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숙련된 조교 앞으로!
행복한 얼굴로 고구마를 다 먹은 멧돼지는 고개를 들어 이곳의 주인, 한울을 보았다.
“꾸엥?”
웬일인지 항상 한울의 어깨나 주변을 맴돌던 노을과 찹쌀이 그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컁!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이냐!”
“후후후.”
한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퍼지자, 찹쌀이 펄쩍 뛰더니 멧돼지에게 뒤뚱거리며 달려왔다.
“멧돼지! 튀어라! 꽥!”
“꾸엥?”
도망가라는 찹쌀의 말에 멧돼지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냐고? 나도 모른다! 꽈악!”
이유도 모른 채 도망갈 이유는 없다.
게다가 이곳의 주인인 한울은 매우 관대했다.
저 밑에 마을의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이 도와줄 때면 항상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먹을 걸 주었다.
“꾸엥!”
‘먹을 걸 주는 동물 치고 나쁜 사람은 없어!’
멧돼지가 제가 한 말이 꽤 마음에 든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꽥···?”
멧돼지의 말에 잠시 멍한 울음소리를 낸 찹쌀도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한울은 나쁜 사람은 아니다. 꽉!”
“꾸에에-.”
그것 보라며 다시 고구마를 먹기 위해 멧돼지가 고개를 숙일 때였다.
사락.
살랑거리는 무언가가 멧돼지의 앞을 지나나 싶더니, 이내 멧돼지의 머리 위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꾸에···?”
길어진 그림자에 고개를 한번 갸웃 한 멧돼지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고구마를 입에 넣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고 해서 고구마의 맛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꾸잉꾸잉!”
고라니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고구마를 먹어치운 멧돼지는 기쁜 울음소리를 내며 오늘도 만족스러웠던 식사를 끝냈다.
“컁! 이제 다 먹은 거냐?”
식사를 끝낸 뒤, 한울이 지정해준 전용 진흙탕에 몸을 굴리려 타프 밖을 벗어나자, 멧돼지의 머리 위의 그림자가 말을 걸었다.
“꾸엥?”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몰랐는데, 그림자를 늘린 주인공은 바로 여우 정령 노을이었다.
노을이 멧돼지에게 이렇게 가까이 온건 처음인지라,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냐?’
곧 있으면 진흙에 점프해 뒹굴뒹굴을 해야 했기에 노을에게 얼른 질문하였다.
멧돼지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노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쭉 피며 말했다.
“나, 위대한 노을이 너의 시범 조교가 되어주겠다! 컁!”
“꾸에에?”
시범 조교?
처음 듣는 단어에 멧돼지는 찹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꽥? 그게 뭐냐?”
하지만 찹쌀도 잘 알지 못하는지, 고개를 모로 기울인 멧돼지와 같은 포즈를 취하며 한울에게 물었다.
“아아. 시범 조교가 뭐냐면······.”
나란히 고개를 기울이고 자신에게 답을 구하는 멧돼지와 찹쌀을 본 한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끌었다.
“...고 경비, 혼자 여기 지킬 수 있지?”
대답하다 말고 고 경비에게 뜬금없이 비닐하우스를 혼자 보라고 하자, 덩치가 큰 멧돼지가 식사를 끝낸 자리에서 홀로 외로이 뒹굴고 있던 작은 고구마 하나를 제 자리로 옮기던 고 경비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끼에에엑!!”
“오케이. 알았어.”
엉겁결에 뭐가 뭔진 몰라도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고 경비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한울이 다시 멧돼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꽈악? 고 경비 혼자 여기를 지키는 거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냐?”
“꾸엥꾸엥.”
제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하는 찹쌀의 모습에 멧돼지도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새로운 밭을 한번 가보려고. 멧돼지랑 같이. 어때? 괜찮지?”
“꽥! 새로운 밭! 비닐하우스가 아닌 곳! 어디냐! 내가 제일 먼저 가겠다 꽈악!”
새로운 밭이라는 말 한마디에 멧돼지의 옆에서 같은 편처럼 서 있던 찹쌀이 순식간에 한울에게로 퍼덕거리며 날아갔다.
“꾸에···?”
아직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는데···?
순식간에 뒤바뀐 찹쌀의 행동에 아직까지 상황판단이 되지 않은 멧돼지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때였다.
제 발치에서 파다닥 거리며 얼른 새로운 밭으로 가자는 찹쌀을 진정시키던 한울이 멧돼지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갈래? 그곳으로 가면 지금 네가 가진 궁금증들이 다 풀릴 것 같은데.”
궁금증이 다 풀린다니!
궁금함을 못 참아 고 경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의 무서움을 몸소 겪었던 멧돼지가 경쾌하게 울었다.
“꾸엥!”
당연히 간다!
**
잠시 후.
한울과 노을, 그리고 찹쌀의 뒤를 따라 비닐하우스가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온 멧돼지는 지금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숙련된 조교, 앞으로.”
“컁! 조교 앞으로!”
“...꾸잉?”
따라서 오면 궁금증이 풀릴 거라고 하지 않았었어?
잡초와 이름 모를 식물들로 우거진 곳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한울의 어깨에서 땅으로 뛰어내리고는 알지 못할 말을 그와 주고받는 노을의 모습에 멧돼지가 의문을 표했다.
“쉿. 지금 뭔가 하려고 한다. 꽉.”
멧돼지가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 할 동안 어디서 났는지 모를 빨간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노을을 보며 찹쌀이 멧돼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찹쌀의 날개에 찔린 부분을 옆에 있는 나무에 쓱쓱 비볐다.
하얗고 보드랍게 보이는 찹쌀의 날개는 막상 맞아보면 따가웠다.
빨간 모자를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눌러쓴 노을은 주변을 살피더니 밭 옆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멧돼지의 시야보다 조금 더 위에 올라간 노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조금 전, 비닐하우스 앞에서 한울과 연습했던 대사를 내뱉었다.
“컁! 본 노을은!”
“노을아, ‘조교’라고 해야지.”
아차차.
처음이라 대사가 꼬였다.
왼쪽 앞발을 들어 한울에게 괜찮다는 표시를 한 노을은,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외워둔 대사를 내뱉었다.
“맞다! 컁! 본 조교, 노을은!”
“그렇지!”
이번에는 깔끔하게 성공했다.
한울이 옆에서 손뼉을 짝짝 치는 걸 보니 그렇지 않아도 당당했던 가슴이 더욱 쭉 펴졌다.
신이 난 노을은 짐짓 표정을 굳히며 아까 한울이 보여준 영상의 빨간 모자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리고 감명 깊게 들었던 대사를 내뱉었다.
“오늘 너희들에게 매우 실망했다. 컁!”
살랑살랑.
감명 깊게 들었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내뱉은 데 성공한 노을의 풍성한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대사를 성공한 노을은 두 발로 선 뒤 두 앞발을 허리에 안착시켰다.
포즈까지 이제 영상의 빨간 모자가 같아졌겠지! 스스로 생각해도 멋질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우쭐해진 노을이 한울에게서 받은 빨간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봐라!
내가 위대한 조교 노을이다!
이제 자신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들만 있으면, 완벽했다!
“....꾸에······?”
“...꽥?”
하지만 노을이 원했던 자신을 우러러보는 듯한 반응 대신,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응?”
의문 어린 한울의 목소리까지 들은 노을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걸 멈추더니, 축 처졌다.
“호에···. 이게 아닌 거냐···.”
**
푸흡.
“크흠. 갑자기 목이 왜 이렇게 간질간질하지?”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갑작스러운 노을의 대사에 뻥진 것도 잠시. 카리스마 넘치게 대사를 내뱉고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은 노을의 꼬리가 살랑이는 걸 보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카리스마 있는 몸과 그렇지 못한 꼬리의 조합은 퍽 우스운 괴리를 만들어냈다.
“호에···. 뭐가 잘못된 거냐···. 내가 웃기냐···.”
살랑거리던 꼬리를 내린 노을은, 어느새 허리에 올렸던 앞발도 제자리로 내려 전체적으로 축 처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푸흡.
집을 나오기 전, 예전에 썼던 각 잡힌 빨간 모자를 가지고 나온 게 신의 한 수였다.
농사의 ‘농’자도 모를 멧돼지를 가르치기엔 노을이 딱 이라고 생각했고, 가르치는 노을에게 상징성 있는 무언가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역할에 몰입할 줄이야.
“커, 크흠. 커흠! 어우. 목이, 흡. 왜 이렇게 크흠. 간지럽냐.”
자신이 웃기냐며 땅굴을 파고 들어가려는 노을의 모습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웃음소리는 헛기침으로 커버를 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뇌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단독행동을 하는 광대를 막을 수 없었다.
“호에···. 괜찮은 거냐?”
착한 노을이.
계속되는 내 헛기침에 축 처졌던 귀를 세우고는 타박타박 다가왔다.
폭.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옆에 다가와 폭신한 발을 내 무릎에 얹는 노을의 모습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할 무렵.
멧돼지의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찹쌀이 뒤뚱거리며 뛰어왔다.
“꽈아악! 아프냐? 아프면 안 된다! 내가! 노래를···! 으읍!”
“아니야. 찹쌀아.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벌써 나았네. 와. 정말이지, 대단해.”
정말로, 찹쌀의 노래 위력은 대단했다.
찹쌀이 ‘노래’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내 무릎 위에 올라오려 낑낑대던 노을은 컁!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마동태 사건 때 찹쌀의 노래를 들은 기억이 있는 멧돼지도 노을의 뒤를 따라가다 수풀 속에 제 머리를 묻어버렸다.
나 역시 찹쌀이 노래한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찹쌀을 달랑 들여 노란 부리에 검지를 댔다.
“으읍?”
“어. 진짜. 싹 나았어. 봐봐. 다들 펄펄 날아다니네. 그치?”
부리를 잡은 것도 아닌데 알아서 입을 봉인한 찹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준 나는, 수풀 속에 머리를 박은 멧돼지와 나무 뒤에 숨어 귀를 막은 채 고개를 빼꼼 내민 노을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꽈악! 한울도 날아다니냐?”
“그럼.”
“그럼 됐다! 내려줘라. 꽉!”
“읏차.”
찹쌀에게서 노래를 부리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은 뒤 땅에 내리자, 그제야 노을과 멧돼지가 쭈뼛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 이제 다 모였으니까 본격적으로 설명을 해 볼까? 자, 노을 조교님. 다시 부탁드립니다.”
찹쌀의 노래를 피해 도망을 갔다 온 사이 흐트러진 빨간 모자를 고쳐 씌워주며 작게 화이팅을 외쳐주었다.
“컁! 알았다!”
화이팅에 힘이 난 노을은 다시 씩씩하게 바위 위로 올라갔다.
먼저 것보다 더 높은 바위였다.
높아진 시야 만큼 높아진 자신감으로 무장한 노을이 당당하게 외쳤다.
“본 조교는 오늘 멧돼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컁!”
그 영상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나.
훈련 영상에서 교관이 말했던 걸 그대로 말하는 노을을 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래도 전적이 있어, 아까처럼 충격적이진 않았다.
헛기침 한 번으로 슬금슬금 올라오려는 광대를 잠재운 나는 멧돼지 쪽을 향해 힐끔, 눈을 돌렸다.
멧돼지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숙련된 조교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무게감이 없다면, 조금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멧돼지의 반응은 내가 우려했던 것과 달랐다.
“꾸, 꾸에엥···!”
달달달.
멧돼지는 진동이 온 것 마냥, 몸 전체를 달달 떨고 있었다.
아니,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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