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자라나라 머리머리!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각.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박준혁은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룰루루~ 오늘도 뚠뚠~ 개미는 뚠뚠~ 열심히! 일을 하네!~”
박준혁은 미화리 산골 마을에 오고 나서부터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얼마나 즐거운지 잊고 살았던 노래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
연구실에 있을 때는 그놈의 자료조사와 PPT 작성, 그리고 개인적인 연구 때문에 제대로 잘 시간조차 없었다.
제대로 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자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 of 사치.
덕분에 연구실에 합류한 지 1년 만에 얻은 건 다크써클과 구부정한 허리, 그리고 노안이었다.
쭉.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샴푸를 짠 박준혁은 손에서 조물조물 문질러 거품을 내고는 머리에 조심히 얹었다.
샴푸는 최근에 출시된 신상이었다.
맥주효모가 국내 출시된 샴푸 중 최대치로 함유되어있다는 소리에 가격도 보지 않고 구매.
이게 다 자신을 노안으로 만든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머리카락들을 위해서였다.
“내 소중한 머리카락 님들. 부디 오늘도 많이 빠지지 말고 붙어계시기를.”
남자는 머리빨이라고 했나.
연구실 입성 후 뒤틀린 수면 타임과 매 끼니 부실한 인스턴트로 때웠더니 언젠가 부터 머리카락이 슬슬 얇아지기 시작했다.
새치라고 생각했던 흰머리들도 점점 많아지는 게 지금부터 관리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선배의 말에 헐레벌떡 관리하기 시작한 지 6개월.
피부과에서 더럽게 아픈 두피 주사도 맞고, 약도 먹고, 영양제도 먹고, 샴푸도 두피에 좋다는 샴푸로 바꾸었지만, 눈에 띄는 효과는 아직 보지 못했다.
“긍정적인 마음! 긍정적인 육체! 긍정적인 머리카락······.”
하지만 박준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에 머리카락을 위한 주문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보며 하고 있으니,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내 정성에 감명받은 머리카락들도 다시 좋았던 그때로 돌아오지 않을까?
제발.
“머리카락만 다시 생기면···!”
쓱.
“...괜찮게 생겼는데 말이지.”
거품 낸 샴푸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감던 박준혁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요즘 유행하는 포마드.
클래식의 정석! 가름마.
확신의 동안 머리! 댄디컷.
기본 바탕이 괜찮아서 그런지 어떤 머리 스타일을 하더라도 찰떡같이 어울렸다.
샴푸의 힘을 빌려 여러 가지 스타일의 머리를 한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거울에 비친 얼굴을 이리저리 감상하는 것도 잠시.
스르륵.
거품이 꺼지듯 힘없이 축 처지는 머리카락에 박준혁은 울상을 지었다.
장담하건대, 자신이 이때까지 여자친구가 없는 데는 이 머리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크윽.”
손에서 불을 쏠 수 있는 대마법사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래도 올해는 기필코···! 어떻게든!”
정말로 30이 될 때까지 모쏠을 유지하게 되면 마법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차마 스스로가 마법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아니더라도 시료는 충분해!”
가령 아직도 연구실에서 썩고 있는 동기들이랄지···.
선배님들이랄지...
“나는 탈출했으니까!”
이곳에 온 뒤로는 하루 꼬박 5시간은 자고, 식사도 날마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주시는 주인집 할머니 덕분에 삼시 세끼를 배가 터지도록 먹는 중이었다.
벌써 푸석했던 피부가 맨들해 진 걸 보면, 수면과 질 좋은 식사의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아마도 이곳에서 계속 생활한다면, 머리카락도 예전처럼 돌아올 날이 머지않은 듯했다.
“흐흐흐.”
풍성한 미래를 상상했더니 저도 모르게 씰룩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였다.
욕실 밖에서 우렁찬 강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는 씻으러 들어가기만 하면 함흥차사네! 아야! 아직도 멀었나? 똥통에 빠져 죽은 건 아니제? 니 빨리 안 오면 내 혼자 다 먹는다!”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다며, 당장 나오지 않으면 밥상을 치워버릴 거라는 경고!
“안됩니다! 지금 당장 나가겠습니다!”
샤워는 다시 하면 그만!
샤워는 포기하더라도 머리카락을 튼튼하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영양가 높은 식사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박준혁은 서둘러 비눗물을 헹군 뒤 욕실 문을 박찼다.
“아이고 문 뿌사진다!”
**
콩물을 만든 다음 날 아침.
텃밭으로 나간 나는 평소와 달리 불편한 자세로 작물을 보고 있는 박준혁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니까, 심 할머니한테 등짝을 맞았다고요?”
“네. 근데 원래 이렇게 등이 아픈 겁니까?”
왜 그렇게 구부정한 자세로 작물을 관찰하고 있나 했더니.
강 할머니에게 맞아서라니.
등짝을 맞은 이유는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도 아니고 밥을 먹기 위해 비눗물을 다 헹구지도 않고 욕실에서 뛰쳐나와서라니.
아직 20대이긴 하지만, 노을이나 포동이도 아니고.
음식을 다 먹어버리겠다는 소리에 저런 철없는 짓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삼킬 때였다.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박준혁이 손짓을 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위쪽이 풍성한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저처럼 하늘하늘한 아이들을 가진 사람으로썬, 강 할머니의 완벽한 영양 밥상은 꼭 지켜야 할 루틴 중 하나입니다.”
“아하.”
“강 할머니의 영양 밥상을 먹은 지 일주일! 제 얼굴을 보십시오. 피부가 매끈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같고.”
“자세히 보시면 달라진 게 확연히 보일 겁니다. 자. 여기 보십시오.”
벌떡 일어나 제 얼굴을 가르치는 박준혁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더니, 아주 얼굴을 들이민다.
[컁! 깜짝 놀랐다!]
훅하고 들어오는 얼굴에 내 어깨에 앉아있던 노을이 화들짝 놀라며 내 목 뒤로 숨어버렸다.
놀랬니, 노을아?
나도 놀랐다.
어쩐지 강 할머니의 스매싱이 이해되는 것 같아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경고했다.
“그렇네요. 그런데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강 할머니 배구 도 대표 출신이거든요.”
심 할아버지와 장 이장님이 강 할머니에게 쩔쩔매는 이유는 다 있었다.
바로 강 할머니의 전직이 배구 도 대표 선수였기 때문.
특히나 강 할머니의 시원한 스매싱은 도내에서도 아주 유명한 만큼, 강 할머니가 동네에 뜨는 날이 마을의 말썽꾸러기들이 얌전해지는 날이었다.
“네···?”
더듬더듬.
강 할머니의 정체를 듣게 된 박준혁이 손을 등 뒤로 뻗어 제 등을 더듬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면, 할머니가 많이 봐주셨네요. 뭔지 몰라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강 할머니가 진심으로 스매싱을 날린 사람은, 며칠 동안 밖에서 볼 수 없었다.
소문으로는 충격으로 앓아누워서라고.
앓아누운 사람 중 한 명이 얼굴을 들이밀다 그랬을 거라며 씩 웃어 보이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박준혁이 서둘러 뒷걸음을 쳤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머리카락 지키려다가 세상과 작별부터 먼저 할뻔했습니다.”
“지금부터 잘하면 되죠. 아, 그리고 여기 이거. 받으세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늘부터 강 할머니 말씀은 법이다.!’라고 중얼거리는 박준혁에게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건넸다.
종이봉투에는 어젯밤 만든 콩물이 페트병 3개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어제 말한 콩물입니다. 검은콩이 모발 건강에 좋다죠? 직접 키운 서리태로 어제 간 거라 신선할 겁니다.”
“네? 선생님이 직접 키우신 서리태로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더욱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내가 직접 키운 서리태라는 말을 듣자마자 박준혁은 그렇지 않아도 꼭 쥐고 있던 종이가방을 금덩이라도 되는 양 품에 꼭 안고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더욱 잘 보이는 하늘하늘하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맨들한 두피에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뻗어 흔들며 만류했다.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에게 인사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고개 좀 드시죠.”
하지만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준혁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더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더 크게 할 뿐.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울먹이기까지.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박준혁에 머리를 짚고 있자니, 옆에서 멀뚱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찹쌀이가 뒤뚱거리며 고개 숙인 박준혁의 밑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좋은 걸 발견했다는 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꽉? 우는 거냐? 운다! 한울이 울렸다! 내 노래가 필요해 보인다! 꽉꽉꽉! 꽤애애액! 꽥꽥꽥!]
콩물 하나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는 대학원생이나, 눈물을 흘린다고 노래를 불러 재끼는 찹쌀이나.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게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으나.
내 입가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지어졌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비님.
부디 바라는 데로 머리카락 무럭무럭 자라길 바랍니다.
그럼 저도 바라는 데로 더 열심히 일을 시킬 테니까 말입니다.
**
며칠 뒤.
삐비빗.
어김없이 새벽부터 울리는 알람을 끈 박준혁은 벌떡 일어나 방 한구석에 있는 간이 냉장고로 갔다.
탁.
냉장고를 열자,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안이 냉장고 안의 빛으로 희미하게 밝혀졌다.
끄흡.
냉장고 안의 내용물을 본 박준혁이 주먹을 말아 쥐어 입가로 가져갔다.
“오늘이 마지막 콩물.”
신비농장의 사장님이자, 작물들을 예술적으로 키워내는 이 시대의 농사 스페셜리스트! 김한울 선생님께서 직접! 키운 서리태를 갈아 만들어 준 콩물.
콩물을 받은 날부터 아침저녁으로 마셨더니 벌써 콩물이 바닥을 드러냈다.
“흐흐흡.”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콩물이 찰랑거리는 페트병을 들어 올린 박준혁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페트병의 뚜껑을 땄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오늘도 콩물을 주신 우리 김한울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이 콩물을 마시겠습니다.”
꼴꼴꼴.
기도를 마친 박준혁이 단숨에 마지막 콩물을 마셨다.
“크으!”
단지 콩물을 마셨을 뿐인데 솟아나는 힘! 단순히 차가운 음료를 마셔서 일수도 있지만, 박준혁은 알았다.
요즘 들어 힘이 솟는 것도.
아무리 늦게까지 컴퓨터를 봐도 피곤하지 않는 것도.
그리고······.
나와 이별을 고하려던 머리카락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모두가 다 이 콩물 덕분이라는걸!
냉장고 옆에 붙은 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박준혁이 다짐했다.
“크흐흡. 이곳에 뼈를 묻겠습니다!”
희끗거리고 조금만 숙이면 맨들한 두피를 가졌던 이는 더이상 이곳에 없었다.
거울 속 자신의 머리는 맨들한 두피를 자랑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빽빽한 숱을 자랑했다.
갓 올라온 잔디처럼 삐죽거리는 머리카락은 아직 1cm도 안 됐지만, 그 효과는 대단했다.
역시나.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하늘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손에서 불을 뿜는 마법사 따위, 다 필요 없었다.
“이제! 나도! 소개팅 나갈 때! 흑채 안 뿌려도 된다!!!”
이제 박준혁에게는 이 위대한 콩물을 선사한 김한울이 곧 하늘이었다.
이 콩물을 더 얻을 수만 있다면···.
박준혁은 뭐든지 할 생각이었다.
“믿습네다! 김한울 선생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