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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55화 (55/163)

< 이상한 마을 (3) >

방송국 사전조사팀이 방문 한 이틀 뒤.

임승훈에게서 촬영 확정 문자를 받고 강 할머니와 장 이장님께 이 소식을 알리자,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곧바로 강 할머니 집으로 달려와 핑크색 옷을 벗어 던졌다.

“이제 우리 이 옷들은 안 입어도 되는거제?”

“으이고. 이제는 진달래만 봐도 언선스럽다!”

“진달래? 진달래가 폈나? 아이고 그럼 우리 술 담가 먹어야제!”

“술? 술보다는 화전이지!”

분홍색이라면 이제 징글징글하다며 일제히 평상 위로 핑크색 옷을 집어 던졌다.

“쓰읍-.”

아니, 강 할머니의 들숨 한 번에 모두가 던지던 걸 멈추고 주섬주섬 핑크색 옷을 가지런히 접기 시작했다.

“폭군이 따로 없구먼···.”

“내 말이 그 말이여···.”

“뭐라꼬?”

물론 강 할머니의 폭군 정치에 반발하는 어르신들도 있었지만, 단번에 제압되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스읍’에 어깨를 쪼그라트린 어르신들은 괜히 헛기침하며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우리 억수로 잘하지 않았나?”

“뭐를?”

“뭐기는! 내 상모 돌리기제! 내가 상모 놓은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머리에 쓰자마자, 이게 몸이 기억하더라 아이가.”

“니도 그랬나? 나도 그렇더라. 장구 손에 놓은 지가 몇 년이 됐는데도 채를 잡자마자 저절로 되더라. 근데 니는 머리 안 아팠나? 내는 아직까지도 손꾸락이 아파 죽겠다.”

장구를 치던 어르신이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자, 빨간 장화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돌렸다.

“뭐라카노. 내는 멀쩡하다!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 좀 하라니까. 으이구. 내 봐라! 어어어-!”

5바퀴나 돌렸을까. 상모도 쓰지 않고 맨머리를 돌리던 빨간 장화 어르신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마당에 철퍼덕 쓰러졌다.

그런 빨간장화 어르신을 보며 장 이장님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는 강 할머니의 카리스마에 눌려 모두 하다 만 말을 다시 꺼냈다.

“저저. 나이 생각 못 하고 저러다가 다치지. 지도 운동 안 하면서. 뭐라카노. 그나저나, 이 핑크색 옷들은 안 입어도 되는 거 아니가? 촬영 확정 될 때까지만 입으라메.”

“촬영 확정이 됐다고 하더라도, 혹시 모르니까 다들 가지고 있어봐라.”

하지만 장 이장님의 말에도 강 할머니는 끄떡하지 않았다. 그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가지고 있으라는 말을 할 뿐.

절대 핑크색 단체복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듯한 강 할머니의 모습에 장 이장님도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이러다가 우리 이거 죽을 때까지 입는 건 아니제?”

“어···. 죽기 전에는 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시끌벅적한 어르신들의 대화에 옆에서 멍하게 듣고 있던 박준혁이 ‘죽음’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어르신들의 농담에는 자주 ‘죽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된다.

간혹 박준혁처럼 어르신들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젊은이들도 있지만, 그건 어르신들께 노릴 건수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어이쿠! 그리고 보니 우리 마을에서 제일 젊은 아가 여있네. ”

파칭.

어리버리한 박준혁의 말에 장 이장님의 눈이 먹잇감을 발견한 매처럼 빛났다.

슬금슬금.

강 할머니의 카리스마에 쫄아 옆에서 쭈그리고 있던 어르신들이 박준혁의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암! 우리 마을에서 제일로 나이가 어리지!”

“어리면 뭐다? 패션 감각이 우리 중에서 제일 뛰어나다!”

“맞다. 강 할매보다 더 뛰어나제!”

“그럼 우리 다 같이 우리 마을에서 제일 젊은 아한테 이 핑크색 옷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함 물어보까?”

어느새 박준혁의 주변을 둥그렇게 두른 어르신들의 목소리가 서라운드 스피커처럼 웅웅 울렸다.

“네에···?”

3D 사운드를 직격으로 맞은 박준혁이 맹한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살려주세요. 사장님.’

박준혁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나는 간절한 눈빛에서 그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저 한마디 했다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박준혁을 도와주려고 입을 떼려 할 때였다.

“와 김한울! 여기 있었어. 한참을 찾으러 다녔잖아. 어? 이장님도 여기 계셨네. 여기 강 할머니 댁 아니에요? 엥? 쟨 또 왜 저러고 있대···?”

활짝 열린 강 할머니 댁의 대문이 활짝 열리며 강지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샤랄라한 스커트와 크롭 형태의 티셔츠를 착용한 채.

파칭.

우리 산골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화사한 스타일에 어르신들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나기 시작했다.

**

바글바글.

어르신들의 레이더망에 걸린 강지민은 강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평상에 앉혀졌다.

“야야. 이 봐봐라. 이게 더 낫지 않나?”

마을 어르신들이 의견을 낼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강 할머니를 선두로, 모두가 강지민에게 핸드폰을 들이밀며 의상 코디를 요청했다.

“음···. 제가 생각하기에 이게 나을 것 같아요. 너무 어두우면 얼굴도 같이 어두워져서···. 밝은색이 좋을 그것 같아요.”

급조된 코디 상담에도 강지민은 진지하게 의견을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이걸 추천합니다!”

“야, 너 죽을래? 체크 남방 좀 갖다버려!”

중간중간 대학원생을 갓 탈출한 박준혁의 체크 사랑이 끼어들긴 했지만, 강지민에 의해 바로 제압되었다. 하지만 불굴의 사나이, 박준혁은 강지민에게 혹평을 받았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형님, 저분은 정말이지 보는 눈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 좀 보십쇼. 근사하지 않습니까?”

“...”

강지민에게서 쫓겨나 내게로 온 박준혁은 씩씩거리며 나에게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빨간색 체크.

파란색 체크.

검은색 체크.

온통 체크뿐인 화면에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박준혁을 보았다. 녹색 체크를 입고 있었다.

“체크가 제일 스탠다드한 패션 아닙니까! 셔츠니 캐주얼한 곳이든, 포멀한 곳이든 어디나 갈 수 있고! 또, 뭐가 묻어도 한번 쓱 닦아 내기만 하면 아무리 진한 얼룩이더라도 체크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침을 튀겨가며 체크 남방에 대해 찬양을 하는 박준혁은 가히 체크 전도사라고 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한울아! 얘 말 듣지 마! 마을 사람들 전부 체크 입힐 바에 앤 강 할머니가 맞추신 핑크색 단체 티가 훨씬 나아!”

“아니 우리 신성한 체크 남방을 폄하 하시다니···! 전 세계 대학원생들이 이 모욕을 잊지 않을 겁니다!”

“전 세계 대학원생들이고 뭐고, 이렇게 입으면 넌 영영 여자친구 못 사귄다. 내가 장담해.”

“아,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그래서 너 지금 여자친구 있어? 없어?”

“....형님···!”

강지민의 무자비한 팩트폭행에 체크 남방 전도사가 무너졌다.

“내가 생각해도 체크 남방은 좀···.”

“아니, 형님···!”

웬만하면 박준혁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체크 남방은 편을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그것보다 차라리 청청패션이 낫지 않나?”

체크 남방을 입을 바엔 남자다운 청청 패션이 낫지 않을까? 오염에도 강하고, 옛날 광부들이 작업복으로 입었던 만큼 튼튼하기는 옷들 중 최고였다. 청바지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브랜드도 많은 만큼, 스타일도 각자의 체형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나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강지민에게 청청 패션을 추천했다.

“뭐라고···?”

하지만 강지민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둘 다 그냥 가. 내가, 나중에 결정되면 부를 테니까, 이상한 거 보여주지 말고, 가렴. 오케이?”

**

체크 남방과 청청패션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강 할머니 집에서 쫓겨난 박준혁과 나는, 촬영 확정 축하파티가 준비될 때까지 내일 발송할 농작물들을 포장하기 위해 밭으로 돌아왔다.

“형님, 제가 생각할 때는 말이죠, 형님 친구분이 너무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아니야. 쟤 대학생 때 패션업계에서 일도 했었어.”

“아······. 그런데 어르신들은 왜 저렇게 TV 출연하는데 열을 올리세요?”

“아···. 그게 말이야.”

강 할머니의 무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마을 어르신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는, 딱 하나.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이다.

TV 외에도 너튜브, 쇼트클립, SNS등 여러 다른 매체로 세상을 즐기는 젊은 사람들과는 달리, 아직까지 어르신들의 세상을 넓혀주는 매개체는 TV가 전부다.

아무리 너튜브를 보고, 손주와 게임을 같이 한다고 해도 어르신들에게 제일 친숙한 건 TV. 작디작은 산골 마을에서 평생을 사는 어르신들에겐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이들이었다.

“아···.”

간단한 내 설명에 박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깨달은 듯한 박준혁의 표정에, 나는 이곳에 와서 느꼈던 점을 하나 더 말했다.

“기술이 발달해서 좋기도 하지만, 가끔씩은 슬프기도 해.”

“...?”

“어르신들이 노력하시는 것보다 더 빨리 발달을 해버리니까. 적응할 시간도 없이 멀어져 버려서 속상해하시는 분들도 많아.”

미화리 산골 마을에 계신 어르신들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다 키우신 분들이었다.

농사가 인생의 전부였고, 자신에게 투자하고, 치장하는 것보다는 자식들이 더 중했던.

비록 당신은 맨밥에 국을 훌훌 말아 급하게 먹고 일을 하러 갈지라도, 자식들을 위해 차린 밥상에는 잘 구운 고기를 올리고 나갔던.

그렇기에,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내 도시로 보냈지만, 아직도 당신은 이곳에 남은.

“시골과 도시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 여긴 내가 어릴 적 뛰어놀던 모습에서 달라진 게 없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10년은커녕, 1년만 지나도 휙휙 변하는 도시와는 달리, 내 고향은 홀로 시계태엽을 감지 않은 듯 그대로였다.

“내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어르신들이랑 같이 시(市)로 나간 적이 있거든?”

도시 생활을 때려치우고, 이곳으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나는 여러 가지로 도와주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까운 도시로 간 적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제가 오늘은 근사한 거 사드릴 테니까 가고 싶은 곳 말씀해 주세요.’

‘가고 싶은 곳?’

‘네. 오마카세도 좋고, 대게도 좋고, 해산물이 싫으시다면 한우집도 좋고요.’

집도 있겠다, 차도 있겠다.

거기다 사장에게서 받아낸 퇴직금도 넉넉했겠다. 나를 친손주처럼 챙겨주는 어르신들에게 근사한 식사 한 끼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호텔 코스요리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지만, 가까운 도시에도 그 정도 급의 호텔은 없어 선택권을 어르신들에게 맡겼다. 어떤 비싼 요리를 말씀하시더라도 사드릴 생각이던 그때.

‘그라믄, 그 뭐라카노. 아들 햄버거 먹는데. 거기 한번 가보자.’

‘그래. 그리고 뭐드라? 버블티? 그거도 함 무러 가보자.’

어르신들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걸 요청하셨다. 미화리 읍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체인음식점과 카페로 가자고 한 것.

‘뉴스 보니까 노인네들이 자동 주문 못 한다 카드만. 그거 연습하러 가야제.’

‘맞다. 우리 손주랑 같이 갔을 때 내가 못해가···. 좀 그랬다.’

‘나는 손주가 버블티가 뭐시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알 수가 있어야지. 맛을 몰라서 얼버무렸는데···. 이참에 먹으러 가보자!’

그 이유가 손주들과 얘기를 잘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근데 TV는 아직까지 전 연령대가 다 보잖아. 어르신들도, 어르신들의 손주들도.”

“그렇죠···.”

“그래서야. 어르신들이 TV 출연에 적극적인 이유. 자랑할 거리가 생기잖아.”

어르신들이 TV 출연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옆마을 친구에게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점점 말을 줄이는 손주와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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