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찾았다! (3) >
“꾸엥?”
멧돼지는 갑자기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밭을 갈다 말고 멈춰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자신에게 잘 부탁한다며 옥수수죽을 주었던 인간이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또 맛있는 음식을 줄까 싶어 몸을 틀어 여자 인간에게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뭔가 불안한 기운이 느껴진다 꽈악.]
멧돼지의 머리 위에 둥지를 틀고 앉아 진두지휘하고 있던 찹쌀이 날카로운 눈빛을 하며 말했다.
[컁! 저 여자 인간은 좋은 인간이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멧돼지의 등위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던 노을은 찹쌀과 다른 의견을 냈다.
“꾸엥······.”
다른 의견을 내는 두 정령에 멧돼지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찹쌀과 노을의 조언에 대한 승률은?
귀엽게 울기.
귀엽게 눈을 깜빡이기.
노을의 말대로 했다가 남자 인간을 기겁하게 만들었던 목록이었다.
“꾸엥!”
찹쌀의 승!
아주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을 마친 멧돼지가 우렁차게 울었다.
[아니다. 멧돼지야.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라. 한국인은 삼세번이다.! 컁!]
“꾸에에?”
노을의 설득에 멧돼지의 귀가 팔락거렸다.
[멧돼지, 설마 노을의 말을 믿는 거냐 꽈악?]
멧돼지의 머리 위에 있던 찹쌀이 고개를 쭉 빼 들고 멧돼지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한국인은 삼세번!’이라는 말에 설득당한 멧돼지의 귀에는 찹쌀의 조언이 들리지 않았다.
“꾸엥!”
한국인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사는 멧돼지를 대표해 우렁차게 울었다.
나는 한국 멧돼지다!
그러니 세 번까지는 믿는다 꾸엥!
[꽤액···.]
이미 노을의 말에 설득당한 멧돼지의 모습에 찹쌀은 노란 부리로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꾸에엥!”
찹쌀의 허락까지 떨어졌겠다, 멧돼지는 발걸음도 가볍게 강 할머니의 곁으로 걸어갔다.
“아이고. 말 잘 듣는다. 어찌 이렇게 똑똑하나. 안 그러나?”
다가오는 멧돼지를 보며 밭두렁에 서 있던 강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똑똑하긴···.”
장 이장은 강 할머니의 질문에 맞장구쳐 주려고 했으나, 이어지는 할머니의 말에 뒷말을 줄였다.
“그래. 이리 똑똑하고 순한데 바깥사람들은 잘 모를 거 아니가?”
한번 맞장구를 쳤다 실패한 장 이장님은 강 할머니의 두 번째 질문에 그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툭툭.
그러고는 나는 실패했으니, 너라도 대답해 보라며 옆에 있던 빨간장화 어르신의 옆구리를 찔렀다.
“으핫! 말로 해라 말로! 아, 그렇지. 도시 사람들은 잘 모르지. 멧돼지가 순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가 옆구리를 찔린 빨간 장화 어르신은, 간지러운 옆구리를 붙잡고 웃음을 터트리다 매서운 강 할머니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다시 얌전히 논두렁에 앉아 대답했다.
빨강 장화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 할머니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순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제. 아무리 외모가 다가 아니라지만, 첫인상은 어쩔 수 없이! 뭐다? 외모를 젤로 먼저 보게 돼 있다! 안 그러나?”
강 할머니가 연설을 시작했다.
“...하모! 맞다!”
“그, 그게 맞지. 맞다.”
카리스마 넘치는 강 할머니의 물음에 가까이 있던 어르신들이 자동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 앞에서 오들오들 떠는 토끼들 같아 작게 ‘화이팅’을 외칠 때였다.
“...그런 의미로, 한울아!”
멧돼지와 마을 어르신들 앞에서 연설하던 강 할머니가 부리부리한 눈을 내게로 돌렸다.
“네! 할머니!”
카리스마 넘치는 할머니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부동자세를 하며 대답했다.
“그런 의미에서, 멧돼지 잡아라!”
“예?”
“꾸엥?”
잘 못 들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강 할머니의 요청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할머니가 다시 외쳤다.
“실시!”
**
강 할머니의 앞마당 안.
온몸에 거품 칠을 가득한 멧돼지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꾸에에엥! 꾸에에!!”
멧돼지 살려!
내 소중한 진흙이 사라지고 있어!
[꽈악···. 바보 멧돼지.]
시간이 날 때마다 한울이 지정해준 곳에서 뒹굴며 소중히 털에 묻힌 진흙이 떨어진다며 호들갑을 떠는 멧돼지의 모습에 찹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꾸에엑!”
노을! 밉다!
찹쌀의 말에 멧돼지가 한울의 어깨에서 꼬리를 살랑이고 있는 노을을 향해 말했다.
[컁! 미안하다! 있어봐라! 내가 해결해 주겠다!]
노을이 살랑거리던 꼬리를 앞발로 거머쥐고 말했다. 한참을 폭신한 꼬리를 만지며 해결책을 고심하던 노을이 팟하고 한울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내 어깨에서 내려가지 않는 노을의 모습을 쫓았다.
도대체 뭘 하려고?
어깨에서 뛰어내리더니 총총 뛰어 멧돼지가 목욕을 당하는 곳에서 한참 먼 대문가에 도착한 노을이 소리쳤다.
[컁! 찹쌀아! 멧돼지를 위해 노래를 불러줘라!]
[꽈악···?!]
“헐.”
노을의 말에 찹쌀은 반색했고, 나는 멧돼지를 잡다 말고 굳어버렸다.
멧돼지 또한 노을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한참을 굳어있더니, 곧이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꾸에···? 꾸에에엥!”
“아이고. 갑자기 와이라노. 괘안타. 이것만 헹구면 다 끝난다. 아이 예쁘다. 거 좀 잘 잡아 보소.”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발버둥 치는 멧돼지를 힘겹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총 4명이었다.
장 이장님과 심 할아버지, 빨간 장화를 신으신 어르신, 그리고 나.
심 할아버지는 괜히 집을 나서다 멧돼지를 데리고 집으로 가던 강 할머니에게 딱 잡혀 멧돼지 목욕에 동원되었다.
이를 악문 심 할아버지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날개를 활짝 펴고 깃을 고르며 노래 부를 준비하던 찹쌀이 고개를 들어 강 할머니의 머리 위로 날아가 앉았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찹쌀의 무대선정은 매번 탁월했다. 모두가 멧돼지를 붙드느라 옷이 젖었을 때 홀로 고고하게 깔끔함을 유지하는 강 할머니의 머리 위로 올라간 걸 보면 분명했다.
[꽈악! 그럼 노래를 시작하겠다! 멧돼지! 힘내라!]
“꾸에엥!”
멧돼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고, 응원의 노래 따위 필요 없다고 전했지만, 이미 자신의 세계에 빠져버린 찹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꽤개객! 꽈과곽!꽥꽥!]
찹쌀의 헤드뱅잉이 시작되었다.
“어···. 할머니, 제가 잠깐 잊어버린 게 있어서요. 준혁이랑 토스하겠습니다.”
“잊어버린 게 있어? 퍼뜩 갔다 온나. 준혁이 니 밭에 있댔제?”
“네. 어르신들 화이팅! 조금만 버텨주세요! 제가 준혁이 얼른 데리고 오겠습니다!”
“어어! 퍼뜩 갔다 온나! 우리는 괘안타! 갑자기 힘이 막 생기네!”
나는 귀에 내리꽂히는 찹쌀의 노래에 항복했다. 그리고 이미 강 할머니 집 대문을 넘어 집으로 향하는 노을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박준혁을 팔았다.
미안하다. 준혁아.
하지만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준혁에게는 찹쌀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니, 지금 갑자기 힘이 나는 것 같다는 어르신들처럼 체력을 회복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강 할머니의 집에서 벗어나는 나를 향해 멧돼지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울렸다.
“꾸에에엥!”
**
치이익.
보글보글.
박준혁을 대타로 강 할머니의 집으로 보낸 나는, 할머니의 손에 붙들려 고생하고 있는 멧돼지와 찹쌀이 덕분에 힘은 나겠지만, 그래도 나 대신 멧돼지를 잡게 된 박준혁을 위해 요리했다.
구황작물을 좋아하는 멧돼지를 위한 단호박, 감자, 고구마, 그리고 알밤이 들어간 꿀 범벅.
그리고 정직원이 되고 나서부터 더욱 열심히 신비농장을 위해 일하는 박준혁을 위한 스테이크까지.
츄릅.
한창 요리를 하고 있으려니, 내 어깨의 앉아있던 노을이 입맛을 다셨다.
“노을아, 간 좀 봐줄래?”
“컁!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시아 꿀에 재어 놓던 꿀범벅 재료 중 하나를 집어 들며 묻자, 노을이 내 어깨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주지 않았다간 꿀범벅 접시를 덮칠 기세였다.
“자, 여기.”
노을에게 아카시아 꿀에 굴려져 윤기 흐르는 알밤을 건네주었다.
물 한 접시와 함께 오븐에서 구워져 나온 알밤은 촉촉함과 동시에 달콤함을 품고 있었다.
챱챱.
노을은 달콤함을 풍기는 알밤을 한치의 망설 힘도 없이 받아먹었다.
“호에······.”
커다란 알밤을 입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던 노을은 몇 번 씹다 말고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맛이 없어?”
혹시나 입에 맞지 않는다면, 뱉으라고 손바닥을 펴 입 앞에 대자, 노을이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니다! 너무 맛있다! 근데 없어져서 슬프다 컁!”
아하. 난 또 뭐라고.
오케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맛있다는 거지.
노을의 말을 해석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다양해지는 노을의 표현력은 가끔씩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듣고 나면 흥이 났다.
이 맛에 요리하지.
왠지 손주에게 음식을 한가득 만들어주는 할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도 항상 나를 위해 즐겁게 요리해 주시곤 했다.
‘한울이 니가 잘 먹고 있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니도 나중에 크면 알게 될끼다.’
“자, 없어졌으면 하나 더 먹어야지.”
오늘도 내 요리를 먹고 극찬을 해준 노을에게 꿀범벅이 된 고구마를 집어 입에 쏙 넣어주었다.
“호에에- 이건 또 다른 맛이다!”
나는 고구마 하나에 행복하다며 발을 동동 굴리는 노을의 호들갑을 배경음 삼아 박준혁을 위한 요리를 마무리 지었다. 강 할머니와 같이 먹을 테니, 양은 넉넉하게.
치이익.
맛있는 소리를 내며 잘 굽힌 스테이크를 접시에 옮겨 레스팅을 하려고 할 때였다.
-딩동.
대문 인터폰이 울렸다.
“컁? 내가 누군지 보고 오겠다!”
인터폰 소리에 귀를 쫑긋거린 노을이 내 어깨에서 내려갔다.
“확인해보고 준혁이면 문 열어줘 노을아.”
“알았다! 컁!”
스테이크가 다 되면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멧돼지의 목욕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모양.
하기사. 찹쌀의 노래가 시작되고, 내가 빠져나올 때 즈음 멧돼지 거품 내기가 거의 마무리되는 단계였으니, 박준혁이 갔을 때는 아마 거품을 씻어 내기 시작했을 터였다.
이제 곧 들어올 박준혁에게 레스팅이 될 때 동안 조금만 기다리라, 말을 하려 준비할 때였다.
“호에에에?!”
인터폰을 보러 간 노을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거실을 통과해 내가 있는 부엌까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노을아?”
탁.
무언갈 보고 크게 놀란 게 분명한 노을의 심상치 않은 음성에 나는 서둘러 가스 불을 끄고 거실로 달려갔다.
“호에에···.”
거실로 가자, 노을은 두 발로 서서 인터폰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까치발을 얼마나 썼는지, 조금만 더 하면 인터폰 스크린 화면에 빨려 들어갈지도.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인터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노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인터폰에 비친 인물 한 명과 동물 한 마리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헐.”
너네···.
어쩌다 그렇게 된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