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비오는 날에는...
일자로 긴 싱크대가 자리한 주방 안.
싱크대 벽 쪽으로 쭉 붙여진 하얀색 타일은 주인의 성격을 보여 주듯,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화이트와 우드톤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우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방 중앙에는, 싱크대 상판과 같은 톤의 원목 식탁이 자리했다.
식탁에 의자는 4개 밖에 없었지만, 6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이 넓은 식탁을 홀로 차지한 박준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실실 웃으며 열심히 노트북을 치고 있었다.
“나보고 윗사람이라고 했다.”
쉬지 않고 타닥거리며 일정한 소리를 타자 소리만큼 화면에는 검은색 글씨가 가득했다.
“알바생이라고 해도, 막 뽑을 수는 없지. 형님을 절대적으로 보필하며! 자기 일처럼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뽑아야지. 암.”
박준혁은 어제 아침, 믿는다며 아르바이트생 선정을 자신에게 모두 일임한 한울을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형님의 기대를 절대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꼼꼼하게 알바생을 뽑을 생각이었다.
“알바생의 기본조건은 뭐니 뭐니 해도 성실함이지.”
이미 여러 가지 조건들로 가득 찬 알바 구인 글에 박준혁이 또 다른 조건을 입력했다.
“그다음은 독해력과 이해력. 아무리 성실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말짱 꽝이지. 암.”
박준혁의 손가락은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좋았어. 그리고 다음은···.”
이미 5천 자는 훌쩍 넘는 것 같은 알바생 구글에 박준혁이 다음 질문을 입력하려 할 때였다.
-띠리릭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습기를 머금은 묵직한 공기가 집안으로 훅 들어왔다.
묵직한 공기 뒤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쏴아아.
발걸음 소리 뒤로 들려오는 빗소리와 장화를 탁탁 터는 소리에 박준혁은 옆 의자에 걸쳐놓았던 수건을 서둘러 챙겨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끼익.
주방과는 달리 아직 옛 마룻바닥이 그대로 남은 복도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세월의 소리를 뱉어냈다.
“할머니 오셨어요? 우비 이리 주세요.”
현관으로 도착한 박준혁은 커다란 판초형식의 파란색 우비를 벗고 있는 강 할머니를 도우며 말했다.
커다란 우비도 저 거센 비는 막지 못했는지, 우비를 벗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아이고. 고맙다. 밖에 비가 오질라게 많이 와가 이제 일을 못 하겠다.”
박준혁에게서 건네받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강 할머니가 숨을 골랐다.
“그러게 제가 같이 가서 도와드린다니까요.”
“아이고마. 됐다. 만날 한울이네 가서 일하고, 집에 와서 뭔 연구한 다카면서 뭔 일을 또 한다고 하나. 쉴 때는 쉬어야 된다. 니 없을 때도 내는 다 내 혼자 잘했다. 걱정 마라!”
세차게 내리는 비에 논둑을 좀 손보고 온 것뿐인데, 호들갑을 떠는 박준혁에 강 할머니가 일 없다며 손을 휘저었다.
“그래도···.”
“그래도는 뭐 그래도고! 아까도 뭐 해야 한다고 사부작거리더구먼. 그거는 다했나?”
“이제 거의 끝났어요.”
“글나? 그럼 비 오는데 찌짐이나 무 볼까?”
이상하게 비가 오는 날에는 찌짐이가 당긴다는 강 할머니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박준혁이 손뼉을 짝하고 쳤다.
“찌짐이? 아. 부침개요? 좋아요!”
이제 미화리에 산지도 시간이 꽤 지나 어지간한 사투리는 감으로 때려 맞추는 수준까지 왔다.
“오야. 잠시만 기다려보래이. 후딱 씻고 와서 해주께.”
뭐만 해준다고 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박준혁에 강 할머니가 흘흘 웃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네! 물 끓여 놓을까요?”
“어? 물을 왜 끓이는데?”
화장실로 향하던 강 할머니는 박준혁의 질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부침개 반죽할 때 익반죽하는 거 아니에요?”
“익반죽? 아이고.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누가 찌짐이 반죽하는데 뜨거운 물을 붓는다 카드노. 혹시 니네 집에서 그렇게 먹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와 모르나? 하기사, 요즘 얼라들이 부엌에 들어가 봤어야 알지. 우리 아도 시집가고 나서야 밥해 먹었지, 그전까지는 내가 다 해줬다. 이참에 찌짐이 부치는 방법 알려줄 테니까 단디 배워뒀다가 나중에 집에 가면 니 엄마한테 해줘라. 알았제?”
이제 다 컸으니 한 번쯤은 엄마에게 요리를 해 줘 보라는 강 할머니의 말에 박준혁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해드리고 싶은데, 지금은 안 계셔서···.”
그리고 한숨.
“으잉?”
어딘가 그리운 표정을 하고 한숨을 내뱉는 박준혁에 강순자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설마 이 얼라 엄마 없는 거 아이가?’
생각해보니 저 키만 멀대같이 큰 학생이 부모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혹시나 자신의 말로 인해 박준혁이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걱정된 강순자는 빠르게 사과를 하였다.
“아이고···. 할미가 헛소리했다. 미안타. 나이가 이래 드니까, 말이 그냥 막 나온다. 이해 좀 해도. 대신 먹고 싶은 찌짐이 있으면 이 할매한테 다 말해라! 이 할미가 다 만들어 줄게! 익반죽한 찌짐이? 뭐 그까짓 거 함 해보자!”
잘못을 인정한 강순자가 가슴을 턱턱 두드렸다.
평소에도. 애가 밥이라면 환장을 하고 먹더라니. 이게 다 어미가 없어서 그런 거였다고 생각하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와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네? 진짜요? 앗싸 그럼 저 파전이랑 호박전이랑 해물전이요!”
“그거면 되나?”
“네! 너무 좋죠. 사진 찍어야지!”
“사진 찍어서 뭐하게? 뭐 인별인가 뭔가 거기에 올리게?”
분명 상처가 됐을 텐데도 다시 활짝 웃으며 평소의 모습대로 돌아온 박준혁을 보며 미소지었다.
사진을 찍어 자랑하려고 하는 것 같으니, 오늘 냉장고를 다 털어서라도 온갖 전을 다 만들어 줄 거라 생각하며.
하지만 강 할머니의 미소는 길게 가지 못했다.
바로 이어지는 박준혁의 말 때문에.
“엄마한테 자랑하려고요.”
“으잉? 니 엄마 없다고 하지 않았나?”
엄마한테 자랑한다니?
없는 거 아니었나?
조금 전 모친에 대해 생각 없이 언급한 죄로 박준혁에게 사과한 강순자는 혼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강 할머니의 표정을 캐치한 박준혁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네? 아아. 한국에 안 계시고 부모님 두 분 다 외국에 계세요.”
“뭐라꼬?”
그러고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강 할머니 앞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오해하셨구나. 풉. 저 엄마 아버지 전부 다 잘 살아계십니다. 외국에서. 푸흐흡.”
“두 사람 다...? 진짜가?”
박준혁이 웃거나 말거나, 심각한 표정을 한 강순자는 다시 확인했다.
그 말에 한치에 거짓이 없는 것이 맞느냐고.
“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셨구나. 전 또 뭔가했···. 아야!”
박준혁의 확인을 받자마자, 강순자는 손바닥으로 박준혁의 등을 때렸다.
찰싹찰싹.
“이 당나구 같은 놈아! 그런 건 제대로 얘기를 해야제! 가슴이 내려 앉는 줄 알았다 어이구! 어이구! 니는 한 대 맞아라!”
니때문에 심장마비로 돌아갈 뻔했다는 강 할머니에 박준혁은 두 손을 들고 외쳤다.
“푸흡! 할머니 저 죽어요! 아야! 항복! 푸흡. 항복이라니까요!”
등짝을 맞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한 박준혁은 그렇게 항복을 외치며 집안을 뛰어다녔다.
**
눈치 없는 박준혁이 강 할머니의 강스파이크를 피해 온 집안을 뛰어다닐 무렵.
산 중턱의 비닐하우스 옆에서는 고 경비와 멧돼지가 호박고구마를 먹으며 연신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끼에에에! (맛있다!)
-꾸엥꾸에엑! (매일 먹어도 맛있다)
주변은 세찬 비에 찰박거렸지만, 고 경비와 멧돼지가 먹고 있는 호박고구마엔 비를 맞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비가 들이치지 않은 이유는 한울이 고 경비와 멧돼지를 위해 쳐놓은 타프 덕분이었다.
-꾸엥꾸에엥? (이 밑에는 비가 하나도 세지 않는다! 신기하다!)
-끼에엑! (이게 다 이 집 주인의 능력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무 밑이나 굴속에 몸을 숨겨왔던 멧돼지는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맛있는 호박고구마를 먹을 수 있음이 행복했다.
-꾸에에엑! (기분이 너무 좋다!)
기본이 너무 좋아진 멧돼지는 타프 밖으로 뛰어나가 진흙에 몸을 다이빙시켰다.
뒹굴뒹굴.
비를 머금어 차가움을 간직한 진흙은 뒹굴 때마다 시원함을 선사했다.
멧돼지가 뒹굴거리는 곳은 한울이 지정해준 구역이었는데, 계약 후 밭 주변에서 근무하는 멧돼지를 위한 한울의 배려였다.
-꾸에에에엥!
비가 오는 날만 할 수 있는 진흙 목욕에 신이 난 멧돼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 경비가 작은 소리로 울었다.
-끼에엑···. (이거 내가 다 먹는다···?)
산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울림통을 가진 고 경비답지 않은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멧돼지는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꾸엥!꾸에에! (안된다!)
빗소리로 인해 더 알아듣기 힘든 고 경비의 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멧돼지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꾸엥꾸에엑! (어떻게 너 혼자 먹으려고 하냐. 너무하다!)
두두두두.
커다란 덩치로 자신을 향해(정확히는 호박고구마를 향해) 멧돼지가 돌진하자,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렸다.
그 기세에 놀란 고라니는 황급히 제 몫의 고구마 하나를 멧돼지 쪽으로 넘겼다.
-끼에에! (조금은 남겨주려고 했다! 사과의 의미로 이걸 주겠다.)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재빠른 몸짓이었다.
-꾸에에엥! (너 착한 고라니였구나! 고맙다!)
다행히 멧돼지는 작디작은 고구마 하나에 흥분을 멈추고는, 건네받은 고구마를 한입에 넣어 챱챱 씹었다.
그렇게 고 경비와 멧돼지의 고구마 씹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질 무렵.
빗소리를 뚫고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 산 중턱에 있는 비닐하우스. 여기구나.”
-꾸엥? (누구지?)
예민한 귀를 가진 멧돼지가 고개를 들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하지만 수풀을 해치고 나타난 사람은 검은 우장을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끼에엑! 끼엑! (내가 경비니 확인하고 오겠다!)
멧돼지의 행동에 입안에 남아있던 고구마를 한 번에 삼킨 고 경비가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고 경비, 잘했어. 자, 이건 특별 포상.’
신비농장의 주인, 한울은 아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그저 비닐하우스 주변에서 머물며 혹시나 접근하는 이를 발견해 알려준 것뿐인데, 매일 고구마를 주었다.
고구마를 주는 것도 고마울진대, 멧돼지를 발견한 그 날에는 포상이라며 양배추를 줬었다.
고구마와는 또 다른 맛을 가진 양배추.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 경쾌한 소리가 나는 양배추의 달콤한 맛을 떠올리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츄릅.
입안 가득하다 못해 넘치려는 침을 삼킨 고 경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낯선 사람을 향해 내뱉었다.
-끼에에엑!!
**
“히익!”
비닐하우스 앞에 다다랐던 마동태는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괴성을 질러대는 고라니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철퍼덕.
“저, 저리 가!”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찐 마동태는 서둘러 손을 휘저으며 땅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훠이! 저리 가! 쉭쉭!”
굵은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고라니에게 위협을 가했지만, 고라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끼에에에엑!
물러서기는커녕,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또다시 낼뿐.
“뭐, 뭐야 이 미친 고라니는···?”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나뭇가지를 휘둘러도 움찔하지도 않고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라니에 마동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주문받은 걸 생각해야지.”
미친 고라니를 이길 방법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끼에에엑!
“으아악!”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고라니는 소름 끼치는 소리로 계속 울기만 할 뿐, 자신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
설마, 울기만 하고 덤비지는 않는 건가?
그럴듯한 가정을 세운 마동태는 몇 번 몸을 움직여 고라니의 반응을 살폈다.
“난 너한테 볼일 없어. 진정해. 옳지.”
고라니가 자신에게 덤비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마동태는 시선을 고라니에게 떼지 않은 채 조심스레 몸을 비닐하우스 쪽으로 움직였다.
쏴아아.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인해 눈을 뜨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마동태는 눈을 부릅뜨고 고라니를 주시했다.
짐승들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공격을 당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끼엑?
비닐하우스로 움직이는 자신을 보며 고라니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행히 더는 제 쪽으로 오지 않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탁.
계속해서 고라니를 주시하며 비닐하우스 쪽으로 걷던 마동태의 장갑 낀 손끝에 따뜻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걸 보니, 비닐하우스에 다다른 게 분명했다.
“후.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비닐하우스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마동태는 시선을 고라니에게 고정한 채 팔을 뻗어 비닐하우스 벽으로 느껴지는 것을 더듬었다.
“어···?”
하지만 이내 마동태는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
자신이 비닐하우스 벽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렸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벽이 숨을 쉰다고 생각하자, 전신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전속력으로 달린 것마냥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달래기 위해 마동태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쉬익쉬익
“....?”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쉬익거리는 소리에 마동태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는 들어 올린 제 얼굴 바로 앞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소리를 내뱉었다.
“어···?”
반짝거리는 눈동자.
번들거리는 코.
거기다 자신의 얼굴만 한 송곳니까지.
생각지도 못한 것과 조우한 충격으로 인해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자.
코앞에 있던 멧돼지가 입을 열었다.
-꾸엥?
얼어있던 마동태는 멧돼지의 울음소리에 펄쩍 뛰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메, 메, 멧돼지!!! 으아아아악!”
철퍼덕하고 넘어진 마동태가 뒷걸음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멧돼지가 흥분한 듯 앞발로 흙을 차기 시작했다.
-꾸에에에에엑!!!
그러고는 울음소리와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으아아아아아 사람 살려!-!”
꼬르륵.
육중한 몸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멧돼지의 모습을 끝으로, 마동태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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