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누구냐 넌!
Green thumb.
혹은
Green Fingers.
녹색 엄지의 소유자.
식물을 키우는데 남들과는 월등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이다.
박준혁은 사수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김한울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시대에 Green Thumb! 그야말로 손만 대면 죽었던 식물들도 살리는 드루이드가 틀림없습니다. (중략)···. 해서, 저는 이곳에서 김한울 선생님의 모든 것을 이어받으려 합니다. 제 연구인 비료 개발 또한 김한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진행 중입니다. 분석이 필요한 김한울 선생님의 새로운 작물 ‘서리태’를 보내드리오니 모쪼록 빠른 시일 내에 분석 결과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김한울 선생님께서 아주 만족스러워하십니다). 감히 말하건대,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박준혁의 사수, 이동민은 보고서인지 김한울의 찬양 글인지 모를 활자조합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또로록.
박준혁의 보고서 말미에 있는 시료 얘기에 혹시나 해 편지지를 꺼낸 봉투를 뒤집으니, 서리태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시료라더니···.
서리태 달랑 한 알.
“지금 장난하나···.”
분석을 돌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양이라는 게 있다.
다시 말해 지금 박준혁이 무려 등기로 보낸 시료, 서리태 한 알은 없느니만 못하다.
“하···. 이놈 또 어디에 꽂힌 거야.”
원래도 연구실에서 맑은 눈의 광인으로 불리던 부사수였다.
맑은 눈의 광인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는 박준혁이 연구실로 합류한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교수님은 항상 아침을 커피로 시작하셨다.
설탕을 진하게 탄 아메리카노.
하지만 문제는 교수님은 여태까지 한 번도 당신의 손으로 아메리카노를 사 온 적이 없었다.
그저 출근을 했을 때 무조건 자신의 책상 위에는 특정 카페의 아메리카노가 준비되어 있어야 성에 차는 사람이었다.
그럼 교수님의 아메리카노를 준비해 두는 사람은?
당연히 대학원생들이었다.
그렇다고 커피값을 내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커피를 매일 사느냐??
대학원생들 쌈짓돈을 걷어서.
하루에 아메리카노 한잔 정도는 나를 이끌어주는 지도교수님을 위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교수님이 좋아하는 카페는 학교에서 대중교통으로 약 1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는 것.
당연히 잠잘 시간도 부족한 학생들에게 왕복 2시간 거리에 있는 카페는 부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학원생들은 최대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었다.
그건 바로 당번을 정하기.
공평하게 일주일 단위로 제비뽑기를 뽑아 커피 담당이 되는 것.
박준혁 또한 그 의견에 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따랐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만을 드시는 교수님을 위해 1시간 동안 아메리카노를 품에 품고 오다 못해 교수님이 출근하기 직전 데우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문제는 박준혁이 연속으로 당번으로 뽑혔을 때 발생했다.
‘이게 무슨 맛이야!’
박준혁이 연속 3번째로 커피 셔틀이 된 그다음 날.
아침부터 교수님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소금을 가져다 놓은 거야!’
얼굴이 시뻘게져 펄펄 뛰는 교수님의 책상 위에는 뜯긴 설탕 포장지 3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으. 짜.’
분명 ‘low calorie sugar’라고 적혀있는 포장지에서 삐져나온 하얀색 알갱이를 집어먹자 입맛에 짠맛이 돌았다.
‘이거 누가 사 왔어?’
이제는 얼굴도 모자라 눈까지 시뻘게진 교수님의 시선이 모두를 훑을 때였다.
교수님보다 더 벌건 눈을 가진 박준혁이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접니다. 교수님.’
‘너, 일부러 나 골탕 먹으라고 소금을 넣어서 온 거야?’
‘아닙니다. 교수님. 여느 때처럼 카페에 비치된 설탕을 가져왔습니다. 교수님이 거기 것만 드시니까요.’
비록 시뻘건 눈을 하고 있었지만, 박준혁은 당당했다.
자신은 무고하다며, 억울하다는 제스쳐를 취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그저 피곤함에 찌든 무고한 대학원생 같았다.
‘큼. 그럼 내일부터는 그 카페 설탕 말고 사제로 사와.’
‘...네. 알겠습니다.’
탁.
‘하···. 돈 더 들게 생겼네.’
조용히 연구실로 돌아온 학생들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학교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사면 2천 원밖에 하지않는 아메리카노를 굳이 저 멀리 있는 4500원짜리를 먹으면서, 이제는 칼로리가 적은 설탕까지 사다 놓으라고 하니 일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그렇게 다들 죽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혼자만 큭큭 거리며 웃던 박준혁은 가방을 꺼내더니 거기에서 커다란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Low Calorie Sugar.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커다란 것의 정체는 바로 교수님이 애정하는 브랜드의 설탕.
‘어? 너 어떻게 알고 그거 사 왔어?’
모두가 예상치 못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다시 가방에 손을 넣은 박준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흐흐흐. 선배님들. 저만 믿으십쇼. 조만간 제가 커피 셔틀을 없애고 말겠습니다.’
비릿한 웃음에 오싹함을 느낀 것도 잠시.
박준혁의 손에 들려 나오는 다음 물건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헐.’
박준혁의 손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설탕 문구가 프린트된 종이 포장지가 들려있었다.
‘흐흐흐. 조금만 기다리십쇼.’
차르르.
박준혁은 처음 꺼낸 커다란 설탕 봉지를 살살 뜯더니 옆에 있는 통에 모두 쏟아버렸다.
그러고는,
툭.
테이블 밑에서 소금이 가득 든 통을 꺼내더니 빈 설탕 봉투에 깔때기를 이용해 하나씩 붓고 열 실링 기로 다시 재포장하기 시작했다.
‘와. 이새끼. 미친놈이네.’
‘눈빛이···. 정상이 아니야···!’
‘흐흐흐흐’
그렇게 맑은 눈의 광인이 활동한 지 딱 1주일째.
‘이제 커피 사 오지마! 이 설탕인지 소금인지 모를 것도 치워!’
몇 년 동안 대학원생들을 괴롭게 만들었던 커피 셔틀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새끼, 거기서 사고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한번 꽂히면 끝을 볼 때까지 하고야 마는 부사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동민은 손안에 서리태 한 알을 굴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
박준혁의 사수가 한숨을 내쉬던 그 시각.
신비농장 주(主).
김한울의 집 앞마당에선 인간 둘과 정령 셋으로 인해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니! 내가 더 잘 알거든?”
“무슨 소리입니까? 요즈음 하루종일 붙어있는 건 접니다! 제가 더 잘 압니다!”
[아니다! 내가 제일 잘 안다 컁!]
[싸우냐? 싸우는 거냐? 싸울 때 내 노래를 들어봐라! 내 노래를 들으면 힘이 세진다! 꽤애액!]
[한울, 나 배고프다 킁!]
오늘 처음 마주치자마자 서로를 탐색하더니 으르렁거리는 강지민과 박준혁.
서로를 날 선 눈으로 보며 으르렁거리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니.
혹여나 누가 지나가다 들을까 봐 무서웠다.
어디다 내놔도 부끄러운 둘의 모습에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을 때였다.
[컁! 한울! 말해봐라! 누가 한울을 더 잘 아냐?]
두 사람 사이에서 컁컁거리던 노을이 멀찍이 떨어져 마루에 앉아있는 내게로 도도도 뛰어오더니, 내 무릎으로 올라와 조막만 한 발을 내 가슴께에 턱 올리고는 물었다.
“당연히 우리 노을이지. 나는 쟤들 몰라.”
[캬하항! 봤냐? 내가 최고다!]
내 대답에 흡족한 듯, 내게로 향했던 몸을 아직도 으르렁거리는 두 명에게 홱 돌린 노을이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가슴 털을 한껏 부풀린 게 어지간히 기쁜 모양.
꼬리를 살랑거리는 노을의 등을 긁어줄 때였다.
[킁! 이제 좀 살만하구먼!]
내 옆에서 엉덩이를 깔고 앉아 두 손으로 호박엿을 챱챱 거리며 먹던 포동이가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컁? 포동이 너 언제 왔냐?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냐?]
정말 몰랐다는 듯 노을이 꼬리를 부풀리며 펄쩍 뛰었다.
포동이가 온 지 얼마 되지 않긴 하다만···.
노을이 너 정말, 저 말도 안 되는 싸움에 진심이었구나?
펄쩍 뛴 노을의 모습에 고개를 살래살래 젖던 포동은 내 무릎을 붙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거 비만 아닌가.
끙차 소리를 내는 포동의 배는 처음 봤을 때보다 좀 더 나온 것 같았다.
설마 정령들도 살이 찌나 싶어 물어보려 할 때였다.
[저녁은 약 31분 12초 후에 먹는다! 킁!]
[호에······. 그런 것까지 아냐? 대단하다!]
[내 배꼽시계는 정확하다 킁!]
[호에에에!]
놀랍게도 호동의 말은 정확했다.
보통 저녁을 먹는 시간은 6시.
지금이 5시 29분이니···.
이제 비닐하우스에 갈 때 시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새로운 포동이의 능력을 알게 되어 피식 웃고 있자니, 노을의 감탄에 우쭐한 표정을 짓던 포동이 생각났다는 듯 킁! 하고 울었다.
[맞다! 다른 게 아니라 비닐하우스에 큰일이 났다!]
[호엥? 그게 무슨 소리냐? 컁!]
“큰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포동아?”
비닐하우스에 큰일이라니.
아주 큰 일이 났다며 앞발을 휘적거리는 포동이의 행동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텃밭에 있는 작물들은 비정기적으로 출고되지만, 비닐하우스에 있는 작물들은 정기적으로 출고되는 상품들이었다.
[누가 와서 밭을 다 헤집어 놨다 킁!]
“누가? 혹시 오늘 포장한 것들도 다 망가졌어?”
내일 나가야 하는 상품들의 포장은 1시간 전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그사이에 누가 대체 밭을 헤집어 놨다는 말인가.
아무리 노을과 찹쌀, 그리고 포동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한번 한 작업을 다시 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은 없었다.
[아니다! 포장한 건 괜찮다! 만약 포장한걸 건드렸으면 내가 찾아서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킁!]
포동 또한 한번 한 포장을 다시 하는 건 싫다며 포동포동한 배를 부르르 떨었다.
“후. 그나마 다행이네. 그럼 어디를 헤집어 놓았다는 거야?”
[고구마를 다 헤집어놨다! 킁!]
고구마라면···.
어제서야 비로소 입맛에 딱 맞는 호박고구마 종자를 찾아 심어둔 참이었다.
덕분에 오늘 점심에는 에어프라이어기에 노릇하게 구운 호박 군고구마와 맛있게 익은 김치로 맛있는 참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호박고구마밭이 헤집어 놨다니.
누군지 모르겠지만,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중하게 일궈놓은 밭을 망친 만큼 그 대가를 톡톡히 받아 낼 생각을 할 때였다.
호박고구마밭이 망가졌다는 소리에 노을의 귀가 쫑긋 서더니.
[컁? 고구마? 누구냐! 누가 내 고구마를 헤집어놨냐!]
뾱뾱뾱.
얼마나 흥분했는지 숨겨놨던 발톱들도 튀어나왔다.
파칭.
노을이 잘 벼려진 날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발톱을 듦과 동시에, 앞쪽에서 날개가 파다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꽈악? 고구마···? 당장 잡으러 간다!]
아직까지 투덕거리는 두 사람 곁에서 꽥꽥거리며 노래를 부르던 찹쌀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간다! 컁!]
노을도 순식간에 찹쌀을 따라나섰다.
[킁···. 둘이 갔으니 나는 안가도···. 나도 가냐?]
“포동아, 여기 온 사이에 포장 다 뜯어놓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킁! 용서할 수 없다! 가자!]
찹쌀과 노을이 뛰쳐나가는 걸 보고 벌러덩 누워 뒹굴뒹굴하려던 포동은 벌떡 일어나 내 어깨에 올라앉았다.
어깨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포동을 확인한 나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철부지 둘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비닐하우스 급하게 가봐야 할 것 같아. 따라오지 마.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급하게 대문 밖을 나서는 나를 보던 지민이 따라오려고 했지만.
“...응? 무슨 소리야? 급한 일이면 내가 도와줄게! 같이 가!”
“안됩니다!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으니 여기서 기다려야 합니다!”
철옹성과 같이 그 앞을 막은 박준혁 때문에 막히고 말았다.
콩물 덕분인지, 요즘 따라 아주 든든한 박준혁에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다.
“이분은 제가 붙잡고 있을 테니 편안하게 다녀오세요!”
**
비닐하우스 앞.
먼저 도착한 노을과 찹쌀이 비닐하우스와 조금 떨어진 수풀 뒤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그 뒤에 같이 웅크리자, 귀를 쫑긋거리던 노을이 속삭였다.
“쉿. 조용히 해라. 다시 오고 있다. 컁.”
“꽈악. 용서하지 않겠다.”
노을의 몸이 한껏 낮춰지고, 찹쌀의 부리가 바드득거리자,
부스럭.
수풀이 헤집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던 그 순간!
고구마밭을 헤집어놓은 원흉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께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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