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건 말이지... (1) >
“저기···.”
며칠 전부터 신비농장의 아르바이트생이 된 지석호는, 포장업무를 끝내고 박준혁에게 보고하기 위해 밭을 나섰다가, 집 앞에서 하늘을 보며 여운에 잠겨 있는 한울과 박준혁을 발견하고는 뒷걸음을 쳤다.
‘역시 이상해···.’
은은한 안광을 자랑하는 박준혁과의 면접 후, 지석호는 바로 이곳에서 탈출하려고 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멧돼지가 리본을 두르고 다니는 이곳이 정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전만 안 필요했어도’
빠른 면접 후 도망가려던 자신을 붙잡은 건 바로 누나의 문자 때문이었다.
‘엄마 생신 때 갈 레스토랑 여기로 예약해 놨어. 우리 막내 옷 잘 입고 와.’
금실 좋은 집안에서 늦둥이로 태어나 산 지 어언 23년. 군대까지 갔다 온 대한의 사나이였지만, 최소 10살 이상 차이나는 누나가 두 명이나 있는 집안에서 막내 남동생의 위치란 그저 응애하고 우는 아기에 불과했다.
‘...나도 이번엔 내 돈으로 선물할 거야!’
‘우리 막내가? 괜찮아. 애기가 돈이 어디 있어. 누나들이 다 준비했으니까 우리 막내는 맛있는 거 먹을 생각만 하고 오렴.’
‘....’
그래서였다.
은은한 광기가 흐르는 박준혁과 리본 두른 멧돼지를 무시하고 이곳에서 일하기로 한 이유가.
“어? 일 다 끝났습니까?”
작게 말한 소리를 들었는지, 신비농장의 사장인 한울과 같이 서 있던 박준혁이 고개를 돌려 아는 체를 했다. 다행히 박준혁은 첫인상과는 달리 평범했다. 자신이 어린 게 분명한데도 존댓말을 꼬박꼬박해주고.
그래.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지.
한 번씩 멧돼지에게 버섯 같은 걸 들이대는 이상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오늘은 웬일로 핑크색 옷이 아닌 체크 남방을 입은 박준혁을 보며 지석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맡기셨던 포장 다 끝내서, 다른 할 일 물어보려고 나왔는데···. 말씀 중이시면 계속 말씀 나누세요···?”
대답하던 지석호는 고개를 완전히 돌린 박준혁의 얼굴을 보고 말끝을 올리고 말았다.
“...아니, 괜찮으세요?”
박준혁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덮여있었다.
“커흡. 제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해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체크 남방의 소매를 당겨 닦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꽃이라곤 보이지도 않는 이곳에서 꽃가루 알레르기라니. 말도 안 되는 박준혁의 변명에 지석호는 반절 정도 내렸던 경계심을 다시금 올렸다. 역시나 이상하다.
“어···. 저는···. 그럼···.”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는 박준혁의 모습에 지석호가 뒷걸음질 치자, 옆에서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던 사장이 입을 열었다.
“진짜 꽃가루 알레르기 맞으니까, 석호 씨는 이제 퇴근해요.”
“네? 아직 근무시간 안 끝났는데요?”
근무를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째. 누나들의 눈을 크게 만들 만큼 근사한 선물을 사려면 근무시간을 꽉꽉 채워 일을 해야 했다. 아니, 초과근무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일찍 퇴근이라니. 지석호는 절대 아니 될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장님! 일 더 시켜주십시오!
“약속한 월급은 그대로 줄 예정이니까, 걱정 말고.”
23살, 대한의 건아. 지석호는 감동했다.
뭐 이런 사장이 다 있나!
이분은 천사이신가?
매번 어떻게든 아르바이트생들의 등골을 파먹으려던 사장들의 밑에서만 일하다 전혀 반대되는 곳에 오니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서 일하려고 그동안 그렇게 힘든 일을 했던 것인가! 너무 좋아!’
비록 일주일에 한 번, 멧돼지를 씻기는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이마저도 박준혁이 옆에서 도와주는 데다 멧돼지도 그가 말한 것보다 훨씬 순해서 씻기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멧돼지가 약간 포기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하여튼.
농장일이기도 하거니와, 시간 대비 많은 급여에 몸이 고된 줄 알았건만. 몸이 고되긴커녕 자신이 하는 일은 그저 포장이 이미 다 되어있는 작물들을 택배 상자에 넣고 테이핑만 하면 끝이었다.
이런 유니콘 같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온라인에서 보기만 했지, 직접 경험한 건 처음이었다. 지석호는 매일 어디를 다니는지 얼굴 보기 힘든 사장을 향해 외쳤다.
“사장님! 제가 방울토마토 구입하겠습니다! 한 팩만 주십시오!”
포장 담당이기에, 이곳에서 팔리는 작물의 양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장담할 수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만 해도 밭뙈기로 파시던데···. 이렇게 조금씩만 팔다간 조만간 망하지. 보아하니 홧김에 귀촌해서 농사짓는 거 같은데···. 나라도 도와줘야지.‘
배추밭을 크게 하시는 지석호의 할아버지는 항상 1년 동안 농사를 지으시고, 한꺼번에 작물은 계약된 업체에 넘기시곤 했다.
하지만 신비농장에서는 소량씩만 판매되었다. 판매율이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이러다 곧 망할 게 눈에 그려졌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아르바이트생에게 이렇게 대우를 잘 해주는 곳은 잘되었으면 했다.
“방울토마토?”
“네. 저희 집 대장님께서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제가 사진을 좀 잘 찍어서···. SNS에 올리겠습니다!”
아, 말 잘한다. 나 자신.
재고를 없애 주는 것뿐만 아니라 홍보까지 해준다고 했으니, 사장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지석호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만족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착한 아르바이트생의 도움으로 살아난 시골 청년 농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지석호는 아직 철이 덜 든 곰처럼 자랑스러움을 어깨에 장착하며 가슴을 쭉 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옆에서 ’할머니···. 제가 모시고 갈게요···. 크흐흡‘하며 훌쩍이던 박준혁이 코를 팽 풀며 말했다.
“...크흡. 없어.”
“예?”
“없다고. 방울토마토. 크흡.”
계속해서 코를 들이키느라 말이 끊기긴 했지만, 뜻은 정확히 전달되었다.
“없다고요? 왜요?”
지석호는 이해할 수 없는 박준혁의 말에 반문했다. 하루에 10팩씩밖에 안 나가는데 방울토마토가 없다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석호를 보며 이번에는 박준혁이 어깨를 으쓱거리기 시작했다.
“어허. 이 우리 아르바이트생님이 검색을 안 해보셨구먼?”
“검색이요?”
“신비농장. 검색해본다. 실시!”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아르바이트생 지석호는 ’실시’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신비농장을 검색하였다. 회사도 아닌데 누가 검색을 했겠느냐며 속으로 생각하면서.
“실시···! 어?”
하지만 검색 후 박준혁의 안내대로 신비농장 스토어에 들어간 지석호는 어느 하나 빠짐없이, 모든 판매 글에 몇백 개씩이나 되는 후기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자, 이제 왜 방울토마토가 없는지 알겠지?”
“헐···. 왜···. 빅파워···. 어째서···.”
기본적으로 작물들이 가격이 조금 나가긴 했지만, 그건 단가가 높은 작물들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농장에서 빅파워라니. 혼자서 말도 안 돼···. 라고 중얼거리던 지석호는 후기의 몇 배는 더 많은 상품 문의란에 입을 떡 벌렸다.
“아이고. 아르바이트생님 놀라셨네. 그러나 파리 들어가겠다. 으하하!”
배를 잡고 웃든 말든,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를 주워 삼킨 지석호는 벌렸던 입을 닫으며 사장님을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아이고, 사장님. 더 시키실 일 없습니까? 사장님이 아직 퇴근을 안 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퇴근을 합니까. 어떻게, 밭이라도 갈까요?”
충성충성!
신비농장의 스토어를 본 지석호는 대장님의 선물만 사고 그만두려던 생각을 재빨리 바꾸었다. 이상한 사람이 있든지 말든지. 이렇게 잘 나가는 곳을 왜 그만둬?
회사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철썩 붙어있을 다짐을 하며 지석호가 헤헤 웃었다.
**
“헐. 진짜?”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검은색 밴 안에서 놀람이 가득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라 너 요즘 이 매니저 말을 못 믿는 거 같다?”
“에이. 못 믿긴 뭘 못 믿어. 그냥···. 소식이 없었으니까 궁금해서 좀 물어본 거지.”
“허이구? 좀?”
앞 좌석에 있던 매니저는 자신이 담당하는 연예인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좀’이라니. 그놈의 농산물 박람회를 갔다 오자마자 미화리를 배경으로 한 농촌 예능을 부르짖더니, 하루를 걸러 예능 피디님들에게서 연락이 온 게 없냐고 물었다. 하도 재촉하는 탓에 어제까지만 해도 전화번호부에 있는 예능과 관련된 사람에게 모두 전화를 걸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 좀이라니.
“에이. 매니저 오빠도 내가 막 예능도 나가고 그래서 인지도 쌓는 게 좋잖아? 안 그래?”
“인지도? 아라 네가?”
인지도는 아직 뜨지 못한 신인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지. 아라처럼 데뷔하자마자 탑 자리까지 올라간 톱스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단어였다.
“콘서트하고, 행사만 뛰면 뭐해. 제일 중요한 건 TV에 얼굴을 비추는 거라고?”
아라는 어이없어하는 매니저를 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런 아라의 모습에 매니저가 다크써클이 짙어진 제 눈가를 가리켰다.
“언제는 예능 하기 싫다고 난리 치더니. 신비주의가 대세라며? 신비주의로 나갈 거라며?”
“에이. 오빠. 그게 언제 얘기야. 요즘 대세는 ’친화적인 톱스타‘야. 알면서.”
“언제 적이라니. 너 그 말 일주일 전에도 했었어. 안 그래?”
일주일 만에 말을 바꾸는 아라에 매니저가 오랑우탄처럼 제 가슴을 퍽퍽 치며 아라의 옆에 앉아있는 스타일리스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음···. 여자의 마음은 갈대? 라고 하잖아요?”
“얼어 죽을 갈대!”
“어머. 오빠, 얼어 죽을 갈대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깜빡깜빡.
억울함이 가득 담긴 매니저의 행동에 아라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얼굴을 가진 이의 너스레는, 슬슬 올라가던 분노도 사그라뜨리는 마법을 구현했다.
“그래. 내가 잘못이지. 내가.”
“매니저 오빠, 이번에 뭐 가지고 싶다고 했지? 스마트워치? 핸드폰 들고 다니기 귀찮다고 했지? 그거 망가졌다며.”
“...설마···? 사주겠다고···?”
“내가 그거 세트로 사줄게! 우리 매니저 오빠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정말로?”
아라의 너스레에도 불구하고 뚱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던 매니저의 얼굴이 삽시간에 혈색을 되찾으며, 환하게 밝아졌다.
기존에 있던 스마트워치가 망가지고 난 후, 매니저의 쥐꼬리만 월급으로 다시 스마트워치를 장만하기가 망설여지기도 하거니와, 그렇지않아도 핸드폰을 교체할 시기가 되어 핸드폰을 바뀌면서 스마트워치도 새로 장만하자 싶어, 요즈음 핸드폰만 덜렁 들고 다녔던 터였다. 사용하던 기기의 부재에 몇 번 지나가는 말로 불편을 말하긴 했지만···. 그걸 기억하고 사준다고 할 줄이야.
“뭐가 좋아? 사과? 우주? 말만 해! 내가 다 사준다.!”
“아라 만세!! 아라가 최고다! 우리 연예인! 만세!!”
사과든 우주든 말만 하면 풀세트로 맞춰주겠다는 아라의 선언에 매니저의 응어리가 완전히 풀렸다. 풀릴 뿐이랴.
“아라야, 너 농촌 예능 가서 하고 싶은 게 뭐야? 내가 예능팀원들한테 가서 절을 해서라도 하게 해줄게!”
매니저는 성난 고릴라에서 의욕 넘치는 황소가 되어 가시밭길을 자청하기까지 했다. 그런 매니저의 자신감 넘치는 장담에 씩 웃음을 지은 아라가 매니저에게 속삭였다.
“그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