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32화 (32/163)

31. 첫 번째 손님

오전 8시.

트럭 한대와 승용차 한 대가 주차장에 들어섰다.

트럭에는 포장된 작물들이 가득 실려있었다.

탁.

“이야. 여기 엄청나게 변했네요?”

트럭에서 내린 나는 기억과는 완전히 달라진 장소에 감탄을 내뱉었다.

자동차 수백 대는 거뜬히 주차할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주차장.

주차장에 비치된 행사 안내판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거대한 현수막과 풍선이 박람회장 입구를 꾸미고 있었다.

입구 너머로는 나무와 알록달록한 꽃이 가득한 정원이 언뜻 보였다.

정원을 중심으로 양옆으로는 행사 참여용 부스들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뒤에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듯한 건물들이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10년 전 운전 연습을 하던 곳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움직이지 않고 내린 그 자리에 서서 감탄을 내뱉고 있자니, 트럭 조수석에서 내린 장 이장님이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제? 여가 허허벌판이었는데 짓기 시작하더니 뚝딱뚝딱 지어졌다. 와, 운전 연습하던 곳이 없어져서 아쉽나?”

“그럴 리가요.”

“하기사. 이제는 운전 연습할 필요 없을 만큼 잘 몰긴 하더라. 이게 다 내가 가르쳐줘서 그런 거 아이가!”

그러고 보니.

나에게 운전을 처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장 이장님이셨다.

트럭에 태워서 이곳으로 오더니 간단한 조작법만 알려주시고는 마음대로 운전해 보라고 하셨었다.

“그러게요.”

변속을 할때마다 시동이 꺼지는 탓에 애먹긴 했지만, 덕분에 지금은 어떤 차종도 운전할 수 있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트럭에서 카트를 꺼내자, 승용차에서 내린 박준혁이 슬쩍 옆에서 끼어들며 물었다.

“주차장은 아직 공사 중인 거죠?”

“뭐라카노. 주차장 다 지어졌구먼. 자갈 다 깔렸지 않느냐?.”

맹한 박준혁의 질문에 승용차 뒷좌석에서 내리던 강 할머니가 대답했다.

“아···. 전 또. 자갈만 깔려있길래 마감이 안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긴. 보통 이렇게 큰 행사장 주차장이라고 하면 매끈하게 지어진 게 보통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하지만 그런 주차장은 도시에서나 볼법하지, 이런 시골에서는 자갈의 유무로 주차장을 결정짓고는 한다.

강 할머니 옆에 있던 심 할아버지도 같은 생각인지 혀를 끌끌 찼다.

“이래서 서울에서만 산 아들은 안된다니까. 여서는 이만큼만 해도 진짜 좋은 것이라. 이게 왜 좋으냐···!”

“넵 알겠습니다!”

주차장에 대한 심 할아버지의 연설이 시작되려 하자, 박준혁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잽싸게 트럭 위로 올라갔다.

물건들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심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해 열심히 물건을 나르는 박준혁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얼른 옮겨서 세팅이나 하자.

**

“어? 한울쓰. 왔어?”

카트 두 대에 짐을 가득 싣고 이장님을 따라 배정된 부스로 가자, 부스 옆에 있는 푸드트럭에 있던 지민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세팅해야 할 재료들이 많다며 아침 일찍 와야 한다더니. 지민의 손에는 위생장갑이 끼워져있었다.

그건 그렇고.

‘OPEN’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푸드트럭은 제법 근사했다.

“이야. 이 푸드트럭은 어디서 구했대?”

뒤쪽으로 위치한 조리시설과 조리 테이블 옆 꼭 맞게 들어가 바들을 보며 묻자, 지민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빌렸지!”

뭔가 대단한 걸 말할 것처럼 굴더니.

실실 웃으며 농담하는 지민에 나는 피식웃었다.

“어제 별로 안 바빴나 보네? 혈색이 좋다?”

장 이장님의 배경으로 참여하게 되어 총 3일의 박람회 기간 중 오늘 하루만 참여하는 나와 달리, 지민은 3일 내내 참여한다고 했다.

그러니 오늘이 첫날인 나와 달리 지민은 이틀째인 셈.

사람에 치이는 건 오랜만이라 힘들 것 같다고 찡찡거리던 건 다른 사람이었던 것일까.

피곤함에 찌들기든 커녕 방긋거리는 게 아주 즐거워 보였다.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껍질을 벗긴 호박을 자르던 지민이 브이를 해 보였다.

“흐흐흐흐···. 어제 폐장하기도 전에 완판했다는 거 아니니. 무려 오후 2시에 완판! 매진!”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더니.

하긴, 장사꾼에게 상품이 잘 팔리는 만큼 좋은 피로 해복제는 없긴 했다.

“아아. 금융치료. 근데 옆에 분들은 죽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콧노래까지 부르며 호박을 쓱쓱 써는 지민과 달리, 지민의 옆에 있는 아르바이트생 2명은 곧 있으면 푸드트럭 바닥에 그대도 쓰러져 누울 판이었다.

“어 으의···.”

마치 좀비에게서 나올법한 소리를 내며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

아르바이트생들이라기보단 노예에 가까워 보였다.

밥은 잘 챙겨 먹이면서 일을 시키는 걸까.

어쩌다 저런 워커홀릭한테 걸려서 너네도 참 고생이다···.

호박즙의 런칭과 함께 워라밸은 진작에 던져버린 지민의 마수에 걸린 아르바이트생들을 안쓰럽게 쳐다볼 때였다.

“어머! 우리 귀여운 내 노예···. 아니, 아르바이트생님들!”

지민이 빙글 돌아 아르바이트생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호박을 썰던 식칼을 든 채였다.

“....!”

처키가 환생한듯한 그 모습에 아르바이트생들은 좀비처럼 내던 신음마저 멈추고 얼어붙었다.

이해했다.

저 모습은 어려서부터 지민을 봐온 내가 봐도 무서웠다.

치즈를 훔치다 고양이에게 걸린 쥐들처럼 바짝 졸아있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아르바이트생들이 얼어붙거나 말거나.

그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던 지민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씩 웃으며 말했다.

“보너스 쏜다! 힘내라!”

보너스!

마법의 단어에 아르바이트생들이 얼어붙은 입을 열었다.

“.... 얼마요?”

“일당 1.5배!”

“...히끅!”

“거기다 소고기 회식!”

1.5배라는 소리에 놀라 딸꾹질을 하던 알바생은, 소고기 회식이라는 소리에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맡겨만 주세요!!”

“아자아자! 화이팅! 할 수 있다!”

“어때, 내 능력이”

각성한 듯 열의를 불태우며 작업에 들어간 아르바이트생들을 흐뭇하게 본 지민이 다시 몸을 돌려 물었다.

“참···. 아르바이트생분들이 착하시네.”

턱을 치켜들고는 내려다보는 시선에 기분이 묘하게 이상해져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준혁이 불쑥 나타났다.

“저도 잘할 수 있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열심히 부스 안에 작물을 나르더니.

아르바이트생에게 지고 싶지 않은지 내 옆으로 와 파이팅을 외치는 박준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지민이 픽 웃었다.

“앞뒤 꽉 막혀서 응대나 잘할 수 있으려나.”

얘네는 전생에 견원지간이었던 것일까.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다.

“제가 오늘이 물량! 다 팔아 버리겠습니다. 으악!”

화륵.

오늘도 역시나 지민의 도발에 박준혁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 그래. 진정해.”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닙니다! 자신 있습니다! 두고 보세요!”

박준혁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진정시킬까 고민에 빠질 때쯤.

다른 곳에 가셨던 강 할머니와 심 할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아이고 기세가 좋네.”

“오셨어요?”

내 말에 고개를 대충 끄덕인 강 할머니가 턱 끝으로 박준혁을 가리키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 쟤가 며칠 전부터 체력 길러야 한다고 밥을 2공기씩 먹는다잖아. 내가 요즘 쟤 매긴다고 허리가 휘려 한다.”

그러니 이 에너지 넘치는 애를 말리려고 괜한 힘을 빼지 말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박준혁은 그저 강 할머니의 음식이 최고라며 양손의 엄지를 들고 외쳤다.

“할머니 음식솜씨가 최고지 말입니다!”

그런 박준혁의 모습에 강 할머니는 손사래를 쳤지만, 입꼬리는 씰룩거리셨다.

“말이나 못 하면. 저러니까 내가 맨날 허리가 휘지. 그래서 오늘은 뭐 먹고 싶은데?”

“할머니 음식이라면 전부! 맛있습니다!”

“글나. 크흠. 그러면 내가 오늘 여기 온 김에 장 좀 많이 봐 가야겠네. 삼이나 좀 사서 닭백숙이나 끓여볼까···.”

“닭백숙···! 너무 좋습니다!”

“그라면 일 열심히 하고 온나. 난 간다.”

연신 엄지를 치켜드는 박준혁의 어깨를 두드리는 강 할머니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가득 걸려있었다.

“네. 이따 뵙겠습니다. 오픈하면 놀러 오세요.”

강 할머니 덕분에 멈춘 견원지간들의 싸움에 내가 고개 숙여 배웅을하자.

뚝.

갑작스럽게 강 할머니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발걸음을 멈춘 할머니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돌아왔다.

“됐다. 오늘 샐러드? 그거 판다면서.”

“네.”

작물 판매도 판매지만, 오늘 멀리서 올 구매자들을 위해 특별히 샐러드를 판매하기로 했다.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강 할머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진저리를 치셨다.

“괜찮겠나? 쟤가 매일 밤 주방에서 샐러드드레싱? 그거 만들겠다고 난리···. 그런 난리도 없었다. 요리도 못하는 아가 뭔 샐러드드레싱을 만들겠다고 만드는 족족 먹어 보라고 하는데···. 와따. 내는 이제 샐러드에 ‘ㅅ’자만 들어도 지겹다. 괜찮은거 맞나? 쟤가 만든 드레싱 가지고 팔아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박준혁의 샐러드드레싱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 고개를 돌려 박준혁에게 눈짓했다.

설명을 해보라는 뜻이었다.

‘진짜 그랬냐?’

하루종일 일을 같이하다 보니 내 눈짓만으로도 그 뜻을 이해하게 된 박준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냥 좀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조금 전 지민과 기 싸움을 할 때의 그 기세는 어디 갔는지.

축 처진 박준혁의 모습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강 할머니를 보았다.

“에이. 할머니, 사람이 뭐든지 다 잘할 수는 없잖아요.”

시중 제품을 쓰지 않고 직접 드레싱을 만들어 쓸 거라는 내 말에 박준혁도 한 손 거들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 쟤가 그래도 방 치우고 깨끗하게 하는 거는 잘하더라. 근데 오늘 니가 샐러드를 판다니까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다. 쟤가 만든 드레싱으로 샐러드 만들었다간 욕 먹을까 싶어서.”

다행히 나는 박준혁이 만든 드레싱을 본 적도 없었다.

“샐러드드레싱은, 모두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 장담에 강 할머니가 안심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했다.

“아이고. 그럼 다행이다. 내가 이 말을 안 할 라겠는데 쟤가 만든 드레싱 먹고 장이 막 꿀렁거려서 고생했다 아이가. 네 그 드레싱 이름이 뭐라고 했지? 푸···. 푸 뭐였는데···.”

“....푸룬 드레싱이요.”

말린 푸룬이라···.

장이 꿀렁거렸다길래 뭔가 상하거나 궁합이 맞지 않은 재료를 사용했나 싶었는데.

말린 푸룬이라니.

참고로 말린 푸룬은 말린 서양자두인데, 푸룬으로 만든 주스는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특효약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맛도 있으면서 소화도 잘 시켜주는 재료라 드레싱으로 만들어봤다는 박준혁의 목소리는 가면 갈수록 작아져 들리지도 않았다.

“푸흡.”

푸드트럭 위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비웃음의 주인공은 지민이었다.

“와 웃나? 이상한 거로 만든 거가?”

“아뇨 할머니. 푸룬이 서양자두 말린 거 말하는 건데···. 풉.”

“자두? 그러면 좋은 거 아니냐?”

“그게, 변비 환자들이 많이 먹는 거라. 풉.”

박준혁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계속해서 자신을 비웃는 지민을 째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아이고. 어쩐지. 장이 요래 꾸르륵 걸렸다니까.”

강 할머니는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며 다시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박준혁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저러다가 울겠네.

울었다간 지민에게 더 놀림을 받을 게 분명했다.

“고생하셨네요. 그래도 엄청나게 도움이 돼요. 준혁이 없었으면, 오늘 여기 오지도 못했을걸요?”

또다시 싸웠다간 판매 준비가 늦어질 것 같아 몸을 슬쩍 움직였다.

“글나?”

상체로 지민에게로 향한 강 할머니의 시야를 가리자, 다시 할머니의 시선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네. 다른 것도 잘하지만 준혁이 얘가 용량 맞추는 건 진짜 최고예요. 인간 저울이 따로 없다니까요.”

“그래?”

“네. 나중에 저울 달인으로 TV 프로그램에 나가도 될 정도예요.”

할머니의 시선을 돌린 내가 적극적으로 박준혁의 장점을 어필하자,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강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럼 고생해라.”

그러고는 쿨하게 다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셨다.

마치 박준혁의 칭찬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후. 이제 그럼 다시 준비해 볼까?”

츤데레처럼 박준혁을 챙겨준 강 할머니를 배웅한 뒤.

나는 박준혁과 함께 서둘러 부스를 정리했다.

카트에서 뺀 작물들은 샘플용만 놔두고 나머지는 모두 뒤쪽에 쌓아두었다. 미리 준비된 하얀 테이블 위에는 마(麻)로 만든 성글한 직물을 깔았다.

거친 느낌의 직물 위에 나무 그릇에 담은 샘플용 작물들을 올리니 그럴 듯해졌다.

“사장님, 여기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포장한 샐러드 상자들도 꺼내 옆에 쌓아놓자, 신비농장의 현수막을 건 박준혁이 가방에서 앞치마를 꺼내 주었다.

테이블에 깔린 직물과 비슷한 짙은 베이지 색상의 앞치마 앞판에는 초록색 새싹이 그려져 있었다.

“오. 고마워.”

박준혁이 어제 읍내에서 픽업해온, 오늘을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만든 신비농장 앞치마였다.

급하게 주문을 했는데도 아주 잘 만들어졌다.

만족스럽게 만들어진 앞치마 앞, 초록색 새싹 밑에 새겨진 ‘신비농장’을 한번 쓱 훑고 앞치마를 목에 걸 때였다.

“저기···. 혹시 오픈하셨나요?”

조심스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오전 8시 45분.

엑스포 시작 1시간 15분 전, 첫 번째 손님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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