졸여주면, 비로소 서리태 조리는 끝난다.
*
조리를 끝낸 서리태는 바람이 잘 통하는 창문에 두어 식힌다.
“어디 보자. 이 정도면 다 식었네.”
꿀에 코팅되어 반질반질한 서리태는 그냥 먹어도 별미다.
하지만 스프레드로 만들어 먹으면 그 맛은 배가 된다.
슥슥.
미리 냉장고에서 꺼내 찬기를 없앤 마스카포네 치즈와 조심히 섞은 뒤 빵 위에 발라 어깨위에 앉은 노을의 침이 떨어지기 전에 주자, 노을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후에? 이게 무슨 맛이냐? 부드럽고 고소하고 달콤하다!! 컁!”
“맛있니?”
“맛있다! 꽉!”
얼른 하나를 더 발라 찹쌀이에게도 줬더니 한입에 삼키고는 더 달라고 아우성이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지.
서리태 마스카포네 스프레드에 정신이 팔린 노을과 찹쌀의 모습을 보며 씩 웃은 나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콩물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제 콩물을 주러 가볼까?”
노을과 찹쌀이를 만족시켰으니.
이제 콩물의 주인.
박주혁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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