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48화 (48/163)

47. 내가 맞아요!

아니, 어째서?

빨간 모자를 쓰긴 했지만, 덩치는 멧돼지의 1/20 정도 될 것 같은 노을의 말에 달달 떠는 멧돼지의 모습이 의문이었다.

설마, 떨리는 척을 해 주는 걸까?

조금 전 노을이 실망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멧돼지의 상태가 심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멧돼지, 어디 아픈 거 아니지?”

혹시나 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찹쌀에게 멧돼지의 상태를 물었다.

그리고 의문은 쉽게 풀렸다.

“아니다. 멀쩡하다 꽈악!”

“그럼 왜 저렇게 떠는지 알 수 있을까?”

“멧돼지가 겁이 많다. 꽉.”

겁이 많은 멧돼지라.

멧돼지가 달려드는 모습이 마치 미친 전차 같았다고 말하던 장 이장님의 묘사와는 너무나 다른 평가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멧돼지를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쯤이면, 멧돼지를 무서워할 마을 사람들을 걱정해야 할 게 아니라, 사람들을 무서워할 멧돼지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조교 노을의 교육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멧돼지에게 딱 알맞았다.

“...작물을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건! 땅이다. 컁!”

“꾸엥!”

“땅을 잘 뒤집어엎어야 한다! 컁!”

“꾸에엥!!”

“컁! 그럼 내가 시범을 보여주겠다! 잘 따라 해라. 멧돼지!”

“꾸엥!”

자꾸 떨면 노래를 불러주겠다는 찹쌀의 말에 단번에 떨림을 멈춘 멧돼지는, 학구열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노을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찹쌀을 힐끔힐끔 보는 모양새가 노을에게서 느낀 무서움보다 찹쌀의 입에서 나올 노랫소리에 더 위기감을 느낀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 내가 그 마음 이해한다.

재빠른 멧돼지의 판단을 속으로 칭찬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톡톡.

무릎에서 폭신함이 느껴져 눈을 떴더니, 언제 바위에서 내려왔는지 노을이 빨간 모자를 한 손에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노을아, 왜? 뭐가 필요해?”

“컁! 이것 좀 맡아주라! 이제 시범을 보여줘야 한다!”

“오케이. 잘 다녀오시게. 노을 조교.”

“컁!”

나에게 빨간 모자를 맡기고, 기세 좋게 대답한 노을은 풀이 무성한 밭으로 총총 걸어갔다.

“이리 와라. 멧돼지!”

그러고는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멧돼지를 손짓한 번으로 불렀다.

“컁! 내가 시범을 보일 테니, 따라 하면 된다!”

“꾸엥!”

멧돼지의 답을 들은 노을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딱딱 해 보이는 땅으로 다이빙했다.

푹.

두두두두.

딱딱해 보이는 땅을 다이빙 한 번으로 유연하게 들어간 노을은, 그대로 앞으로 쭉 나가며 밭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오···.”

노을의 경이로운 속도에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매번 보는 거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놀랍기 그지없는 솜씨였다.

할머니에게 상속받은 토지는 산속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길이 잘 되어 있지 않아 농사를 지을 때 트랙터 같은 큰 농사 기계들을 가져오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만약, 이곳에서 나 혼자 농사를 지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감각에 나는 가정을 멈췄다.

“컁! 잘 봤냐?”

그 사이 밭에 세로로 긴 골 하나를 만든 노을이 땅에서 뿅! 나타났다.

“꾸엥!”

그 모습을 본 멧돼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멧돼지의 감탄사를 흡족하게 들은 노을은, 밭에서 나와 멧돼지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네 차례다! 컁!”

시범을 보여줬으니, 해 보라는 것.

과연 숙련된 시범 조교다웠다.

“한울! 셋을 세줘라! 컁!”

“오케이. 알았어. 멧돼지, 준비됐니?”

“꾸에엥!”

내 물음에 멧돼지가 콧김을 뿜어내며 대답했다.

쉭쉭.

매섭게 콧김을 뿜어내며 밭을 쳐다보는 모양새가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는 것과 비슷했다.

“셋 하면 시작하면 되는 거야.”

하나.

멧돼지가 콧김을 더욱 힘차게 내뿜으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둘.

발을 구르던 걸 멈추고 뒷발에 힘을 주었다.

셋.

숫자가 카운트됨과 동시에 멧돼지가 밭으로 튀어 나갔다.

“꾸에엥!!”

힘찬 울음소리로 밭을 향해 멧돼지가 노을이 했던 것과 같은 다이빙을 했다.

푹.

“꾸엥···?”

멧돼지는 그저 푹하고 들어간 제 송곳니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을처럼 쑥 들어가 땅을 들어올려야 하는데···. 뭔가 노을의 시범과는 다른 제 모습에 멧돼지가 땅에 살짝 박힌 자신의 송곳니를 꺼내고 뒷걸음질 쳤다.

“크흥!”

아까와 같은 출발선에 선 멧돼지는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두두두!

아까보다 힘찬 도약에 땅이 울렸다.

“꾸엥!”

이번에는 분명 성공할 것 같은 느낌에 멧돼지가 힘차게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힘찬 울음소리가 다른 울음소리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쿵!

속도 조절을 잘하지 못한 멧돼지는 계획했던 곳이 아닌 그 너머로 다이빙을 했고, 그 결과.

빠지직!

그곳에 박혀있던 돌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어이쿠···.”

보기만 해도 내 머리가 아픈 것 같은 충돌에 서둘러 달려가자, 머리를 박고 있던 멧돼지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꽈악 멧돼지! 괜찮냐?”

나보다 먼저 달려간 찹쌀이 걱정하며 노래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보다 멧돼지가 더 빨랐다.

“꾸엥! 꾸에엥!”

나는 괜찮다! 그러니 노래도 괜찮다!

씩씩하게 일어난 멧돼지는 다시 출발선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멧돼지는, 포기를 몰랐다.

**

“아이고. 허리야.”

트랙터에서 내려 땅을 고르던 장 이장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며 곡소리를 냈다.

툭툭.

뻐근함을 호소하는 허리를 쳐보았지만, 손짓 몇 번으로 뻐근함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했다.

“이번 주말에는 읍내 나가서 몸이나 좀 지지고 와야 하나.”

손으로 툭툭 치는 걸 멈추고,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한 장 이장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리 농기계가 발달이 되도, 사람 손 가는 건 어째 똑같은 거 같노.”

농사라는 게 그랬다.

트랙터로 밭을 갈아엎어도, 결국엔 사람 손이 필요했다.

“얼른 끝내고 우리 꽃분이한테 좀 밟아 달라고 해야겠다.”

푹푹.

잠깐의 스트레칭을 마친 장 이장은 다시 허리를 숙이고 곡괭이 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밭은 ‘얼른 끝내야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넓었다.

“아이고···.”

장 이장의 입에서 다시금 곡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건 장 이장의 의지가 아니라, 몸이 힘들어지자 절로 튀어나온 것에 가까웠다.

“쪼매만 더 쉬었다 할까···.”

원래 이쪽 밭의 밭갈이는 진즉에 끝났어야 했다. 최근에 연이어 일어난 일들로 인해 밭을 돌보는 걸 조금 소홀했더니, 이 지경이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이 위험해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쩔 수 없지.”

최근 가장 큰 이슈는 멧돼지였는데, 요즘 들어 이 마을 저 마을 할 것 없이 나타나는 통에 구청에서도 골머리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마을에는 멧돼지 가족은 안 나타났으니까···.”

피해를 많이 입고, 한 마리보다 더 큰 단위의 멧돼지가 나타난 곳을 먼저 처리하고 내일 이곳으로 멧돼지를 처리할 사람들을 보내준다는 답변에, 장 이장은 오늘도 마을 사람들에게 내일까지는 집 밖을 나갈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라고 문자를 돌린 참이었다.

하지만 장 이장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조심하라고 해 놓고는 정작 자신은 혼자 밭을 매고 있었다.

“내일까지는 뭔 일이 생기겠나. 없겠제.”

여태까지도 괜찮았는데,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한 장 이장이 힘차게 곡괭이질을 할 때였다.

-꾸엥.

“....뭔소리고?”

곡괭이질 소리를 뚫고 귓가에 꽂힌 낯선 듯, 익숙한 소리에 장 이장은 몸을 바로 세웠다.

모든 행동을 멈춘 뒤, 귀를 기울였다.

사아아.

하지만, 조용한 가운데 들리는 소리라곤 바람에 스치는 나무 소리밖에 없었다.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불안해하던 그때.

-야옹.

노랗고 까만 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이며 장 이장 옆을 지나갔다.

“아이고. 고양이였네. 난 또 뭐라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멧돼지에게서 경운기를 구출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장 이장은 작은 소리에도 예민했다.

가령, 거친 숨소리라던지.

“쉬익쉬익”

“그래! 바로 이것 같은 숨소리······. 으아악!”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숨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장 이장은 바로 옆에 나타난 커다란 물체에 소리를 질렀다.

빳빳한 털, 똥그랗고 작은 까만 눈, 그리고 툭 뛰어난 코까지.

“메, 메, 멧돼지다!!!”

습기로 번들거리는 멧돼지의 코를 보고 기겁을 한 장 이장은 손에 쉬고 있던 곡괭이를 휘둘렀다.

“쉭쉭! 저리 가라! 안가면 이걸로 찍어뿐다? 어? 내는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 얼른 저리 가뿌라! 쫌!”

사실 장 이장은 여태 한 번도 살아있는 동물에게 곡괭이 질을 한 적이 없다.

꽃분이가 닭을 손질할 때면, 방으로 들어가 몰래 눈물을 닦는 사람이 장 이장이었다.

“꾸엥?”

당연히 진심이 담기지 않은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보는 멧돼지에 장 이장은 다른 비책을 꺼내었다.

“자, 이거 육포다. 비싼 거. 우육포다. 이거 줄테니까 먹고 니 살던 데로 가라! 알았제?”

슉.

주머니를 뒤적거려 육포를 꺼낸 장 이장이 속사포로 설명을 한 뒤 육포를 저 멀리 던졌다.

“아이고. 내 육포. 우리 꽃분이가 만들어 준 건데···.”

일하다 출출할 때 먹으라며 꽃분이가 몇 날 며칠을 정성을 들여 만든 육포를 던진 장 이장은 밭에 털퍼덕 주저앉으며 아이고. 아이고를 시작했다.

당연히 멧돼지가 육포를 따라갔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꾸에에!”

“으악! 뭐꼬! 왜 안 가나!”

하지만 이놈의 멧돼지는 뭐가 문제인지 육포를 따라가기는커녕 밭에 엎어져 있는 장 이장에게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니, 니, 더 가까이 오면 이걸로 진짜 찍는다! 진짜다!”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가 띄어질 정도로 놀란 장 이장이 옆에 던져두었던 곡괭이를 다시 집어 들고 멧돼지를 위협했다.

그때였다.

여태까지 멧돼지에 집중하느라 들리지 않았던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이장님, 이장님!”

“어? 어? 뭐꼬? 니 한울이가? 니가 왜 거서 나오나? 위험하다! 일로 온나!”

정신을 차린 장 이장은 멧돼지 뒤에서 나오는 한울의 모습에 바로 앞에 멧돼지가 있다는 것도 잊고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한울을 제 뒤로 숨겼다.

“니는 멧돼지가 보이면 도망가야제. 왜 거기 그렇고 있노! 다친 데는 없나?”

놀람을 숨기지 않은 장 이장이 한울의 팔을 잡고 이쪽저쪽을 살폈다.

잠자코 장 이장의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듣던 한울은, 이장님의 잔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멧돼지를 가리켰다.

“그···. 이 멧돼지가 말이죠.”

“...?”

“밭을, 아주 잘 갈더라고요?”

“어잉? 그게 무슨 소리고?”

왠지 시선을 저 멀리 두고 얼버무리는 한울의 모습에 장 이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멧돼지를 보고 놀라서 헛소리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장 이장의 걱정은 기우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한번 해 보시죠.”

한울은 해 보라는 말과 함께, 장 이장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꼬···?”

엉겁결에 한울이 건넨 물건을 받아든 장 이장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울이 건네준 물건은 바로 줄이 달린 쟁기.

쟁기에 달린 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멧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장 이장과 눈이 마주친 멧돼지는 우렁차게 울었다.

“꾸엥!”

그 쟁기의 주인이 내가 맞아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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