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한 사람들 (1) >
“어이쿠 이게 다 뭐래?”
박준혁과 내가 팽나무 밑 평상위로 준비해온 것들을 펼치자, 빨간 점이 찍힌 상자와 눈싸움을 하던 장 이장님이 고개를 돌렸다.
“먼 곳에서 오시는데, 대접해 드려야죠.”
“한울이 니네 밭에서 가져온 거제? 맨날 봐도 진짜 잘 키운다. 비법이 뭐꼬? 근데 니 이렇게 많이 가지고 와도 되나? 팔 거 없는 거 아이가?”
내가 준비해 온 건 바로 우리 신비농장에서 파는 농작물들. 펼쳐놓으니 커다란 평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농작물을 본 장 이장님이 깜짝 놀라 하며 물었다.
“촬영 확정되고 나서부터 준비해서 괜찮습니다. 비결은···. 곧 알려드릴게요. 준혁이가 연구한 비료가 괜찮더라고요.”
“으잉? 준혁이? 쟈가 만든 거? 설마 그 똥 덩어리 말하는 거 아니제?”
농작물의 비결을 박준혁이 만든 비료라고 하자 장 이장님이 대번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하기사. 이장님은 그때 그 거름으로 위장한 똥 덩어리를 보신 분이니, 믿지 않을만했다. 합리적인 이장님의 의심에 내가 답변을 하려 할 때였다. 내 뒤에 서 있던 박준혁이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이장님 앞에 섰다.
“이장님! 저! 박준혁!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이번에는 똥 덩어리가 아닙니다! 이 작물들! 절반은 텃밭에서 키웠습니다!”
“텃밭에서? 비닐하우스가 아니라?”
“네! 그렇습니다!”
“그···. 설마 니가 만들었다는 비료 써서 만들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으잉? 그게 말이 돼나? 저번에 봤던 똥 덩어리 땅에 묻었으면 농작물들 다 죽을 건데?”
“그래서 제가! 개량했습니다!”
“니가?”
“예! 한울 형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울이가···?”
그 똥 덩어리로 어떻게 작물을 키우냐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박준혁을 보던 이장님은 내가 도와줬다는 말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었다.
“..한울이 니, 비료 만들 줄 아는 재주도 있었나?”
“아뇨. 만든 건 준혁이가 다하고 저는 옆에서 작은 조언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장 이장님은 놀랍다는 눈으로 날 보았지만, 사실 나는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장님과 내가 그날 발견한 똥 덩어리는 박준혁이 연구 재료로 쓰던 것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와우. 여기서 연구한 거야?’
창고에 널브러져 있던 비료를 보고는 불필요하거나 부족한 것들을 줄줄 읊는 노을이를 데리고 간 강 할머니 댁의 창고는 박준혁의 연구실로 바뀌어있었다.
‘네. 할머니께서 마음껏 써도 된다고 하셔서···. 꾸며봤습니다. 하하.’
‘굉장한데?’
강 할머니의 창고. 아니, 이제는 박준혁의 연구실이 된 창고는 마치 학창 시절 이과생들의 연구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던 과학실의 모습을 똑 닮아있었다.
'저만의 연구실이 있었으면 했는데, 대학원 그만두자마자 차렸습니다!'
대학원을 관둔 뒤 여태 모았던 돈으로 만들었다는 박준혁의 연구실은 아주 그럴듯했다.
'오케이. 그럼 바로 시작해볼까? 여태 만든 비료들 좀 보여줘 봐.'
'네! 바로 준비해놨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친환경 비료를 만들어 이름을 알리는 게 꿈이라더니, 박준혁이 꺼내온 비료 샘플은 20가지가 넘었었다.
-컁! 다 별로다!
하지만 20가지가 넘는 비료 샘플들은 모두 노을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노을의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박준혁에게 전달해 주기 시작했다.
'어···. 샘플 18번은 영양분 흡수율을 좀 더 높여야 할 것 같고···. 5번은 잘 물러질 것 같다니까 거기에 관련된 걸 좀 빼야 할 것 같고···. 수정한 다음 18번이랑 5번을 섞으면 괜찮겠는데?'
'네? 그냥 보기만 해도 아십니까?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르쳐주십시오!'
물론 박준혁이 어떻게 실험도 해보지 않고 알 수 있냐며 비법을 알려달라고 하는 고비가 한 번 있긴 했지만, 잘 넘어갔다.
'색을 보고···?'
'색을 보고 그걸 다 맞추셨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어떻게···. 아니야. 형님이라면 할 수 있어. 그린핑거스를 소유하신 분이니까!'
'응···?'
살짝 이상한 쪽으로 오해를 받긴 했지만, 그린핑거스가 여우 정령에게 들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 대충 넘어갔었다.
"네! 한울 형님은 비료 색만 봐도 그 안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단번에 아시는 그린핑거스의 소유자로서, 제가 평생을 떠받들고, 존경하며 살 겁니다!"
"야 지금 뭐라카노?"
장 이장님은 거의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처럼 나를 찬양하는 박준혁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찬양해라! 내가 다 했다! 컁!]
노을이는 내 어깨 위에서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앞에서는 박준혁이 부담스러운 눈이, 고개 옆에서는 신난 노을의 재촉에 난감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허이고. 한울이 고만 부르고 여 와서 이거나 좀 들어라."
머리 위에 스텐 대야를 진 강 할머니와 꽃분이 할머니가 마을 안쪽에서 걸어오셨다.
"아이고 임자, 그 사슴 같은 목에 무리 간다. 내한테 주라. 어서."
꽃분이 할머니 머리 위에 스텐 대야를 본 장 이장님은 그 길로 달려가 할머니의 스텐 대야를 빼앗아 들었다.
"괜찮은데."
"괜찮기는. 내 다 시키라.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된다. 이런 거 들고 올 거면 내한테 얘기를 하지."
"순자 언니랑 같이 오는데 무얼."
매번 느끼는 거였지만, 장 이장님의 꽃분이 할머니 사랑은 아주 특별했다. 평생을 같이 살았지만, 매일매일 더 고와 보인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걸 봐왔던 마을 사람들에겐 아주 익숙한 일이었지만.
물론 장 이장님의 팔불출 모습을 아무리 오래 봐왔어도 적응을 못 하는 사람은 있기마련.
"아이고 눈꼴시러버라. 짝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꽃분이 할머니의 옆에 있다는 이유로 바로 앞에서 장 이장님의 팔불출을 목격한 강 할머니가 윗입술을 삐딱하게 올리며 콧방귀를 팽 뀌었다.
"헹!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라."
강 할머니의 핀잔에도 장 이장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꽃분이 할머니 옆에 착 달라붙어 강 할머니의 화를 더 돋웠다.
"심 영감! 거기 가만있지 말고 좀 들어봐라!"
"어? 내?"
평상에 앉아 길게 조각낸 당근을 오물오물 씹으며 장 이장님과 강 할머니의 대치를 구경하고 있던 심 할아버지가 갑자기 불린 제 이름에 눈을 끔뻑였다.
“어. 내 목 뿌사지겠다. 얼른 와서 좀 들어봐라!”
“내 목이 더 약할 것 같은···.”
“안 오나??”
“어! 가고 있다!”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둘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 심 할아버지는 강 할머니의 호통에 헐레벌떡 일어나 스탠대야를 받아들었다.
“어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으억! 이 뭐가 들었길래 이치로 무겁노! 한울아! 내 좀 살리도!”
스탠 대야를 두 손으로 건네받자마자 죽는소리하는 심 할아버지의 모습에 목을 까딱 거리던 강 할머니가 다시 대야를 가져갔다.
“아이고. 그거 좀 들었다고 우는소리 하면 우짜는데. 이래 내라.”
“어이구 나 죽···. 어잉? 뭐꼬. 안무 겁나?”
끙끙거리며 나를 찾던 심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다시 원주인에게로 돌아간 스텐 대야를 보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은 그렇게 힘들게 들었던 스텐 대야를 강 할머니는 너무 쉽게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다시 눈만 끔뻑거리는 심 할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 할머니가 마을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아침은 먹고 왔지예?”
끄덕끄덕.
몇 주간 강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던 마을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은 강 할머니는 스탠대야를 평상 위에 내려놓으며 다음 행동 지령을 내렸다.
“그럼 디저트를 먹어야겠네? 자, 우리는 지금부터 방송국 사람들이 올 때까지 아-주 화목한 마을의 사람들이다. 알았나?”
**
“이야.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냐?”
MBS 예능5팀의 메인 피디, 이박복은 미화리 산골 마을과 가까워질수록 달라지는 풍경에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감탄을 내뱉었다.
“저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 말을 했었는데. 저랑 같은 말을 하시네요. 하하하!”
“그래? 역시 우리 경배. 나랑 생각하는 게 아주 비슷해? 그치?”
“그렇습니다? 하하하!”
메인 피디 이박복은 자신의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박경배를 보며 씨익 웃었다.
움찔.
어딘가 싸한 이박복의 웃음에 박경배가 위험신호를 감지했지만, 지금 이곳은 차 안.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결국, 포기한 박경배는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후. 피디님, 또 뭡니까. 빨리 말씀하시죠.”
“역시. 내가 말 하지 않아도 잘 알아. 아주 좋아. 자, 박경배야. 우리가 지금 다른 팀한테 엄청나게 까이고 있는 건 알고 있지?”
“...?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피디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시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미화리 산골 마을 사전 조사 직후 회의 때 이박복 피디가 지시한 사항은 첫째도 함구, 둘째도 함구였다. 사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MBS에 와서는 아직까지 아무 실적을 내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견제가 처음보다는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거라며 지시했던 사항이었다.
그 때문에 확실하게 편성을 받기 전까지 팀원들 모두가 팔자에도 없는 벙어리 행세를 하고 다녔다.
“그건 그래. 근데, 기분은 별로 좋지 않더라고. 안 그래?”
자신이 함구령을 내리고, 팀 내 불화가 있는 것처럼 하고 다니라고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남한테서 욕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다는 이박복 피디.
“하하하! 맞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스스로 무덤을 파서 그 안으로 들어가 관뚜껑까지 닫은 사람이 바로 이박복이라 지금 그의 주장은 어폐가 있었지만, 박경배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촬영장의 왕은 바로 메인 피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 이상, 그의 심기를 건드는 소리를 하는 건 좋지 않기 때문.
박경배의 동의에 신이 난 이박복 피디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경배. 내가 영상을 보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지금 이박복 피디가 말하는 영상은 바로 사전 조사를 마친 뒤 제출한 동영상이었다.
영상이라는 소리에 앞 좌석에 있던 임승훈의 어깨가 움찔했다. 영상을 찍은 사람이 바로 임승훈이었기 때문이다. 임승훈에게 흘낏 시선을 주었다 거둔 박경배는 다시 이박복 피디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부디 그의 안 좋은 버릇이 다시 도지지 않기를 바라며.
“네. 말씀하십쇼.”
이박복 피디에게는 몹시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촬영 직전 정했던 컨셉을 바꾸거나 추가하는 것.
바꾼 컨셉들이 시청자들의 반응을 폭발적으로 끌어내 스탭들 중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작가는 달랐다. 저번처럼 같이 일 못 하겠다고 뛰쳐나가기라도 하면, 아주 곤란했다.
꿀꺽.
박경배가 피디가 보았을 무엇을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킬 때였다. 두 손바닥을 짝 친 이박복 피디가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 멧돼지 말고도, 마을 사람들이 아주 좋더라고. 출연자들에 마을 사람들의 비중을 반으로 늘리는 거 어때?”
이박복 피디의 발언에 박경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섭외한 연예인들만 4명. 그것도 이박복 피디의 유명세에 출연을 결정한 톱급 연예인들만 둘. 만약 이들의 분량이 일반인들 때문에 줄어든다면, 분명 기획사에서 항의할 게 분명했다. 거기다 연예인들을 위주로 대본을 만든 작가의 반발까지 생각하면···. 아주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박경배는 ‘no!’를 외칠 수 없었다.
“네. 그렇게 하시죠! 피디님 생각을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다른 일반인들이라면 몰라도. 이곳 마을 사람들은 조금 특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