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저 그만두겠습니다.
“...헉!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런 게 있다.”
눈을 반짝이며 ‘역시 형님!’이라고 말하는 박준혁에게 차마 이들이 모두 초창기의 너를 닮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박준혁이 잊은 것 같은 부분을 상기시켰다.
“그나저나, 이분들 전부 랩실에 있다고 하면, 대학원생이실 텐데, 여기까지 아르바이트를 올 수 있는 거야?”
“아, 그건 문제없습니다!”
“문제가 없다고?”
분명 대학원생의 경우 대학생이 잘못을 했을 때 감옥 대신 가는 곳이라고 항상 ‘저는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크흡!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아아. 제가 잘못한 게 맞군요!’라고 했던 박준혁의 넋두리를 참고하자면 대학원생의 경우 자유는커녕 휴식시간도 제대로 없는 곳이라고 하던데.
문제없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자, 박준혁이 핸드폰을 꺼내 몇 번 터치 하더니 한 채팅방을 띄워 내게 보여주었다.
“이걸 한번 봐 주십쇼! 여기서부터 내려서 보시면 됩니다.”
“....?”
박준혁의 핸드폰을 받아든 나는 그의 말대로 채팅창을 천천히 내렸다.
-사수1 이동민 : 야 서리태 하나 가지고 어떻게 시험 서를 뽑아내라는 거냐? 장난?
첫 대화는 이동민이라는 사수의 채팅으로 시작되었다.
박준혁이 우리 농장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랩실에 우리 작물들을 보내 성적서를 받아 주기로 한 조건을 바로 이동민이라는 사수가 모두 하고 있었던 모양.
-나 : 그 한 톨도 정말 제 머리털을 하나 뽑는듯한 심정으로 드렸으니···. 부디···.
-사수1 이동민 : 야 이 미친놈아!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하라고!
“서리태를 한 알만 보냈어?”
“네! 그렇습니다! 그 한 알도 보내는 게 너무 아까워서···. 보내고는 며칠 동안 랩실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기도···? 무슨 기도?”
“우리 서리태 1호, 부디 랩실에서 분석이 성공하여 서리태들을 더 보내지 않아도 되도록! 내 서리태 1호 너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
“...”
서리태 한 알만을 보냈다길래 요즘 대학원 실의 실험실에는 내가 모르는 최첨단 장비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저 아까워서였다니.
박준혁의 절절한 기도를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채팅창을 읽었다.
쓸데없는 대화들을 쭉쭉 넘기자, 곧 박준혁의 셀카의 향연이 펼쳐졌다.
-나 : (사진)(사진)(사진)(사진)
박준혁이 사수 이동민에게 보낸 사진이 무려···. 30장.
채팅앱에서 제공하는 최대사진 개수를 아주 꽉꽉 채워서 보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
아주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박준혁의 셀카에 미간을 찌푸린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셀카가 없어질 때까지 화면의 쭉쭉 내렸다.
남자의 셀카 따위, 감상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수1 이동민 :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진짜 미쳤나···.
이동민이라는 박준혁의 사수 또한 질린 듯 아연한 기색이 완연한 채팅을 보냈었다.
-나 : 선배님, 감 떨어지셨나 봅니다! 제 머리를 주목해 보십쇼!
하지만 박준혁은 아주 당당했다.
선배님이 너무 랩실에서 연구만 하는 나머지, 기출변형 문제에 약해졌다는 소리와 함께.
-사수1 이동민 : 너···. 돌아오면 두고 보자.
당연히 사수인 이동민도 박준혁의 놀림을 단번에 캐치해, 그의 헛소리를 우선 차단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난 뒤.
그때까지 ‘감’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동민의 채팅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채팅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결이 달랐다.
-사수1 이동민: 이거, 포토샵 아니지···?
제발 포토샵이 아니길 바란다는 뉘앙스가 가득 담긴 채팅은 텍스트임에도 간절함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했다.
해당 대화를 마지막으로 핸드폰에서 눈을 뗀 내가 박준혁에게 물었다.
“혹시 이분한테 아르바이트생 구한다고 말한 건 아니지···?”
설마.
제 사수를 이곳에 데리고 올 생각을 했을까 했지만, 박준혁은 언제나처럼 내 예상을 벗어났다.
“당연히! 했습니다! 이건 제가 매일 자랑한 덕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강 할머니의 따뜻하고 맛있는 밥상과 하루하루 지날수록 풍성해지는 머리의 모습을 하루에 3번씩 보냈습니다!”
이건 뭐.
누가 연구하다 온 대학원생 아니랄까 봐.
어쩐지 사진이 많다고 했더니, 무슨 연구하는 것처럼 기록해 사수에게 보낸 모양.
“...장하다.”
칭찬해 달라고 눈을 반짝이는 박준혁에게 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꼬맹이 시절, 산으로 들로 천방지축 뛰어놀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집으로 가 할머니에게 그날의 수확을 내밀었는데. 그때마다 물끄러미 내 손을 보시던 할머니가 하시던 말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나는 할머니가 했던 말의 속뜻을 진정으로 이해했다.
“네! 감사합니다! 선배들이 소문을 냈는지 다른 랩실 사람들도 지원해서 골라내느라 힘들긴 했지만···. 랩실 사람들이야말로,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오케이. 이분들은 제외.”
“네? 왜···?”
박준혁의 설명을 듣고 들고 있던 9개의 이력서를 옆으로 치우자, 맞은편에서 그가 펄쩍 뛰어올랐다.
“왜긴. 네가 저번에 말했잖아. 출장은 한 명만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럼 이분들 뽑으면 랩실에서 나와야 한다는 소리 아니냐?”
“아···!”
바보 돌 트이는 소리가 어디서 들린 것 같은데.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양 손바닥을 짝 마주치는 박준혁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한쪽 분야에 극도로 똑똑하게 되면 다른 분야에는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더라니.
한 번씩 바보에 빙의되는 박준혁을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 분을 볼까···. 마지막 사람은 대학원 사람 아닌 게 확실하지?”
“네! 맞습니다! 지원자 중 유일하게 우리 대학원이 아닌 일반인입니다!”
“아···.”
도대체 누가 지원을 그렇게 많이 했다 했더니.
전부 박준혁의 머리카락 변천사의 소문을 들은 대학원생들이라니···.
하기사, 그분들이 아니면 질문당 최소 2천 자의 서술을 원하는, 대기업의 자소서보다 더 어려운 아르바이트 지원서를 쓸 사람이 없지.
“이름! 김한길! 나이 25입니다!”
“오. 사는 집도 여기랑 가깝네?”
“네!”
“그럼 이분으로 면접 보게 일정 좀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씩씩한 박준혁의 대답에 나는 여태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준혁아, 연구는 잘 돼 가?”
“연구요···?”
“어. 처음에 너 여기 왔을 때 오이 키우는 비법을 알아야 한다고 했었잖아.”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했다.
모내기 배 팔씨름 대회에서 이기고 아랫마을 사람들이 모내기하는걸 구경하며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을 때 오이를 칼처럼 비장하게 들고 등장한 박준혁.
이따금 강 할머니를 마주치면 항상 ‘그너마 용 됐다’라고 할 정도로 인상이 밝아졌다.
“아······.”
“...?”
뭐지 이 반응은?
하루종일 밭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박준혁이었다. 그러니 연구에 어느 정도 진척이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왜? 뭐가 문제 있어?”
“아, 아닙니다! 저,저, 집,집에 까, 깜빡해서! 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내 질문에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버벅 거리던 박준혁은 삐걱삐걱 일어나더니 인사를 꾸벅하고 식탁 의자를 넣은 뒤 쌩하고 밖으로 나가 자취를 감췄다.
“뭐야, 대체.”
삽시간에 사라진 박준혁에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앉아있던 맞은편 의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
“어쩌지···!”
한울의 집에서 나와 강 할머니의 집,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온 박준혁은 방안을 뱅글뱅글 돌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아, 또 이번을.”
손톱을 물어뜯는 건 초조할 때마다 나오는 오래된 버릇 중 하나였다.
이곳, 미화리 산골 마을에 오고 나서부터는 없어졌던 습관이 연구를 생각하자마자 재발했다.
“하···. 어쩌지.”
박준혁을 초조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한울의 질문이었다.
‘연구는 잘 돼 가?’
솔직히 말하면, 연구의 진척은 있었다.
처음에는 오이를 재배하는 비법을 알아 오라는 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막내라는 이유로 이 시골 산동네에 오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살면 살수록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 날이 가면 갈수록 대학원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사라져 랩실에 연구 성과를 보내는데 소홀해진 건 사실이었다.
-띠링!
“선배네.”
타이밍 좋게 울리는 채팅 알람 소리에 박준혁이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사수1 이동민 : 야 너 다음 주에 교수님 돌아오시는 거 알고 있지?
내용은 다름 아닌 해외 세미나에 간 교수님이 다음 주에 돌아온다는 소식.
“후···.”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할 때였다.
비록 피자에 넘어가 얼렁뚱땅 대학원에 입성하게 되었지만, 나름 꿈과 희망이 있었다.
멋지게 박사까지 따내어 우리나라 농업산업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하지만 막상 들어간 연구실에는 좀비들만 널려있었다.
분명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만 해도 모두 멀쩡했던 것 같아 갑자기 일이 바빠 이렇겠거니 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10년째 빠져나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수두룩···.”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던 곳이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일부러 연구 보고를 차일피일 미루며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왔었다.
“하······. 이제 더는 변명할 것도 없다.”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내 가며 여태 버티고는 있지만, 그건 눈 가리고 아웅 용일 뿐.
교수님이 돌아오시다면 바로 들킬 문제였다.
-띠링!
그때 또다시 채팅방의 알람 소리가 들렸다.
-사수1 이동민 : 그나저나 아르바이트 결과는 언제쯤 들을 수 있냐?
사수의 메시지를 곁눈질로 확인한 박준혁은 물어뜯던 손톱을 입에서 떼어냈다.
“아르바이트···.”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잠깐! 이게 고민할 일인가?”
그래도 여태까지 랩실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버텼던 만큼, 목표한 학위를 따고 싶었지만, 그건 아직도 먼일이었다.
-띠링!
-사수1 이동민 : 내 어필 좀 하고 있지? 내가 여태까지 니가 보낸 시료 분석 다 했다는 거 잊지 말았으면 한다.
선배의 두번째 메세지를 읽은 박준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결심했어!”
박준혁의 연구 주제는 ‘비료’였다.
작물들의 더 효과적으로, 보다 상품 가치가 생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것.
“어차피 학위 따고 취업하려고 했었는데···.”
박준혁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켜 놓고 간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아르바이트생 모집 글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4대 보험.
연차수당 지급.
연차 보장.
퇴직금 보장.
주5일, 일 6시간 근무.
월 250
바로 한울이 아르바이트생을 위해 만든 조건이었다.
산골에 있어 오가기 힘든 데다,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할지라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맞다고 해서였다.
“... 결심했어!”
지난 몇 개월 동안 느낀 바로는, 대학원 연구실에 박혀 연구하는 것보다 이곳. 한울의 밭에서 일하며 깨달은 것들이 더 많았다.
거기다 랩실의 선배들까지 대학원 생활을 제치고 이곳에 오고 싶어 할 정도.
꾹.
결심을 마친 박준혁은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선언했다.
“선배님, 저 그만두겠습니다!”
이곳에서 시작한 연구, 이곳에서 끝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과는 저를 노예로 아는 교수보다는 한울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니, 우선 대학원생활을 청산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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