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46화 (46/163)

45. 자애로운 미소

“설마···. 니, 동물들하고 말할 줄 아나?”

“네···?”

갑작스러운 장 이장님의 질문에 나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설마, 정령들과의 대화가 들킨 건가?

하지만 정령들과의 대화는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만 하였다.

상대방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실치 않을 때는 무조건 모른 척이다. 할머니가 알려주신 지혜다.

나는 긴장을 숨기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다. 병아리들이 하도 니 말을 잘 따라가. 혹시나 했다. 농담이다 농담.”

한참을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장 이장님이 손사래를 쳤다.

후. 다행히 정령들과의 대화는 듣지 못하신 모양.

“닭들이 똑똑해서요. 이장님네 병아리라 그런지, 똑똑하더라고요.”

“글나?”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했던 장 이장님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역시. 닭들의 칭찬은 언제나 장 이장님의 기분을 단박에 좋게 만드는 치트키였다.

“네. 이장님도 보셨다시피, 애들이 워낙 똑똑해서요.”

얼마나 똑똑하면 문을 닫아 달라고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치. 내가 봤지. 아이고. 다른 사람들이 이걸 봤어야 했는데! 아깝다!”

“...?”

닭들의 칭찬에 헤벌쭉 벌어졌던 장 이장님의 입가가 다시 심각해졌다.

오늘따라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습에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자, 곧이어 그 이유를 말했다.

“아까 멧돼지가 경운기를 몸통박치기 해가, 고랑에서 꺼내줬다고 했다 아이가.”

“네.”

“근데, 그 멧돼지가 우리한테는 안 덤비더라고. 아니 그렇게 침 질질 흘리면서, 가만있는 경운기에 몸통박치기 할 정도면, 억수로 흥분했다는 소린데···. 그럼 우리도 치여야 했거든. 안그나?”

비닐하우스로 가서 멧돼지를 보면, 꼭 한 마디를 해 줘야겠다.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는 침을 좀 적당히 흘리라고.

나야 멧돼지가 아무런 해가 안된다는 사실을 안다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산짐승. 그뿐이니까.

“많이 놀라셨겠네요.”

“하모. 기절할 뻔했다. 그 멧돼지가 뛰어오는데 막 땅이 울리더라니까. 내는 태어나서 그렇게 큰 멧돼지는 처음 봤다.”

“그래도 어디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열심히 멧돼지와의 무용담을 얘기하시는 걸 보니, 조금 놀랐을 뿐, 다행히 놀람으로 인해 다쳤다거나 한 건 없어 보였다.

“다치기는! 멧돼지가 경운기에 몸통박치기를 하고 나를 딱! 쳐다보는 거라!”

“쳐다봤어요···?”

그건 분명 착한 일을 했으니, 먹을 걸 달라는 신호였을 것이다.

“어! 얼마나 무섭게 쳐다보는 줄 아나? 막 입김은 쉭쉭 거리제, 침은 질질 흘려 쌌지. 내는 처음에 무슨 미친 돼지인 줄 알았다.”

“...”

멧돼지에게 침을 흘리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그냥 산에서 내려가지 말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지금 장 이장님이 하신 말들을 듣는다면, 더 상처받을 거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마음이 여려서 찹쌀과 포동이 달래는데 힘이 들었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멧돼지뿐만 아니라, 고라니에게도 주의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미친 멧돼지’라고 하시던 장 이장님이 말을 바꿨다.

“그런데 말이지. 참 이상했다. 이 말이다.”

“뭐가요?”

“분명히 우리한테 갖다 박고, 밭에 있는 거 다 뽑아 먹고, 밭을 다 헤집어 놓고 가거나, 아니면 위협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가거나. 원래 멧돼지는 호전적인 동물이라 그냥 그렇게 쉽게 가지 않아. 막 덤비지.”

사실 멧돼지가 호전적인 동물이라고 듣기만 들었지, 잘 알지는 못했다. 멧돼지는 군 복무 시절에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 내게는 지금 이곳에서 본 멧돼지가 처음이었다.

따라서 내게는 멧돼지가 그저 겉모습만 험악한 동물이라면, 확실히 보통 사람들에게 멧돼지의 이미지는 장 이장님의 설명이 더 가까웠다.

“그···. 렇죠?”

생각을 정리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 이장님의 의견에 동의하자, 장 이장님이 말을 이어갔다.

“근데 이 멧돼지는 좀 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멧돼지가 우리를 도와주려고 했던 건 아닌가···. 그리 생각되더라고. 쳐다보던 것도, 우리를 위협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괜찮다 전하려고 했던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되는 거 있제?”

“오.”

멧돼지에게 들려줄 좋은 소식이 생겼다.

그래도 너의 의도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 있네.

하지만 내 감탄사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장 이장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 내 같이 있던 치들한테도 이 얘기했더니 내보고 정신 놨나 카더라.”

이미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했다가 비웃음만 당했다는 장 이장님의 모습은, 사건 이후 풀이 죽어 마당에 나타난 멧돼지의 모습과 비슷했다.

“뭐, 그런 멧돼지도 있지 않을까요?”

여우와 오리, 그리고 너구리의 모습을 한 정령들도 있는 마당에, 그런 멧돼지가 전국 팔도에 한 마리쯤이야.

실제로도 장 이장님의 주장이 맞았기에, 나는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말했다.

“그라제? 역시! 서울서 배운 아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창식이랑 병팔이 그노마들은 내가 이래 얘기하니까 그냥 처 웃기만 하더라.”

“...”

두 어르신의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침묵을 택했다.

두 분 다 말이 좀 험해서 그렇지, 좋은 분들이셨다.

내 침묵의 의미를 알아차린 이장님이 오해 말라며 말을 덧붙였다.

“내도 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을 사람들한테 알려주려고 돌아다니는 거 아이가. 아, 니는 특히나 더 조심해라.”

“...?”

특히나 조심하라는 말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그 멧돼지가 니네 집 쪽으로 달려가더니 산으로 사라졌거든. 니 밭 늘린다며. 우리 마을에서 저 산에 땅 가진 사람은 니밖에 없어서 내가 걱정이다.”

“아.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노을과 찹쌀이 있는 한 저 산에서 나보다 안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마시라 웃어 보이자, 장 이장님이 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내도 그 멧돼지가 산신이 보낸 아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또 모르는 거다. 진짜 창식이나 병팔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아이가. 아니, 그 치들 말이 맞을 확률이 더 높지. 그러니까, 니도 막 멧돼지랑 말 통하는 거 아니면 당분간 조심해라이.”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진짜 당분간만 참으면 된다. 내가 구청에 멧돼지 잡으러 오라고 민원 넣어놨다.”

“네??”

나는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는 장 이장님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산신이 보낸 멧돼지 같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보통 멧돼지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게 조금 전이었다. 그런데 민원을 넣어 잡아드리려고 했다니.

“와 놀라노. 내 추측보다는 우리 마을 사람들 안전히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니도 다니다가 멧돼지 보이면 말해라. 알았제?”

멧돼지에겐 안됐지만, 이장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개인의 판단으로 인해 어쩌면 마을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상황은 만들지 않는 게 맞다.

“그런데, 그 경운기는 괜찮나요?”

하지만 풀죽은 멧돼지를 본 나로서는, 멧돼지가 피해를 주지 않았더라면, 한번쯤 기회를 주고 싶었다. 멧돼지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선 우선 경운기가 멀쩡해야 했다.

“...? 아아. 경운기가 멀쩡하냐는 말이제? 고롬. 멀쩡하다. 좀 오래돼서 망가졌으면 이참에 바꾸려고 했는데, 명이 길다.”

“다행입니다.”

일단 경운기가 멀쩡하다는 걸 보니, 찹쌀의 말대로 멧돼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건 없다.

좀 놀라게 하긴 했지만, 장 이장님께는 오히려 도움을 준 셈.

그렇다면 멧돼지에게 제재를 가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 그 점들을 주의시키고 칭찬받을 수 있을 만한 걸 알려주면 될 터였다.

“그러니까 말이다. 멧돼지만 해결되면 딱 인데 말이지. 하······. 진짜 동물이랑 말할 줄 아는 사람 없나?”

“....글쎄요.”

거기다 멧돼지만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준다면, 그리고 그게 마을에 도움 되는 거라면, 어쩌면 멧돼지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며 특식들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실행되려면, 우선 멧돼지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아야 한다.

“멧돼지가 힘이 장사던데. 말만 통하면 신고가 뭐꼬. 맛있는 거 많이 먹이면서 밭일 좀 도와달카면 딱 일텐데. 안 그러나?”

다행히, 장 이장님의 반응을 보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러게요···.”

뭐, 나중에 조금 놀라실 것 같긴 하지만···.

내일은 멧돼지랑 얘기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다.

**

다음 날 아침.

왠지 결연한 눈빛을 한 채 다가오는 박준혁에게 대충 손 인사한 나는, 비닐하우스로 달려갔다.

박준혁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내 모습에 입을 떠벌리며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준혁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너보다 멧돼지가 좀 급해서 말이다.

“컁! 멧돼지를 지켜라!”

“꽥! 멧돼지 착하다!”

노을과 찹쌀은 박준혁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벌써 저 앞에서 비닐하우스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제 집으로 들어가다 말고 장 이장님과 나의 대화를 들은 노을과 찹쌀은, 어제저녁부터 멧돼지를 지켜야 한다며 방방 뛰었다.

당장이라도 집을 박차고 나갈 것 같은 둘에게 멧돼지도 자야 하니 내일 날이 밝으면 가자고 했더니, 노을과 찹쌀의 꼭두새벽부터 나를 깨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깨운 건 아니었다.

한참 단잠을 자다 잠결에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눈을 떴더니, 노을과 찹쌀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침대 헤드 보드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얘들아, 아침에도 말했지만, 이제 그렇게 쳐다보면 안 된다?”

땡그란 시선을 마주하는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시선이 사람이었다면, 주먹도 같이 날아갈 뻔했다.

혹시나 다음번에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노을과 찹쌀에게 잠자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건 금지라고 상기시켰지만, 그들은 당당했다.

“해가 떴는데 한울이 일어나지 않아서 기다렸다 컁!”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있었다! 꽈악!”

그래. 말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찹쌀이 피곤한 나를 깨운답시고 노래를 부르지 않은 게 어딘가 싶었다.

“잘했어. 고생했네.”

다음부터는 추상적인 시간 대신 확실하게 몇 시라고 알려줄 것을 다짐하며 나는 인자하게 웃었다.

-끼에에?

-꾸엥?

비닐하우스에 도착하자, 타프 밑에서 제 몫의 고구마를 먹고 있던 고라니와 멧돼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먹던 걸 멈췄다.

의문 어린 표정이 왜 벌써 왔는지 묻는듯했다.

“아니야. 계속 먹어. 먹고 얘기하자.”

-끼에엥!

-꾸엥!

옳지.

말 잘 듣네.

동서고금 막론하고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는 게 아니랬다.

멧돼지를 보자마자 튀어 나가려는 찹쌀과 노을을 붙잡아 옆구리에 낀 나는 인자한 미소를 유지하며, 멧돼지와 고라니에게 고구마를 편하게 씹으라 말했다.

“호에···.”

주륵.

딱.딱.

동시에 고구마를 먹는 멧돼지와 고라니의 모습에 내 옆구리에 침질하는 여우와 부리를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내는 찹쌀을 위해 주머니에서 간식을 꺼내 건넸다.

“봐봐. 아무것도 안 먹고 나오니까 배고프지? 원래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에는 든든히 먹어야 해. 자, 여기.”

“호, 호에······.”

“....꽈악···?”

하지만 어쩐지, 내 표정을 본 둘은 간식을 가져가지 않았다.

든든하게 먹으라고 하지 말걸 그랬나.

벌써 눈치를 챈 듯한 노을과 찹쌀을 향해 나는 씩 웃어보였다.

아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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