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건 말이지... (2) >
새벽 5시.
아직 해도 채 뜨지 않은 시각. 모든 만물이 잠에서 깨지 않아 고요한 가운데, 미화리 산골 마을 주민들이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준혁아, 오늘 이제?”
가장 먼저 새벽을 연 곳은 바로 강 할머니네. 꼭두새벽부터 잠자리에서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이제 막 방에서 눈을 비비며 나오는 박준혁을 보며 물었다.
“으아함.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머니?”
“눈곱부터 떼고, 세수도 좀 하고. 머리도 감아라. 니 그리 TV에 나올 기가?”
“에이. 할머니. 저도 꾸미면 나름 괜찮습니다.”
“말은, 아무튼 그 구름떡집 사장이 골라준 옷 빨아놨으니까 그거 입으라. 알았제?”
“예?”
오늘은 바로 미화리 산골 마을에서 예능 촬영을 시작하는 날. 오늘은 위해 박준혁은 나름대로 제가 가진 체크 남방 중 제일 멋진 걸 골라놨었다.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 다림질까지 해놔 아주 빳빳한 상태. 다림질 후에는 구겨지지 말라고 옷걸이에 걸어둔 체크 남방이 방에 고이 있건만. 구름떡집 사장이 골라준 옷이라니.
“구름떡집 사장이 준혁이 니랑 한울이 보고 패션 테러리스트? 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꼭 이걸 입히라고 보냈다 아이가. 갸가 참 착하다.”
“네?”
너무 새벽부터 일어난 탓일까. 헛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박준혁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뭔. 니는 젊은 아가 내보다 귀가 안 좋나? 얼른 씻고 저기 개켜둔 옷 입으라고. 알았제?”
“아니 할머니, 저는 벌써 그, 체크 남방을 준비해 뒀······.”
“뭔···! 체크 남방 싹 다 숨겨버리기 전에 잔말 말고 입으라잉? 나가기 전에 아침 먹어야 되니까 퍼뜩 서둘러라.”
박준혁은 제 방에 다소곳이 걸려있는 빳빳한 체크 남방을 생각하며 소심한 반항을 시도하였지만, 강철로 이루어진 것 같은 강 할머니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
결국, 박준혁은 불퉁한 얼굴을 하고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사내 자슥이 뭐 또 삐쳐서.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오고 그러나. 하루만 입으면 된다. 어차피 하나밖에 없다. 구름떡집 사장이 사서 보낸 건. 얼마나 착하노? 니네들 테레비에 이상하게 나올까 봐 걱정해서 이렇게 사 보내기까지 하고.”
할머니···. 착하다니요···.
박준혁은 입이 댓발 나왔다는 것도, 삐쳤다고 말하는 강 할머니의 말을 다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구름떡집 사장이 착하다는 건 동의하지 못했다.
“할머니···!”
화장실로 가던 걸음을 멈춘 한울이 고개를 돌려 결연한 투로 강 할머니를 불렀다.
“와?”
부엌에서 국을 끓이기 위해 재료를 손질하고 있던 강 할머니가 의아한 투로 박준혁을 돌아보았다.
파칭.
강 할머니의 오른손에 들린 식칼이 날카로운 날을 자랑하며 형광등 빛에 반사되었다.
꿀꺽.
“어, 얼른 씻고 나와서! 할머니 말씀대로 저 옷을 입겠습니다!”
“뭐꼬···?”
탁.
급히 대답한 박준혁이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 걸 보며 강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싱겁지도 않은 일을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느냐는 투였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박준혁의 귀에도 그녀의 말이 들렸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식칼과 강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의 조합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구름떡집 사장을 착하다고 인정하고, 옷을 입는 게 더 나았다.
훨씬 더.
**
같은 시각 한울의 집.
-아오.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냐.
“좀 씻어.”
한울은 꼭두새벽부터 걸려온 지민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자신이 출연하는 것도 아닌데, 지난번 강 할머니와 머리를 맞대며 옷을 고르더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난리다.
-매일 씻거든? 이건 누가 나를 욕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원한을 좀 그만 사고 다니지 그랬냐.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다.”
-뭐라니? 내가 얼마나 착하게 하고 다니는데. 그럴 리가 없어.
착하게 하고 다닌다고 말하는 걸 보니 스스로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을 하긴 하는 모양.
“아무튼, 쉰 소리 말고 끊어. 바쁘다.”
지민과 통화를 하는 와중에도 핸드폰은 계속해서 새로운 톡이 생성됐음을 알렸다. 블루투스를 통해 지민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톡을 확인하자,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다 일어나 출석 체크 중이었다.
-알았어. 너 내가 보낸 옷 꼭 입어라. 청청이니 뭐니 입기만 해봐. 그날부터 넌 내 친구 리스트에서 사라질 것임.
“...네 호박···. 누가 공급하는지는 알고 있지?”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사장님. 모쪼록 입어 주시옵소서.
“오냐.”
예전에도 말했지만, 청청 패션은 일 할 때 최고였다. 청청에 앞치마까지 두르면, 그야말로 무적. 하지만 지민이 보낸 옷은 농사와는 아주 동떨어진 스타일이었다. 베이지색 슬랙스에 흰색 니트. 삽질 한번 했다가는 바로 세탁기로 넣어야 할 판이었다.
-아, 그건 그렇고. 너 TV 출연하는 거 괜찮아?
“...? 안 괜찮은 일이 있나?”
TV 출연이야 내가 아닌 멧돼지를 주축으로 될 테고. 임승훈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 마을에서 촬영하는 농촌 예능은 연예인들과 함께 진행될 거라 했다. 연예인과 멧돼지가 있는 곳에 내가 카메라에 비추기나 할지. 이번 촬영에서 나의 역할은 의욕이 넘치시는 마을 어르신들과 방송국 사람들의 사이를 중재하는 게 아닐까.
“...걱정은 우리 마을 어르신들이지.”
지금도 마을 단톡방에는 파이팅 넘치는 인사들이 오가는 중이었다.
‘오늘에야말로 내 평생 단련해왔던 끼를 보여줄 때다!’
‘오늘을 위해서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백화점을 갔다 왔다!’
‘내는 친척들한테 다 전화 돌렸다. 우리 손주가 빨간불 나오는 카메라만 계속 쳐다보라고 하더라.’
하지만 단톡 메시지를 알 리가 없는 지민은 그게 왜 걱정이냐며 다른 소리를 했다.
-너 지금도 입소문 때문에 인력 부족 아니었어?
“아. 또 뭐라고. 어. 괜찮아.”
-야 비결이 뭐냐? 나는 이러다 과로사하지 않을까 싶다. 아아. 내 워라밸 라이프···!
도대체 뭐가 그리 걱정인가 했더니. 입소문 때문에 워라밸이 사라졌다라. 사실 지민의 말을 틀린 건 아니었다.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후로 판매 문의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늘었으니. 지민의 걱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마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했어도 생각했던 것보다 커버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너 아직도 가게에서 다 만들어서 판매하는 거지?”
-어. 식품제조가공업 허가받으려고 하니까 복잡하더라고. 건물 용도도 변경해야 하고, 설치해야 할 것도 많고. 돈도 돈인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해야 할 게 많아서 좀 더 생각하려고.
지민과 나의 결정적인 차이는 제조 부분에 있었다. 원래라면 농사를 하면서 포장과 판매까지 해야 하는 내 일이 더 힘들 테지만, 나에게 정령들이 있었다. 그들이 농사와 수확까지 다 도와주는 데다, 소비자들의 문의는 박준혁이 괴물 같은 속도로 모두 처리해버렸다. 거기다 이번에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이 포장까지 맡아버려 사실상 내가 하는 일은 거의 없는 셈.
“제조를 공장에 맡기는 건?”
생각보다 제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게 라인이 깔린 공장이 아니라, 소수의 인원이 수작업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거라면 더욱더. 지금 내가 지민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은, 이미 식품제조가공업 허가를 받은 곳에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만들어 달라고만 주문만 하면, 구름떡집의 로고까지 박아 만들어주니 지금보다 훨씬 더 수월할 터였다.
-OEM? 그렇지 않아도 그것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뭔가 수량이 공장에 맡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좀 애매하네. 너 회사 다닐 때는 어땠냐?
“수량이 적으면 공장에서 마진율을 좀 높게 책정하긴 하는데, 15% 할 거 30%로 하는 거니까 지금 너처럼 시간이 없어서 허덕이는 거면, 이것도 나쁘지 않지.”
어차피 줘야 하는 노동비를 공장으로 전가하는 거니, 30%라도 괜찮았다.
“그리고 넌 남는 시간에 다른 걸 해. 시간은 생각보다 더 소중하다.”
-그렇지. 뭔가 다른 걸 개발하고 싶어도 뭐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지. 고객 관리도 잘 안 되고. 한번 OEM도 생각해 봐야겠다. 혹시 잘 아는 공장 있으면 소개해줘.
“오케이. 이따 보내줄게.”
-오. 땡큐. 근데 그럼 너는? 듣자 하니 니가 거의 중간에서 조율하던 거 같던데. 괜찮겠어?
“어. 완전. 그럼 끊는다.”
-뭐야 뭐가 그렇게 급해? 너 솔직히 말해봐. 뭐 있지?
“10초 이내로 말해. 10, 9, 8, 7······.”
-그게 뭐야!
“...5, 4, 3, 2...”
-아악! 야! 김한울!
뚝.
10초가 지나자마자 나는 통화를 끝냈다. ‘뭐가 있냐’라니. 하여튼 눈치는 빨랐다.
“이왕 촬영하는 거, 얻을 수 있는 건 얻어야지.”
아직까지는 선착순 판매전략이 먹히고 있지만, 아마 방송이 나가면 지금 이 판매전략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TV의 위력은 생각보다 위대하므로. 아마 최소한 지금의 10배 정도는 사람들이 몰릴 터.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몰리겠지.”
지금도 매일같이 신비농장 대표전화로 같이 일을 하였으면 한다는 업체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에 3통 정도. 아무런 광고 없이, 입소문 하나만으로 이 정도. 하지만 나는 지금 걸려오는 작은 업체와 같이 일할 계획이 없었다.
“같이 일하게 되면, 최소한 중견업체 정도는 돼야지.”
그래야, 계획하고 있는 걸 진행 할 수 있을 것이다.
**
아침 8시.
마을 어귀, 팽나무 앞.
[호에에!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 같다!]
“그러게.”
노을의 말처럼 팽나무 밑으로 집결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평소와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오메. 이게 도대체 뭐꼬?”
“으이구. 누가 촌사람 아니랄까 봐 티 내는 거 봐라. 이게 바로 나비넥타이라는 기다.”
“나비넥타이?”
“오야. 나비넥타이. 백화점 갔더니 나비넥타이랑 내랑 그렇게 잘 어울린단다.”
갈색 3피스 정장에, 나비넥타이까지 풀세트로 맞춰 입은 심 할아버지부터.
“어이고. 너 그러다가 뼈 부러진다! 조심해라!”
“아이다. 내가 평생 단련해온 내 장기다! 내 소원이 죽기 전에 온 사람들에게 내 장기를 보여주는 거였는데, 그게 오늘이다!”
온몸을 유연하게 꺾는 빨간 장화 어르신.
“니는 또 뭐하는데?”
“빨간 거 잘 보라 캤다. 그래야 테레비에 잘 나온다꼬. 그래서 지금 연습 중이다 아이가.”
“그래? 야야. 그렇게 연습해서 되겠나? 니혼자 원맨쇼 하는 거보다 다른 사람이 들어줘야 연습이 되지. 이리 줘봐라. 번갈아 가면서 하자.”
그리고 카메라의 빨간불을 보는 연습을 하겠다고 빨간 점을 찍은 박스를 두 손으로 들었다 놨다 하는 장 이장님까지.
“다들 진심이시네.”
새벽부터 일어나 방송국 사람들을 제일 먼저 맞이할 수 있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각자 준비한 바를 연습하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와 같이 나란히 짐을 들고 서 있는 박준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 볼까? 준혁아.”
“네! 형님!”
“가지고 온 거 깔자.”
“네!”
방송국 사람들이 오기까지 앞으로 약 30분.
가지고 온걸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