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이거 왜 이래?
“수고하셨습니다.”
라디오 방송이 끝나고, 부스에서 나온 아라는 밖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인사했다.
“어후 아라씨, 라디오 출연은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쩜 하나도 안 떨지?”
분명 첫 출연이라고 했음에도 시종일관 여유롭게 웃음을 잃지 않은 아라의 모습에 PD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 PD의 반응에 아라는 싱긋 웃었다.
“모두 편하게 해주셔서 그런 거죠.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PD님.”
“정말, 말을 너무 잘한다. 요즘 기획사에 데뷔하기 전에 별 교육을 다 시킨다더니···. 아라씨도 막, 말하는 교육 이런 거 받은 거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나야말로 고맙지. 우리 라디오에 처음으로 출연해줘서. 참, 진짜 나 거기 궁금한데 가기 전에 알려주고 가.”
칭찬을 하다말고 갑자기 주어도 없이 알려달라는 PD에 아라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
“왜, 아까 신비로운 곳이라고 한곳.”
“아아. 거기요.”
뭔가 했더니.
신비농장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는 PD에 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안 알려주려고 했던 거야?”
“아뇨.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근데 거기가 아까 녹화할 때 말한 것처럼 진짜 주문하기가 힘들어요.”
“왜? 설마 회원제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아까 말했던 것처럼 경쟁이 좀 심해서요···.”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신비농장을 더이상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말을 흐렸다.
하지만 PD는 끈질겼다.
“그럼 아라씨는 어떻게 사 먹는 거야?”
“그래서 저도 매일은 못 먹어요.”
“어머. 그런 곳이 다 있어? 뭐 우리나라에 없는 거 판매하는 거야?”
“아뇨. 그냥 평범한 것들인데···. 맛도 맛이지만, 이상하게 여기 걸 먹으면 속이 편하더라고요.”
“그래?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밤에 녹화 마치고 집에 가서 야식 먹으면 그렇게 속이 안 좋더라고. 내가 건강 관리를 좀 해야 오래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아라씨 노래도 계속 틀고 그럴 거 아니야. 안 그래?”
눈치 빠른 PD는 딜을 띄웠다.
라디오 PD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특권.
바로 음악 플레이를 걸고.
“계속···. 그렇죠. 잠시만요 PD님. 주소는···. 여기에요.”
그렇지않아도 신곡 홍보를 위해 이곳에 출연한 참이었다. 곡을 홍보하는 데 있어 라디오 녹화는 TV 방송만큼 중요했다.
빠르게 PD의 딜을 머릿속으로 계산한 아라는 핸드폰을 조작해 신비농장의 주소를 보여줬다.
“어머. 진짜 아까 힌트가 맞았네! 신비한 곳이라더니. 이름이 신비농장이네? 이야. 이거 뭐야? 댓글이 몇 개야 대체? 다 품절이면 언제 살 수 있는 거래?”
한번 쓱 본 것만으로 재빨리 주소창에 주소를 입력한 PD가 스토어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순진한 물음에 아라는 씩 웃었다.
“그렇죠? 그분들이 다 경쟁자예요.”
어느 곳인지만 알려달라고 했으니, 어떻게 구매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오늘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전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PD를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아라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며 녹화실을 빠져나왔다.
**
라디오국 밖.
오매불망 아라를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일정이 끝났으면 재깍재깍 보내줄 것이지. 너무하네. 내가 그렇게 빨리 끝내 달라고 했건만.”
그놈의 박람회가 뭐라고. 아라가 박람회를 즐기고 싶다는 바람에 밀린 일정들만 한 트럭이었다.
매니저인 자신은 대기하며 차에서 조금씩 눈이라도 붙일 수 있지.
아라는 그렇지 못하기에 매니저는 걱정이 한가득하였다.
“에이. 오빠, 괜찮아. 나 요즘 별로 안 피곤하다니까? 그보다, 오늘은 성공했어?”
걱정으로 찡그려진 매니저의 미간을 보던 아라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건 바로 신비농장 주문 성공 여부.
아라의 질문에 매니저는 손을 들어 머리를 긁었다.
곤란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아······. 그게 말이야, 아라야.”
매니저의 땅을 파고 들어가는 듯한 말에 아라가 축 늘어졌다.
“뭐야···. 오늘도 실패야? 매니저님, 저 그거 먹은 날이랑 안 먹은 날이랑 다른 거 알죠?”
“아라야 그거 플라세보 효과 그런 게 아닐까? 컨디션이 좋았다 더 거나···.”
“아니야. 확실해. 그때 컨디션 안 좋았던 건 매니저님이 잘 아시잖아요?”
“그렇지. 지금도 모자 벗기려던 놈 생각하면.”
빠득.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고, 매니저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박람회에서 신비농장의 샐러드를 산 뒤 다른 곳들을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몇 발자국이나 뗐을까.
뒤에서 덮친 남자가 아라의 모자를 벗기려고 했었다.
“뭐, 별일 없으니까 됐지.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잖아.”
저 멀리서 아라를 따라다니며 주시하고 있던 매니저가 재빨리 달려온 덕분에 모자는 벗겨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라 또한 가슴이 덜컹했다.
“아는 사람은 개뿔. 누가 아는 사람한테 그렇게 위협적으로 와서 모자를 벗기려고 해.”
“그렇긴 하지···?”
“뭘 그렇긴 하지야. 네가 아직 사생팬들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러는데···.”
하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매니저의 잔소리를 듣기 싫었던 아라는 양손을 펼쳐 귀를 막았다.
그리고 낮게 소리를 냈다.
“아아아아아”
“어휴. 아라야! 이게 다 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 아니냐. 좀 들어라. 어? 일반인들도 요즘 좀 유명해지면 조심하는데 너는···.”
그런 아라의 모습이 익숙한 듯 매니저는 꿋꿋이 잔소리를 이어갔다.
매니저의 잔소리가 끝나 갈 때쯤.
“아! 나 좋은 생각 났어!”
정체불명의 소리를 내며 매니저의 잔소리를 피하던 아라의 고개가 벌떡 들렸다.
“...?”
“신비농장! 거기 촬영가면 신비농장 주인분 만날 수 있겠지? 거기서 계약을 하는 거야!”
“뭐?”
기껏 자나 깨나 사람들 좀 조심하라고 여태 얘기했건만.
작물 계약을 위해 촬영을 하자니.
하···.
매니저는 아찔해져 오는 감각에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박람회에서도 건물 안에 안 있고 바깥의 부스에 있던 걸 보면, 아직 그렇게 큰 농장은 아닐 거야. 더 유명해지기 전에, 내가 가서 친분을 쌓아놓으면 선착순 걱정 없이 작물 구매할 수 있을 거야!”
“글쎄···.”
하지만 이미 신비농장의 작물 확보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계획을 설명하는 아라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듯 했다.
“그리고 저번에 농촌 예능 들어온 거 있었다면서!”
“...”
“오빠. 나 촉이 왔어. 그거 무조건 되는 예능이야. 나 출연할 거야. 출연한다고 연락해줘.”
“어? 그때는 안 한다며.”
“그때는 그때고! 대신 촬영장소는 미화리.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지? 그럼 오빠만 믿는다!”
순식간에 신비농장에 접근할 방법을 고안해 낸 아라가 매니저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매니저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네 고집을 누가 꺾겠니.
아라의 고집에 두손 두발 다 든 매니저가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조건을 붙였다.
“하하···. 그럼. 당연하지. 대신 대표님은 네가 좀 설득해 주지 않을래?”
무서운 대표님은 네가 좀 설득하라고.
**
다음 날 아침.
이제 막 뜬 해에 사방이 빛으로 물들 무렵.
미화리 산골 마을에 위치한 한울의 집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띵똥띵똥
“누구지?”
정령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있던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울리는 대문 벨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터폰 화면을 켰다.
켜진 인터폰 스크린에는 익숙한 얼굴이 가득 잡혔다.
-형님! 형님! 큰일 났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어? 일단 들어와.”
인터폰이 켜지자마자 급한 목소리로 문을 열어달라는 박준혁에 문을 열어주었다.
탁.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당의 자갈을 밟는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이 쳐진 창문 밖으로 박준혁이 마당을 가로지르는 걸 확인한 나는, 느긋하게 현관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왜? 무슨 일이야?”
얼마나 뛰어왔는지 박준혁은 숨을 헐떡이느라 말을 잘 잇지 못할 정도였다.
“형님. 이것 좀 보십시오! 문의가···. 문의가···!”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박준혁이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
“사실 오늘 새벽부터 이게 울리는 통에···. 빨리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해가 뜨자마자 달려왔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지잉
지잉
지이잉
지잉
박준혁에게 건네받은 핸드폰에선 쉴 새 없이 진동이 울렸다.
“이거 왜 이래? 고장 났어?”
“아뇨. 스크린을 보십시오!”
박준혁의 말에 시선을 내려 스크린을 보자, 새로운 알림이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뭐야 이건? 설마···. 새벽부터 이런 건 아니지?”
“네! 아닙니다!”
“다행이네.”
미친 듯이 올라오는 스토어 알림에 살짝 질렸던 나는 고개를 흔드는 박준혁에 잠깐 안심했다.
하지만 이어진 박준혁의 대답에 다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보다 더 심했습니다!”
“뭐? 새벽부터 알람이 울렸다고? 왜?”
“네! 이것 좀 보십시오. 이걸 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놀람에 입을 떡 벌린 내게서 핸드폰을 다시 가져간 박준혁은 요령 좋게 계속 떠오르는 알림창을 피해 스크린을 몇 번 터치하더니 어떤 게시글 하나를 띄워 내게 돌려주었다.
게시글이 올려진 시각은 오늘 새벽 1시 12분. 제목만으로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게시글이었다.
제목: 나 찾았음. (134)
우리 아라님이 새벽에 말한 곳 찾았음.
신비한 농장이라고 해서 찾기 좀 빡세겠네?라고 생각했는데 아님ㅋㅋㅋ 우리 아라님은 돌려서 말하는걸 못한다는 걸 다시 깨달았음. 크크크 여기다.
https://smartstore.gaver.com/shinbee
┗진짜 신비농장ㅋㅋㅋㅋㅋ 개 직관적으로 줬었넼ㅋㅋㅋ
┗여기가 그 스토어 맞아요?
┗┗ㅇㅇ 맞는 듯. 아까 아라가 경쟁 겁내 심하다고 했는데, 여기 문의 글 들어가 봐 전쟁 난 줄
┗┗┗확인하고 왔는뎈ㅋㅋ 여기 뭐냐? 그냥 농작물 판매 하는 거 아니냐? 왜 다 품절인데?
┗┗┗┗벌써 다 쓸고 간 듯. 재입고 언제 되는지 물어보겠음. 우리 아라가 잘 못 구한다는데, 내가 구해서 보내준다!
게시글을 읽고 있으니, 박준혁이 옆에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에 우리 아라님께서 라디오에 첫 출연을 하나는 소식에 라디오를 켜놓고 듣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아라님께서 그 천상의 목소리로 저희 신비농장에 대한 홍보를 해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홍보···?”
“정확히 저희 농장 명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결정적인 힌트를 주셨죠.”
“힌트?”
“네! ‘제 피부의 비결은 신비한 곳에서 산 작물로 만든 주스랍니다! 오호호!’라고 하셨습니다.”
오호호?
심각하게 게시글을 읽던 나는 뜬금없는 박준혁의 성대모사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그 아라라는 가수가 언급해서 이 사달이 난 거라는 거지?”
“네!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늘어나는 고객들의 요청에 변화를 줄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박준혁에게 지시를 내렸다.
“흠···. 일단 공지 띄워. 많은 관심은 감사하지만, 최고의 품질을 위해 당분간 하루 판매 수량은 유지할 거라고.”
“당분간이요?”
“어. 지금 너 연구 하면서 내 일 도와주는 거 힘들지 않아? 안 그래도 점점 요청이 많아져서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고용할까 했는데, 잘됐네.”
“알바생을 고용한다고요···?”
“어. 너 일도 많으니까, 이제 나눠서 해.”
“아닙니다! 전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제가 다 할 수 있습니다!”
다 할 수 있다고 가슴을 퍽퍽 쳐대는 박준혁의 모습에 나는 씩 웃었다.
회사생활을 할 때 평소에는 일이 많다고 징징거리던 부하 직원들의 반응이 꼭 저랬다.
신입이 온다고만 하면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일을 다 하겠다고.
나는 이런 억지를 부리는 부하 직원들을 달래는 방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알바생이 오면 잘 가르쳐주길 바라. 니가 윗사람이잖아?”
“윗사람······!”
“그래. 윗사람.”
바로 기를 살려주는 것.
상사인 내가 너를 인정해준다는 말 한마디에 부하 직원들은 바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철회하곤 했다.
지금 박준혁처럼.
“큼. 그럼, 제가 알바생 공고를 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격이 필요할 테니까요.”
“자격이 필요할까···?”
“네!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최선을 다해서! 우리 신비농장에 도움이 되는! 알바생을 뽑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따 다시 오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쇼!”
“어. 그래.”
기가 좀 많이 살아난 것 같긴 했지만, 뭐, 알아서 잘하겠지.
**
“이게 뭐야? 신비농장? 상품 아무거나 삽니다?”
마동태는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익숙한 농장 이름을 단 게시글을 발견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신비농장 상품 겟하신 ‘금손’님들 제가 사겠습니다. 어떤 상품이든 상관없습니다. 1.5배 쳐 드림.]
신비농장의 작물을 웃돈 주고 구매하겠다는 것.
“신비농장이라고 하면···. 그 산 아랫동네잖아? 근데 이게 갑자기 왜?”
특별한 작물도 아닌데···. 왜?
의문을 가지던 마동태는 게시글 아래 달린 댓글을 보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 참. 아라가 농작물을 먹었는데 몸이 좋아졌다고 했다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뭐, 내 어깨도 좋아지나? 참 내.”
몸이 좋아진다는 소리에 마동태는 제 어깨를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박람회가 지난 지 몇 주가 지났음에도 곰 같은 사내에게 잡힌 어깨는 아직도 가끔 욱신거렸다.
“아, 그놈만 없었어도···.”
바로 지척에서 연예인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마동태는 가수 아라로 예상되는 여자의 모자를 뒤에서 벗기려다 실패했던 날을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아니지. 이렇게 다친 것도 어떻게 보면 신비농장 그놈들 때문이잖아?”
신비농장의 머리숱이 많은 놈이 면상만 반지르르한 놈에게 시비만 걸지 않았더라면.
큰 소리로 ‘아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 어깨가 여태껏 아플 일은 없을 터였다.
“산 중턱에 있는 비닐하우스라고 그랬었지 아마.”
그러니,
한번 가볼까?
내 치료비도 겸할 겸. 사지 못해서 저렇게 빌빌거리는 사람들도 도와줄 겸.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지.”
신비농장을 방문할 계획을 세운 마동태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타자를 쳤다.
‘신비농장 작물 구해드림. 대신, 가격은 2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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