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어쩌면, 잔치를 여실지도.
오전 8시 55분.
띠리리.
탁.
더듬더듬 핸드폰 알람을 끈 수빈은 떠지지 않은 눈을 억지로 뜨며 책상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켰다.
매일 9시에 업데이트되는 선착순러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기필코 성공하고 말 테다.”
홍보도 마케팅도 따로 안 하는 스토어에 경쟁자들이 왜 이렇게나 많은지.
상품 수량 또한 아무리 요청해도 정해진 수량 이상 늘리지 않았다.
덕분에 신비농장의 문의 게시판에는 항상 구매문으로 터져나갔다.
“아···. 요즘 들어 더 경쟁이 빡세진 거 같단 말이지.”
수빈은 재빠른 클릭을 위해 손가락과 목 스트레칭을 했다.
사이트 시간에 딱 맞춰 새로 고침을 하기 위해 네이버 시계도 띄워둔 둔 상태.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경쟁이 심하지는 않았다.
상품이 빠지는 속도가 빠르긴 하더라도, 요즘처럼 순식간에 빠져 멍하게 모니터만 바라보는 일은 없었으니까.
신비농장을 알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호박즙 때문이었지.”
구름떡집의 호박즙.
떡집에서 웬 호박즙이냐고 할 수 있지만, 한번 구름떡집의 호박즙을 접한 사람들은 다시는 다른 호박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효과가 죽이거든.”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지라 직장에서 돌아오고 나면 팅팅 부었던 다리의 붓기를 단박에 빼주는 호박즙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나.
사실 구름떡집의 호박즙도 자신이 사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호박떡을 시켰더니 따라왔던 사은품이었다.
직장과 집의 거리마저 멀어 아침은 항상 이동하면서도 먹을 수 있는 떡이나 시리얼 바 같은 거로 때우던 와중에 발견한 구름떡집의 호박떡.
달콤하면서 쫀득하고. 전통 떡인 것 같으면서도 구름떡집만의 킥이 있는 호박떡은 아침 식사 대용식을 찾아 유목민 생활을 했던 수빈을 정착하게 한 인생 떡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 호박즙도 만들어 주신 구름떡집 사장님께 감사를!”
사은품으로 호박즙을 받았던 그 날은 하늘에서 저주를 퍼부었는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축축 늘어지는 몸 상태에 반일을 내고 집으로 돌아와 피곤함에 절어있는 상태에서 사은품으로 온 호박즙을 마시고는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이 들었었다.
“아. 생각하니까 또 마시고 싶네.”
구름떡집의 호박즙은 일반적인 호박즙과 달리 물 같은 제형이 아니었다.
통째로 호박을 갈아 만든 걸 증명하듯 스무디 같은 제형이 구름떡집 호박즙의 시그니처였다.
얼마나 수분이 많은 호박을 갈았는지, 마치 수박 주스를 마시는 것 마냥 걸림 없이 술술 넘어갔다.
하지만 이 호박즙도 마음 편히 마실 수 없었다.
“호박즙은 저녁에 1포만!”
호박즙 또한 품절이 잦기 때문.
구름떡집에서 호박즙 런칭과 동시에 인별 이벤트를 하는 바람에 호박즙은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그놈의 입소문.”
지금 와서는 이렇게 후회하고 있지만, 당시 수빈도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회사 동료들을 태그해가며 이벤트에 참여했었다.
“이렇게 수량이 적을 줄 알았냐고.”
솔직히 이 정도로 구매자들이 많으면 인간적으로 공장을 돌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구름떡집이나 신비농장 둘 다 규모를 키우기는커녕, 초반 수량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덕분에 구매자들만 혹시나 취소된 수량이 풀리지 않을까 매일 인별을 새로고침했다. (취소된 수량은 인별 공지를 통해 판매 시각을 알려줬다.)
신비농장은 그렇게 알게 된 곳이었다.
인별을 무한 새로고침하다가.
“후. 그럼 이제 들어가 볼까?”
딸칵.
스트레칭을 마치고 손을 탈탈 턴 수빈은 신비농장 스토어로 들어갔다.
“잉? 이게 뭐야?”
[제5회 미화리 농산물박람회에 초대합니다]
여태 아무런 이벤트나 공지가 없었던 스토어에 팝업 공지가 뜨다니!
요즘은 그래도 상세페이지가 정리가 된 게 볼만하지만, 처음 신비농장을 접속했을 때는 과연 이곳이 구름떡집에서 말하는 곳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었다.
구름떡집 인별에서 링크를 타고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평소 리뷰를 중요시 생각했던 만큼 발로 찍은 사진으로 상세페이지를 꾸며놓은 곳에서 구매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곳보다 가격이 저렴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용 된 거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수빈은, 처음으로 뜬 공지를 클릭해 읽기 시작했다.
“‘미화리 특산물이 여는 건강한 세상’? 이게 무슨 말이야······.”
미화리?
저 멀리 충청도에서 하는 한방엑스포는 들어봤어도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미화리라는 지역에서 엑스포라니.
“엑스포는 원래 좀 큰 규모 아닌가?”
박람회는 큰 규모로 진행되어 그곳에서 바로 바이어와의 미팅을 통해 계약까지 할 수 있는 거로 알고 있었다.
무려 5회째 개최하는 박람회인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규모가 알만했다.
신비농장의 상품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산지까지 가서 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수빈은 나머지 공지를 재빨리 훑어내리려 했다.
마지막 문단만 아니었으면.
“...‘첫 오프라인 행사인 만큼, 방문해 주시는 모든 고객님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도록 최대 수량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아직까지 스토어에 업데이트되지 않은 작물들도 선보일 예정입니다···.’······. 잠깐, 아직 선보이지 않은 작물이라고?”
최대 수량이라는 단어도 끌렸지만, 무엇보다 ‘신상’이라는 단어가 수빈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니야. 수빈아. 이건 시간만 잘 맞추고, 마우스 클릭만 잘하면 살 수 있는 거야. 굳이 저 먼 곳을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너 차도 없잖니?”
최대 수량과 신상이라는 단어에 잠시 혹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그 유혹을 털어내 버렸다.
신상이 뭔지도 모르고.
최대 수량이라고 해봤자, 수량은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간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를 그 지역까지 당일치기를 해야 하는데···. 도통 자신이 없었다.
“자,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집중!”
다시 한번 머리를 흔들어 박람회에 참여하려고 하는 마음을 다잡은 수빈은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이제 9시가 되기까지 30초 전.
새로 고침을 연타할 타이밍이었다.
“제발. 제발.”
벌써 일주일째 양배추를 사지 못했다.
신비농장의 양배추를 먹은 뒤로는 스트레스 때문에 생겼던 만성 위염이 없어졌다.
양배추를 먹는 동안에는 속이 쓰리던 느낌이 뭔지도 잊어버릴 정도.
하지만 그 양배추가 떨어진 지 일주일.
위가 슬금슬금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양배추를 꼭 사야 했다.
8시 59분 59초.
-딸칵.
수빈의 위를 책임질 양배추가 업데이트될 시간!
꿀꺽.
이제 로딩 화면이 지나면 바로 보일 활성화된 구매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
“어···?”
[Sold Out]
새로 고침을 했음에도 조금 전과 같이 ‘품절’이라고 적힌 페이지에 수빈은 멍하니 핸드폰 스크린을 확인했다.
9시 1분.
“...이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도, 단 1분 만에 모든 수량이 동나는 예는 없었다.
“아. 담당자분이 오늘 지각하셨나 보네.”
그럼 납득이 갔다.
실수로 업데이트를 하지 않고 퇴근한 거라면, 지금 부랴부랴 업데이트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느긋하게 새로 고침을 하고 기다리면 곧 구매가 가능할 터.
9시 2분.
-딸칵.
느긋한 마음으로 새로 고침을 클릭하였다.
“흠···. 그래. 아직은 일러. 이제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 켰겠지.”
9시 5분.
-딸칵, 딸칵.
“뭐야. 로그인하는데 얼마나 걸리는 거야? 인간적으로 자동 로그인 설정해 놔야 하는 거 아니야?”
9시 30분.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딸칵
“아니 이건 소비자 기만 아니냐고! 지금까지 업데이트를 안 하는 건 아니지! 무슨 일이 있으면 공지라도 하던가!”
마음을 다스리며 새로 고침을 연타한 지 30분.
눈도 깜짝이지 않고 화면을 바라봐 시벌 개진 눈을 한 수빈이 새로 고침을 누르던 걸 멈췄다.
대신 판매자에게 항의하기 위해 문의 글을 클릭했다.
여태 사람들이 문의 글에 그렇게 구매 문의를 남길 때도 수빈은 묵묵히 알람을 맞췄을 뿐이었다.
농산물을 무한정 찍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이만큼 참았으면 많이 참았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로지 양배추를 구매하기 위해 내 잠을 반납했건만!
“이건 아니지.”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한 수빈이 분노의 타이핑을 하기 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려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자 보이는 최신 글 하나.
미리 보기를 통해 클릭하지 않아도 보이는 그 글은 수빈의 분노를 순식간에 잠재웠다.
☆열받은 사람들 필독☆박람회 때까지 온라인 판매 안 한다고 공지에 적혀있어요!
“아······?”
수빈은 아까 대충 보고 넘겼던 팝업 공지사항을 다시 켰다.
과연, 공지 제일 마지막 부분에 온라인 판매에 대한 공지가 적혀있었다.
“하···.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미화리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가는 수밖에.
따끔따끔.
아침부터 따끔거리는 이 위를 위해서라도!
**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비닐하우스에서 정령들과 한창 일을 하던 나는, 갑작스럽게 간지럽기 시작하는 왼쪽 귀에 장갑을 벗어 귀를 문질렀다.
옆에서 콩콩 뛰며 노래를 부르던 노을이 내 모습을 보고 펄쩍 뛰었다.
“컁! 왜 그러냐? 호에엥! 왼쪽 귀!! 왼쪽 귀가 가려운 거냐?!”
갑자기 왼쪽 귀가 가려울 땐 누군가가 욕을 하고 있다는 말을 기억한 모양.
“꽈아악. 바보 노을.”
찹쌀도 기억하는지 그때처럼 방방 뛰는 노을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게. 누가 내 욕을 하는 모양인데?”
“누구냐! 내가 무찔러 주겠다! 컁!”
누군가 내 욕을 하는 것 같다는 나의 말에 노을은 또 한 번 펄쩍 뛰었다.
“하하. 노을이가 무찔러 줄 거야? 어떻게 무찔러 줄 건데?”
나를 위하는 노을의 모습이 기꺼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예전에 했던 내 말을 아직까지도 믿고 있는 것도 귀여웠고.
그저 그런 노을의 행동이 귀여워 미소짓는 나와 달리 노을은 심각했다.
내 질문에 노을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뛰어갔다.
햇빛이 핀 조명처럼 노을의 얼굴을 비추자,
파칭!
노을의 날카로운 발톱이 솜방망이에서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발톱을 머리 위로 든 노을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컁. 나는 위대하고 멋진 여우 정령 노을. 위기에 빠진 사람을 보면 도와주는 것이 내 사명이다!”
진지한 얼굴.
그리고 진지한 대사.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노을은 잠시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햇빛을 느끼는가 싶더니, 한쪽 눈을 슬그머니 떴다.
“...찹쌀아, 이다음 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컁.”
“......”
진짜 대사였다니.
찹쌀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팩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다시 물을 주던 곳으로 뒤뚱거리며 이동했다.
“다시 일이나 해라! 꽥!”
“푸흡.”
마치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TV만 보는 철없는 자식을 꾸지람하는 부모에 빙의한 듯한 찹쌀에 웃음을 터트리자.
한켠에서 열심히 작물을 포장하던 포동이 스테비아 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킁. 노을이 뭐 잘못 먹었느냐?”
“푸흐흡”
찹쌀과 포동이 고개를 젓거나 말거나. 웃는 내 모습을 확인한 노을은 내 곁으로 도도도 달려왔다.
“컁! 웃는 거냐? 괜찮은 거냐? 푸힛. 내 협박이 통했나 보다!”
“어. 맞어. 이제 하나도 가렵지가 않네. 고마워.”
자신이 해결했다며 가슴을 쭉 내미는 노을에게 쓰담쓰담을 해줄 때였다.
지이잉.
주머니에 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텃밭을 맡은 박준혁이였다.
“네. 다 끝냈나요?”
[네! 다 끝냈습니다! 이제 읍내에 갔다 오려고 하는데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아뇨. 없어요. 잘 다녀와요.”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추가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주십시오!]
“그러죠. 준혁 씨도 갔다 오면 다시 오지 말고 바로 퇴근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텃밭의 일은 다 끝났다며, 내일 참여할 박람회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걸 찾으러 읍내로 간다는 박준혁과 통화를 마친 나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후. 내일인 건가.”
드디어. 고객들을 만날 박람회가 내일로 다가왔다.
올해는 행사를 크게 하는 만큼 사람들이 많이들 와 이곳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던 장 이장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일을 위해 며칠간 온라인 판매도 중단한 채 포장에 몰두했으니, 어느 정도 오지는 않을까 싶지만, 워낙에 시골이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좀 많이 왔으면 좋겠네.”
그럼 어르신들이 아주 좋아하실것 같았다.
어쩌면 잔치를 여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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