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내가 해결해 주겠다!
탈탈탈탈탈...
아침 농사일을 마쳐 조용한 논길 위해 탈탈거리는 엔진소리를 내는 경운기 한 대가 천천히 가고 있었다.
초록색 벼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논길은 비가 온 게 언제였냐는 듯, 바싹 말라 경운기 옆의 남자 2명이 걸을 때마다 흙 보라를 일으켰다.
“다들 그 소식 들었나?”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말했다.
“무슨 소식?”
그 옆에 있던 빨간장화를 신은 남자가 물었다.
“왜 있잖아. 한울이네 농장.”
“으잉? 왜 한울이네 농장에 뭔일이 생겼어?”
한울이라는 말이 들리자, 경운기에 앉아있던 이가 반문했다.
“아이고. 그렇게 소식이 늦어서야 원.”
쯧쯧.
혀를 차는 밀짚모자 남자에게 경운기에 탄 남자가 버럭했다.
“아니! 모를 수도 있는 거제. 얼른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잘 들어봐라?”
“어. 얘기해봐라.”
“왜 어젠가 그젠가 비가 억수로 오던 날 기억나?”
“그저께? 당연하지. 내가 논둑 튼다고 비 맞으면서 을매나 고생했는데. 강 할매네 것까지 다 텄다!”
경운기에 앉아있던 남자의 정체는 한울의 옆집, 심 할배였다.
심 할배가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투덜대자, 그 옆에 있던 빨강 장화를 신은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 오는 김에 배추 모종 심는다고 나갔다가 죽는 줄 알았다.”
“아니 모종은 비가 적당히 올 때나 심는 거지. 뭔 비가 그치로 오는데 나가서 모종을 심어. 바보 아이가?”
“바보라니!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나갈 때는 별로 안 왔었단 말이다!”
비 온 날 얘기를 하자마자 자신의 얘기를 듣기는커녕, 투덕거리는 둘에 밀짚모자를 쓴 어르신이 낮게 읊조렸다.
“... 그래서 둘이 내 얘기 들을 거가 말 거가? 계속 싸울 거면 내는 그냥 간다.?”
“아이다. 뭔 소리하노. 우리는 지금 건실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맞다. 건실한 토론 이제 끝났으니까 이제 그 얘기나 해봐라. 비 오던 날 한울이네 농장에 뭔 일이 있었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없을 거라는 밀짚모자의 말에 심 할배와 빨간장화가 손사래를 쳤다.
두 사람의 시선을 확인한 밀짚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말이제. 팔씨름대회 때 마지막에 한울이랑 붙었던 아 기억하나?”
“그 핑크색 티셔츠에 막 팔 울끈불끈 하던 놈 말하는 기가?”
“어어. 맞다. 그놈.”
“근데 금마는 와?”
울끈불끈한 놈이라고 하면, 분명 마동태라고 했던 젊은이일 것이다.
마동태에 대한 몇몇 소문을 들었던 심 할배가 밀짚모자에 물었다.
“설마, 금마 또 사고 쳤나?”
심 할배의 말에 빨간장화가 전혀 아는 게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와? 금마 유명하나?”
“니는 뭐 귀를 닫고 사나? 금마 이번에 박람회 했을 때도 사고 쳐서 다 벼르고 있다 아이가.”
“박람회 때도 사고를 쳤다고···?”
“맨날 근무지 이탈하고, 영업하는 부스에 가서 영업방해하고···. 낸중에 들어보니까 우리 부스에도 와가 시식 다 털어먹었다더라. 아마 미운털 단단히 박혔을 거다. 차 이장도 벼르고 있을걸?”
“차 이장이 와?”
“차 이장이 금마 데리고 왔잖아. 그래서 사람들이 전부 차 이장한테 가서 항의하나 보드라고.”
“아이고···. 차 이장도 골치 아프겠네. 그래서 갸가 한울이 농장에는 뭔 짓을 했는데?”
심 할배의 설명을 들은 빨강 장화가 이제 알았다며, 고개를 돌려 밀짚모자를 쳐다봤다.
“이제 내 말 해도 되는기가?”
심 할배와 빨간장화의 대화에 옆에서 병풍처럼 서 있던 밀짚모자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그게 뭔소리고. 우리는 니가 얘기하기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글나?”
“당연하제!”
우리는 너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는 심 할배와 빨간장화의 설득에 밀짚모자는 집게손가락을 쭉 폈다.
“알았다. 내 이번은 넘어간다. 다들 말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말이 뭐 이렇게 많노. 암튼, 결론을 말하자면, 그 마동태라는 아가 한울이네 농장을 망가뜨렸단다.”
밀짚모자의 말에 심 할배가 분노의 샤우팅을 내뱉었다.
“뭐라꼬? 한울이네 농장을 다 망가뜨렸다고? 미쳤나? 와? 뭔 억하심정이 있어가?”
“한울이가 키운 작물들이 요새 그 뭐냐 인터넷? 거서 유명하다메. 기다렸다가 사야지 안 그러면 사지도 못한다고.”
“그러긴 하는데 농장은 왜 망가뜨렸다는데? 웃기는 아네?”
“원래 작물들을 훔치려고 했는데, 그때 비가 많이 와서 미끄러졌는가 보더라고. 그래서 비닐하우스 주변이 엉망이 됐다드라”
“우야꼬. 비닐하우스 그거 비쌀 텐데.”
비닐하우스가 망가졌다는 말에 빨간장화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밀짚모자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검지를 흔들었다.
“비닐하우스만 문제가 아이다.”
“그럼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기는. 다 문제지. 듣기로는 사유지 침입한거랑 나무 망가뜨린 거, 그리고 또 뭐더라, 사기! 사기까지 쳤다던데···.”
“사기?”
“어. 한울이네 작물 훔쳐다가 원래 가격에 몇 배나 팔려고 했단다.”
“진짜 못됐네. 뭐 그런 아가 다 있나?”
“안 되겠다. 내가 직접 가서 따져야지. 어딜 할 게 없어서 힘들게 농사지은 걸 훔쳐서 팔 생각을 하노! 이건 한울이뿐만이 아니라 우리 미화리 농사꾼들한테 도전장을 내민 거나 진배없다!”
비닐하우스를 망가뜨린 것도 모자라 한울의 작물까지고 장난을 치려 했다는 말에 심 할배가 경운기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빨간장화도 심 할배의 말에 동의했다.
“맞다! 가자!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가자!”
금방이라도 마동태를 보러 갈 거라며 씩씩거리는 두 사람을 밀짚모자가 말렸다.
“아서라. 벌써 끝났다.”
“어잉? 뭐가 끝났는데?”
“차 이장이 마동태 금마 가족한테 연락해가 데리고 갔단다.”
“...? 그게 뭔 해결이고. 가족들이 데리고 가면 좋은 거 아니가?”
“들어봐라. 알고 보니까 금마 원래 이쪽 동네 사람이니라 저기 바닷가 사람이더라고.”
“바닷가?”
“어. 차 이장한테 사람들이 하도 항의를 하니까 차 이장이 금마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봤다더라.”
팔씨름이 끝난 후, 차 이장은 마동태가 자신의 마을 출신이 아닌 걸 밝히면서 사과를 했었다.
“...뭐꼬 차 이장도 금마가 어디 출신인 줄 몰랐다 이거가? 어느 마을 출신이냐고 물을 때 ‘어 저 옆 마을’ 이라고만 한 이유가 있었네. 외부 사람을 들이더라도 잘 좀 알아보고 했어야지.”
에잉 쯧쯧.
사람 하나 잘못 들여서 차 이장도 고생이라며 심 할배가 혀를 찼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건데 뭐 어쩔 기가. 그냥 마동태 금마가 근처에 서 살았다니까 넘어갔던 모양이던데. 그것보다, 들어봐라. 그 가족들이 왔다고 했다 했제?”
“어.”
“근데 가족들이 마동태보다 덩치가 더 크라더라.”
“뭐? 덩치가 더 크다고? 뭐 하는 집안인데?”
밀짚모자의 말에 빨간장화의 눈이 크게 떠졌다.
팔씨름을 할 때도 모두가 피하고 싶어 했었던 만큼 큰 덩치를 자랑하던 마동태였다.
진짜냐며 호들갑을 떠는 빨간장화의 모습에 혀를 끌끌찬 심 할배가 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추리했다.
“가만 보자···. 바닷가라 그랬으니까, 설마 뱃사람들인가?”
“맞다. 오징어잡인가? 그거 한다 하더라고.”
“오징어잡이 배? 아이고. 도망 나왔구먼.”
“정확하다. 배 타기 실어가자고 도망쳤다더라. 차 이장이 안 그래도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연락할 거라고 벼르고 있었다 하데.”
모내기에서 도망친 전적도 있거니와, 박람회 때 깽판을 쳤던 전적까지 더해져 차 이장이 이를 갈고 있었다고.
오징어잡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차분해진 심 할배가 잘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랬다. 나이도 솔찬히 먹었던 거 같던데, 뭐라 하면 입만 아프다. 잘 보냈네. 그럼 한울이한테 보상은 한 거가?”
오징어 배는 오징어 배고, 피해에 대한 보상은 단디 받아야 한다며 다시 한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게 빅히트다. 우리 한울이가, 억수로 착하다 아이가.”
“그치. 착하지.”
“근데 거기서 딱 그랬단다. ‘니는 요래 요래해 가 잘못했으니 죗값을 치러야 한다!’”
“오. 그래서?”
“한울의 그 카리스마 있는 말에 마동태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 가족들도 아 교육 다시 잘하겠다고 엄청 사과했다더라. 피해당한 건 당연히 보상한다카고. 그리고, 뭐라더라? 가족들이 미안하다고 해산물을 돌린다 했나···.”
피해당한 것들에 대한 보상은 물론이거니와, 여태 마동태로 인해 직간접적인 피해를 보았을 마을 주민들에게도 사과의 의미로 성의를 표하기로 했다는 밀짚모자의 말에, 신난 심 할배가 경운기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뭐꼬? 그럼 우리 한울이 덕분에 해산물 먹는 기가?”
“그제!”
“이야 나도 뭐 좀 해 줘야겠네!”
“쉰 소리 말고 경운기 운전이나 잘해라!”
고개를 밀짚 모자에게로 완전히 돌린 체 ‘한울이한테 뭘 주면 좋겠냐?’라고 묻는 심 할배에 빨간장화가 앞을 가리켰다.
“뭐꼬. 경운기는 눈감고도 운전할 수 있다. 봐라.”
하지만 심 할배는 빨간장화의 말에 앞을 보기는커녕 콧방귀를 뀌며 눈을 감았다.
나이를 먹어도 철없는 사내의 허세였다.
그런 심 할배의 모습에 빨간장화가 경고했다.
“그러다 고랑에 빠지면 안 아프제?”
논길은 경운기보다 조금 더 넓었기에, 빨간장화의 경고는 타당했다.
하지만 심 할배는 다시 콧방귀를 뀌며 경운기의 핸들을 이리저리 돌렸다.
“헹! 눈감고도 한다니까”
몇십 년을 여기를 다녔는데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와 함께.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 어어어어어! 핸들 돌리라!”
“뭐라노? 어? 어어어어어! 으억!”
쿵.
경운기는 빨간장화 어르신의 예언대로 고랑에 빠지고 말았다.
**
‘...그러니까 절대 밭은 들어가면 안 된다!’
“꾸엥!”
고 경비에게 인간에 대한 교육을 받은 멧돼지는 보무도 당당하게 산 중턱에서 내려왔다.
낮에는 한울과 노을, 찹쌀, 그리고 포동이까지 있어 지금부터는 멧돼지의 자유시간이었다.
그리고 멧돼지는 이 자유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마을 초입에 들어섰다.
“꾸에엥-”
고 경비의 경험담을 이해하자면, 인간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비닐하우스와 밭에 들어갈 때만 무섭게 변하는 것 같았다.
“꾸엥꾸엥!”
그러니 멧돼지는 자신 있었다.
이미 찹쌀과 노을이를 통해 인간이 소중하게 기른 작물들은 꼭 인간들이 줄 때만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멧돼지는 절대 인간들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것을 탐낼 생각이 없었다.
“꾸엥!”
고 경비는 인간들이 무섭다고 했지만, 멧돼지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잘못은 고 경비에게 있는 것 같았다.
“꾸에엥!”
나는 고 경비와는 반대로 할 거다!
꼭 인간들의 허락을 받고 출입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인간들을 도와주고, 당당하게 맛있는 음식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쉬는 시간에 인간들을 도와 보답을 받아 돌아간다면, 한울이 칭찬해 줄 게 분명했다.
인간들에게서 보답을 받고, 한울에게서도 보답을 받으면 맛있는 음식이 무려 2배!
츄릅.
산처럼 쌓인 먹을 것들을 생각한 멧돼지의 입에서 침이 주룩 흘렀다.
“꾸에!”
서둘러 흐르는 침을 수습한 멧돼지의 귀에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렸다.
멀지 않은 곳인지, 사람들의 말소리도 비교적 정확하게 들렸다.
“한울이가······.”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거리던 멧돼지는 한울의 이름에 반응했다.
“꾸엥?”
한울의 이름이 언급되는 걸 보니 한울과 친한 사람이 분명했다!
이 사람들을 도와주면 한울이 더 좋아하겠지!
목표를 정한 멧돼지는 신나게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도움을 주고 먹을 걸 얻어먹을 생각에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멧돼지가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갔을 때쯤.
“눈감고도 한다니까. 어? 으억!”
갑자기 인간들의 고함이 들리더니 한 인간이 타고 있던 커다란 쇳덩이가 고랑에 빠졌다.
“꾸엥···?”
경운기에서 빠져나온 인간까지 총 세 명의 인간들이 경운기를 고랑에서 빼내려고 애쓰는 걸 보며 멧돼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걸 못 빼지?
“꾸엥!!”
멧돼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람들의 힘이 모자라 경운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걸!
저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쉬익쉬익
생각보다 빨리 인간들을 도와줄 기회를 발견한 멧돼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간들을 어서 빨리 도와주기 위해 멧돼지는 뒷다리에 힘을 주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슥슥.
뒷다리에 힘을 준 상태로 앞발로 땅을 슥슥 다진 멧돼지는 킁! 하고 숨을 크게 내뱉었다.
동시에 뒷다리를 박차며 경운기를 향해 돌진했다.
무게 150kg.
육중한 무게의 멧돼지가 시속 48km로 달리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운기를 꺼내기 위해 애쓰고 있던 마을 주민들은 갑자기 울리는 땅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뭔소리고······? 저게 뭐꼬? 어억?”
그리고 멧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마주치자마자 얼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멧돼지는 그런 인간들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저 눈이 마주친 인간을 향해 신나게 소리쳤다.
“꾸에에에에에에엑!!!”
비켜라! 저 쇳덩이는 내가 해결해 주겠다!
저 쇳덩이를 꺼낸 뒤 얻어먹을 음식 생각에 고인 침은, 멧돼지의 속도에 못 이겨 사방으로 흩날렸다.
육중한 몸.
진흙을 묻힌 거친 털.
날카로운 송곳니.
결정적으로 침을 사방으로 흘리며 뛰어오는 멧돼지의 모습에 어르신 세 명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메, 멧돼지!!! 으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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