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한 사람들 (2) >
하하하
호호호
미화리 산골 마을 어귀에서는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웃고 있었다.
“하하···. 언제까지 이래야 하노? 한울아 아직이가?”
웃는 표정을 유지한 장 이장님이 복화술로 내게 남은 시간을 물었다.
“아직 약속 시각까지 5분 남았습니다.”
5분이나 남았다는 소리에 지난 25분 동안 계속해서 웃는 표정을 유지하던 마을 사람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흐흐. 형님 입가에서 경련이 납니다. 웃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호호호. 그러니까 평소에 연습했었어야지. 기합으로 버티라!”
박준혁의 말에 강 할머니가 호통쳤다. 할머니의 입가에는 봄을 맞이한 꽃이 피듯 화사한 미소가 있어 진짜 호통인지 아닌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강 할머니의 모호한 호통은 단박에 통했다.
“흡!”
기합으로 입꼬리의 떨림을 이겨낸 박준혁은 전투적으로 강 할머니와 꽃분이 할머니가 들고 온 디저트를 입으로 넣었다.
“천천히 무라. 안 뺏어 먹는다.”
“제가, 원래, 강정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맛있습니다!”
꿀꺽.
강 할머니의 말에 입에 있던 강정을 목 뒤로 넘긴 박준혁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바삭.
박준혁의 말대로 현미와 각종 견과류를 넣어 만든 강정은 맛도 맛이지만 영양가가 가득해 보였다.
“정말 맛있네요. 팔아도 될 것 같은데요? 대체 언제 만드신 거예요?”
촬영이 시작된다고 했을 때부터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며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신 강 할머니인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준비를 하셨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는 얘기를 하자, 주름진 강 할머니의 얼굴에 커다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글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강정은 또 자신이 있지. 서울 회사 다녔던 한울이 니가 그렇게 말하면 그게 맞는 거지. 암.”
“한울아, 우리 꽃분이가 만든 한과도 좀 무봐라. 이게 더 맛있다.”
뿌듯한 미소를 짓는 강 할머니의 모습에 옆에 있던 장 이장님이 커다란 한과를 내밀었다. 자주색 튀밥이 묻어있는 한과는 아주 고운 색을 자랑했다.
“에이. 이장님, 꽃분이 할머니 한과는 안 먹어봐도 잘 알죠. 제가 여태 먹은 게 몇 갠데요. 꽃분이 할머니께는 제가 회사 입사하자마자 판매 제안했었습니다.”
인공색소가 아닌 치자나 비트에서 뽑아낸 천연색소를 써서 만든 꽃분이 할머니의 한과는 상품성이 있었다. 맛도 맛이지만, 건강까지 생각한 오색빛깔의 한과라 포장만 그럴듯하게 한다면 구매자들은 분명 있었으니까.
회사에 다닐 때 이미 제의를 했다는 내 말에 장 이장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으잉? 진짜가? 임자, 왜 내한테 말안했노?”
할아버지는 항상 꽃분이 할머니의 음식솜씨를 널리 널리 알리고 싶어 하셨다. 언젠가 나에게 했던 말씀이 ‘우리 꽃분이가 만든 음식이 세계 최고다! 세상 사람들한테 우리 꽃분이 음식솜씨를 다 알리고 싶은 내 마음을 니가 알라면 멀었다!’ 였으니···.
장 이장님은 나에게 아직 꽃분이 할머니 같은 짝을 만나지 못해 이해가 가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글쎄. 나는 이미 장 이장님과 비슷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야, 이것 봐봐!’
대학생 시절, 같은 학교에 다녔던 민준은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 생활을 하는 나와는 달리, 서울집에서 통학했었는데, 어느 날 학교 안 인쇄소에서 A4 사이즈의 프린트물을 잔뜩 들고 와 내게 들이밀었다.
‘...그게 뭔데? 헐.’
과외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과외 전단지를 인쇄했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프린트된 A4 용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진을 보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었다.
‘우리 집 백호. 아 진짜 우리 집 백호의 이 카리스마는 널리 널리 알려야 된다. 너도 동의하지?’
백호라고 불리는 사진 속의 고양이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말로만 들었지, 키우는 반려동물을 자랑하려고 전단지까지 제작해 붙이는 사람이 내 동기였을 줄이야. 할 말을 잃어 멍하게 있는 내게 자신이 들고 있던 전단지의 반을 넘긴 민준은 활짝 웃으며 말했었다.
‘자, 이제부터 나랑 같이 우리 백호를 자랑하러 가자!’
‘너···. 드디어 미쳤구나?’
조사를 제외한 나머지 글자가 모두 한자인 전공 책을 들고 시험 범위가 두 권이라며 절규하던 게 몇 주 전. 시험도 끝났겠다, 이제 사람 꼴을 갖추어가나 싶더니···. 이런 미친 짓을 계획하고 있을 줄이야.
당시 나는 다른 학과지만 말이 잘 통했던 괜찮은 동기를 하나 잃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만큼 민준이 건넨 전단지의 양은 많았다. 다시 전단지를 돌려주고 절교를 고하려는 내 모습에 민준은 서둘러 비책을 꺼내 들었다.
‘이거 돌리고 나면, 내가 햄버거 쏜다!’
지금의 나였더라면,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요리의 ‘요’자를 겨우 알던 시기였기에, 남이 사주는 밥이라면 그게 배달음식이든, 식당 밥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트리플치즈 더블패티버거 3개. 밀크셰이크랑 치즈스틱, 감자튀김 라지사이즈에 콜라까지.’
‘콜!’
내 제안을 수락한 민준을 도와 대학 시절 나는 일면식도 없는 민준네 백호 자랑 전단지를 500장이나 붙였었다.
그 후에도 민준은 시험 기간만 끝나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댔었다. 그런 놈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로펌의 변호사라니. 역시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민준은 아직까지도 술만 마시면 그 시절 백호의 전단지를 붙이던 일을 얘기하며 이제는 고양이별로 간 백호를 회상하고는 했다. 대학 시절 온갖 이상한 짓은 다 했지만, 백호의 전단지로 교내를 뒤덮은 일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그때 그 일을 도운 나에게도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니 아마 장 이장님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전단지 사건 이후로 교내 유명인이 되어 많은 학우의 부러움을 받아 어깨를 으쓱이며 다녔던 민준처럼, 장 이장님도 꽃분이 할머니의 음식이 아니라 그저 꽃분이 할머니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셨던 게 아닐까.
“집에서 조금씩 만든 건데 뭘 판다고. 팔라면 쉬는 날 없이 계속 만들어야 할 텐데. 일 없다.”
“쉬는 날이 없어? 그럼 안 되지. 힘든 거는 절대 하지 말어. 지금처럼 내한테만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주면 된다. 건강만 해라 건강만.”
역시나. 꽃분이 할머니가 쉬지 못하고 일만 할 것 같아 내 제의를 거절했다고 하자, 장 이장님은 펄쩍 뛰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잘했다, 잘했다.’를 반복하셨다.
“할머니, 혹시라도 하고 싶으신 생각이 있으시면 언제든 알려주세요. 제가 할머니 편안하게 쉬시면서 이름 알릴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으잉? 그런 방법이 있나?”
“네. 당연하죠.”
오직 실적만 외치며 업체들을 쪼으라고 하는 상사도 없겠다, 당연히 가능했다. 만약 꽃분이 할머니든, 강 할머니든, 당신이 가진 재능으로 무언가 하고 싶으시다고 하면, 지난 10여 년 동안 식품 업계에서 신상품을 개발하고, 품질은 좋으나 마케팅을 잘하지 못해 빛을 보지 못했던 제품들을 양지로 끌어올렸던 경험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도와드릴 생각이었다.
재고를 쌓아놓고 판매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일자를 정해놓고 선착순 예약을 받아 판매하는 방식을 채택한다면, 쉬웠다. 마케팅과 배송은 우리 신비농장에서 맡기만 하면, 할머니들은 그저 원하시는 시간에 원하시는 수량만 만들면 된다.
하지만 내 설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강 할머니와 꽃분이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셨다.
“아이고. 됐다. 니 일도 바쁜데 무슨. 느이 할머니가 맨날 니 서울서 고생한다고 걱정했었다. 뭐든 니 먼저 생각하면서 하그라. 알았제?”
“맞다. 우리는 다 늙어가 인제 와서 뭘 하고 싶은 욕심은 없다. 가끔씩 이렇게 좋은 일 있으면 솜씨 좀 부리고, 칭찬받는 거로 족하다.”
그저 나를 고생 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네. 알겠습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고생이랄 건 없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나를 생각해 걱정하시는 어르신들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를 만들어 안겨드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한울과 어르신들의 서로를 걱정하는 훈훈함으로 팽나무 밑이 따뜻해질 무렵.
“경배야, 저기 저 남자가 누구라고?”
마을 어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다 그 장면을 포착한 이박복 피디가 옆에 있던 박경배에게 물었다.
“아, 멧돼지의 주인인 김한울씨입니다.”
“멧돼지의 주인이라고? 오호라···. 그럼 마을 출연자 후보 명단에 멧돼지 주인분도 올려.”
“네. 알겠습니다. 승훈아, 들었지?”
“네! 알겠습니다!”
의사를 결정한 이박복 피디가 박경배에게 지시를 내리면, 박경배는 임승훈에게 바로 전달하는 아름다운 광경. 누군가는 이 광경을 보고 막내가 불쌍하다고 하겠지만, 임승훈의 생각은 달랐다.
‘메인 피디님 주변에 있으면 피곤해.’
직급이 너무 차이나는 상사의 주변은 중간급 자가 차지하는 게 맞았다. 특히나 예민하고 햇볕이 쨍쨍한 와중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수시로 말을 바꾸는 상사라면 더욱더. 그런 면에서 박경배는 아주 좋은 중간 직급자였다. 메인 피디를 전담 마크하고, 변덕을 다 받으면서도 그 와중에 메인 피디님이 말하는 100가지의 쓸데없는 이야기 중 알맹이만을 아래 직급자들에게 전달해 주었으니.
“그럼, 전 먼저 가서 동의를 얻고 있겠습니다.”
박경배의 배려로 드디어 자유로운 몸이 된 임승훈이 막 준비를 끝낸 VJ와 막내 작가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 가서 잘 말씀드리고. 알지?”
“네. 전부 허락을 받아 오겠습니다!”
옛날에는 일반인들의 동의 없이 그냥 촬영했다지만, 이제는 아니다. 주민들의 동의 없이 촬영하고 방송을 했다가는 고소당하기 십상. 동의를 받지 않은 주민들은 영상 편집 때 일일이 다 찾아 모자이크 처리를 해줘야 하는 만큼, 모두에게서 촬영 동의를 받는 것이 가장 베스트였다.
“자, 갑시다.”
임승훈이 박경배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VJ, 그리고 막내 작가와 함께 마을 사람들이 있는 팽나무 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땠을 때였다.
부아앙-.
그들의 앞으로 시꺼먼 밴 하나가 슉 지나가더니 팽나무 앞 공터에 멈춰 섰다.
“어? 누구지?”
차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찐하게 선팅이 되어 있는 걸 보니 분명 출연 연예인 중 한 명이 분명했다.
“그러게요. 아직 연예인들 올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출연 연예인들에게 말한 시각보다 훨씬 전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연락을 담당하는 스탭의 실수로 예민하기 그지없는 연예인이 촬영준비도 되지 않은 이곳에 도착한 거라면, 아주 골치 아팠다.
“확인해 봤어?”
“네. 다 확인해 봤는데 제대로 전달했습니다. 여기요.”
벤이 지나가자마자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한 연락 담당 스탭이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내미는 화면에는 같은 시간이 적혀있었다. 스탭의 잘못이 아닌 걸 확인한 박경배는 그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며 중얼거렸다.
“그럼 대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