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아니 이 자식이?
오후 1시.
엑스포 무대와 가장 가까운 주차장에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은 커다란 벤이 들어왔다.
밖에서는 볼 수 없도록 아주 짙게 선팅을 한 차 안.
“어때? 나 알아볼 것 같아?”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마스크로 무장한 여자가 앞 좌석에 있는 매니저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음···. 얼굴이 안 보이긴 하는데···. 찐 팬이면 알아보지 않을까?”
매니저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지만, 거듭되는 여자의 질문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에이 설마······. 진짜?”
매니저의 말에 ‘얼굴을 다 가렸는데 설마 알아보겠어···.’라고 중얼거린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어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스타일리스트에게 다시 질문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여자의 질문을 받은 스타일리스트는 고민에 빠졌다.
앞 좌석에서 매니저가 연신 얼굴을 찡그리며 두 손으로 엑스자를 그렸기에.
하지만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알기에 섣불리 매니저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의 편을 들어주기엔 후에 있을 매니저의 잔소리가 귀찮았다.
이편도 저편도 들 수 없는 스타일리스트는 고민 끝에 절충안을 제시했다.
“옷을 갈아입는 건 어때요? 좀 펑퍼짐한 거로.”
어느 프로그램에서 실험했었다.
부모가 자식을 알아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이라는 주제로.
결과는?
놀랍게도 부모가 자식을 알아보는 데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부모는 제 자식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특정 연예인을 마음 깊이 좋아하는 팬들 또한 저 부모와 다르지 않았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하며 매일같이 영상과 사진을 탐독하는 이들은 그들의 최애를 특수분장 시키지 않은 이상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알아볼 가능성이 컸다.
특히나 앞의 여자같이 신체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사람이라면.
지금 입고 있는 몸매를 강조하는 옷을 입고 나간다면, 10분, 아니 10초 만에 여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팬들의 눈을 어느 정도 피하기 위해서는 평소에는 입고 다니지 않는 스타일의 옷을 입는 것도 괜찮은 방법 중 하나다.
거기에다 마스크와 선글라스, 그리고 버킷햇을 깊숙이 쓴다면 거의 못 알아보지 않을까.
드러난 곳이 없는데 어떤 수로 알아보냐는 말이다.
불안한 눈을 하고 앞 좌석에 앉아있던 매니저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괜찮은 생각인 모양.
이제는 본인의 의사만 남았다.
하지만 한번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자신이 의도한 바가 이뤄질 때까지 설득하는 성격을 가진 여자에, 차 안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긴장감이 무색하게 여자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
잠시 후.
주차 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움직임 없던 검은색 벤의 문이 열렸다.
“공기 좋고!”
스르륵 옆으로 열린 차 문에서 폴짝 뛰어내린 자가 팔을 양옆으로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라 밤에는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라야, 너 진짜 혼자 가도 되겠어?”
이제는 장시간 앉아있어 굳은 다리를 콩콩 두드리는 검은색 물체를 아라라 부른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 따라오지 마. 오빠 따라오면 더 눈에 띄어서 안 돼.”
아라는 검지를 쭉 뻗어 좌우로 흔들었다.
매니저는 팬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걱정하지만, 아라는 그 말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덩치는 산만 해서 곰이랑 친척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큰 자신의 매니저.
저 큰 덩치 덕분에 매니저는 팬들 사이에서 한 유명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팬들 안에서 자신의 인지도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아라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언니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저도 한번 둘러보고 싶었어요.”
매니저 오빠야말로 자신의 객관화가 필요하다며 아라가 설명을 시작하자, 스타일리스트가 그사이를 끼어들어 팔짱을 끼었다.
“그래. 넌 오케이. 가자!”
당연하게도 아라는 자신은 인지도가 높지 않다며 평범함을 어필하는 스타일리스트를 향해 단번에 엄지를 들어 보였다.
자신만 쏙 빼놓고 희희낙락한 둘의 모습을 본 매니저는 인생무상을 느꼈지만, 이내 직업정신을 되살려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아니다. 내가 좀 떨어져서 따라갈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손들어. 알았지?”
맡은 가수가 다치거나 일신상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것은 모두 매니저인 제 잘못이었으니까.
결국에는 따라온다는 소리에 아라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매니저님. 최소 10m 유지 부탁드립니다.”
10m 미만으로 따라올 시 다이어트를 관둘 거라는 무시무시한 조건을 붙이면서.
**
그 시각.
신비농장의 부스 안.
“후. 이제야 좀 살겠네. 좀 쉬자. 준혁아 여기 앉아.”
오픈하기도 전에 온 첫 손님이 양손 가득 작물들을 구매해 마수걸이를 잘한 덕분일까?
첫 손님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몰려드는 손님에 오픈 약 4시간 후 나는 드디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네? 네.”
넋이 나간 것 같이 멍하게 서 있던 박준혁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연구실로 들어갔다고 했으니. 그럴만했다.
나도 처음 고객을 직접 만나 상대할 때는 애 좀 먹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하나같이 우리 작물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손님들이 와 수월한 편이었다.
계속 웃고 있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굳이 우리 작물을 사가라고 홍보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와 척척 사가는 손님들 덕분에 준비해 온 수량은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었다.
“하하. 정신없었지? 우리도 샐러드 좀 먹고 슬슬 파장 준비하자.”
하지만 수월했다 생각한 나와는 다른 모양.
대답한 후로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는 박준혁의 모습 피식 웃은 나는, 얼얼한 입가를 마사지하며 몇 개 남지 않은 샐러드를 아이스박스 안에서 꺼냈다.
신선한 채소들과 달콤한 토마토, 그리고 구운 닭가슴살로 토핑된 샐러드는 한눈에 보아도 맛있어 보였다.
아침을 든든히 먹었음에도 몰려드는 손님을 상대하느라 에너지를 거의 다 쓴 몸은 당장 이 샐러드를 입에 넣으라고 아우성.
꿀꺽.
입맛을 다신 나는 몸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샐러드 박스를 열었다.
탁.
한켠에 넣어두었던 수제 드레싱의 뚜껑을 따 붓고 있으려니, 그 소리에 반응한 박준혁의 화들짝 놀랬다.
“헉. 형님. 그거 먹어도 되는 겁니까?”
샐러드가 얼마 남지 않았느냐며, 후다닥 아이스박스로 달려와 남은 샐러드의 개수를 확인하는 폼이 장사꾼 그 자체였다.
“당연하지.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 언제 또 손님이 올지 모르니까 지금 먹어둬야 해. 걱정 말고 먹어.”
사장인 나보다 장사에 진심이 되어 버린 박준혁에게 손짓하자, 달콤한 냄새가 짙어지나 싶더니 호박전과 떡,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스를 들고 지민이 부스 안으로 들어오며 내 말에 맞장구쳤다.
“한울이 말이 맞아. 손님 없을 때 틈틈이 먹어야 해. 안 그러면 나중에 집에 가서 후회한다. 그나저나 쟨 언제부터 너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냐?”
“아아···. 그게,”
“저를 신뢰하신 사장님께서! 어제부터 호칭을 편하게 부르라고 했습니다만?”
자연스럽게 의자를 당겨 앉은 지민이 들고 온 음식들을 테이블 한켠에 세팅하며 물자, 지민이 등장할 때부터 털을 바짝 세운 강아지처럼 경계하던 박준혁이 으르렁거렸다.
아이고.
또 시작인가.
하지만 지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배부른 고양이처럼 ‘흐응 그래?’라고 대충 대답할 뿐이었다.
“배 안 고파? 이것 좀 먹고 해. 내 30년 지기 친구 한울아.”
“이익···!”
하지만 박준혁은 지민의 간단한 도발에 즉각 반응했다.
분한 듯 주먹만 꽉 쥐는 걸 보니 지민의 도발에 대응할 수 있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모양.
미취학 아동과 같은 둘의 모습에 나는 몇 개 남지 않은 스테비아 토마토를 들어 지민에게 건넸다.
“너도 이거 들고 가서 알바생들이랑 나눠 먹어.”
먹을 것에 대한 보답과 동시에 이제 그만 네 푸드트럭으로 돌아가라는 축객령이었다.
지민이 가야 박준혁도 마음 편히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부스 안을 쭉 둘러본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한쪽 구석에 쌓은 선물꾸러미를 보고는 물었다.
“됐어. 몇 개 안 남은 거 같은데. 거의 끝난 거 아니야? 아까 오픈도 안 했는데 손님 온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우리 고객님들도 그런데 너희 손님들은 워···. 대단해. 근데 저건 뭐냐?”
“아···. 손님들이 주고 간 거.”
“엥? 손님들이 주고 갔다고?”
우리 농장을 작물을 먹고 몸이 좋아졌다며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던 손님들이 두고 간 선물들.
“고마울 따름이지.”
그저 정령들과 놀면서 키운 작물들을 판매한 것뿐인데.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진짜 대단하다. 그나저나 좀 있으면 파장할 거 같은데 뭐할 거냐?”
“글쎄. 사실 차에서 낮잠이라도 잘까 했는데, 파장할 때까지 여기 있으려고.”
“엥? 굳이 왜?”
어차피 일찍 파장하게 되더라도 박준혁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가수의 무대 때문에 여기에 있어야 했기에 잠깐 눈이나 붙일까 했었다.
하지만 고맙다며 연신 인사를 하는 손님들의 모습에 안일했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스마트스토어에 공지한 만큼, 비록 상품이 없더라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도리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내 공지 믿고 여기까지 온 손님들을 헛걸음하게 할 순 없잖아? 찾는 게 있으면 메모해놨다 따로 보내드리기라도 해야지.”
신뢰에는 신뢰로 보답하는 게 맞으므로.
그런 내 말에 지민이 입을 떡 벌렸다.
“헐. 나도 공지했는데. 어제 너무 빨리 간 건가? 나 욕먹는 거 아니야? 야 이런 건 진작에 좀 알려줘야지!”
뭐지 이 갑작스러운 내 탓은.
인별에 공지를 띄우긴 했지만, 생각이 짧았다며 내 탓을 해대는 지민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였다.
“이런 건 남한테 배운다고 체득되는 게 아닙니다만? 안일했던 스스로를 반성하시죠. 크흠.”
계속해서 지민을 공격할 타이밍을 보던 박준혁이 촌철살인을 날렸다.
“...으익....”
하늘은 기다리는 자의 편이라더니.
끈질기게 기다리던 박준혁의 카운터가 제대로 들어간 듯 지민은 반박하지 못했다.
“너···. 두고 봐.”
그저 악당들이나 할법한 멘트를 던지고 자신의 푸드트럭으로 다시 돌아갈 뿐.
“흥!”
인별 공지를 어서 수정해야 하기에 이쯤에서 물러난다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박준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오늘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둘의 모습에 나는 박준혁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제라도 부스 위치를 바꿀까?”
“아닙니다! 제가 확인해 봤는데 이곳이 무대와 가장 가깝습니다! 그리고 방금 보셨지 않습니까? 제가 이겼습니다! 으하하!”
아. 맞다.
얘 오늘 온다는 솔로 가수한테 진심이었지?
이름이···. 아라였던가.
여태 살면서 군대 기간을 제외하고는 연예인에 별 관심 없는 삶을 살아왔던 터라, 박준혁처럼 연예인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게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그저 생각만 해도 좋은 듯 싱글거리는 박준혁의 모습에 장 이장님의 백이라도 써 백스테이지에 가야 하나 싶을 때였다.
테이블 위로 그림자가 지더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샐러드 3개 구매할 수 있을까요?”
샐러드 구매를 원하는 손님.
하지만 아쉽게도 손님이 원하는 만큼 샐러드는 없었다.
“아···. 죄송하지만 2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이미 박준혁과 나의 몫으로 2개를 꺼내놓은 상태였다.
둘 다 아직 먹지는 않았지만, 뚜껑을 오픈한 만큼 판매는 할 수 없었다.
"음···. 그럼 어쩔 수 없죠. 2개라도 다 살게요."
"네. 잠시만요. 준혁 씨 포크 좀 챙겨줄래?"
샐러드를 넣어줄 종이봉투를 꺼내며 박준혁에게 포크와 냅킨을 부탁할 때였다.
툭.
갑자기 박준혁의 입이 벌어지며 물고 있던 숟가락이 테이블에 떨어졌다.
“헐.”
“...?”
숟가락을 떨어뜨린 박준혁은 급기야 입술까지 파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외쳤다.
“아, 아, 아, 아라님!!!”
아라? 설마 가수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아라의 공연시간도 아직 멀었을뿐더러 내 앞의 여자는 다시 말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감싼 탓에 설사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뭘 보고 아라라고 하는지.
하지만 돌아오는 여자의 반응이 수상했다.
“아, 아닌데요!”
움찔 떠는 것도 모자라 갑자기 말을 더듬는다?
맞나보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를 향해 박준혁이 다시 외쳤다.
“네, 네일아트! 그리고 그 목소리! 여, 영광입니다! 제, 제, 샐러드를 드리겠습니다!”
원래 찐 팬이란 이런 걸까.
오직 손톱과 목소리만으로 아라임을 알아차린 박준혁은 제 몫의 샐러드 뚜껑을 덮어 아라에 내밀었다.
얼씨구.
여자친구 사귀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놈일세.
그건 다 부질없다는 걸 나중에 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을 때였다.
슉.
박준혁의 손이 시야에 들어오나 싶더니 눈앞에 있던 샐러드가 사라졌다.
“부, 부족하시면 이것도···!”
아니 이 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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