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 시작 (1) >
"안녕하세요!"
커다란 벤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내린 여자의 인사에 마을 사람들은 하던 걸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여?"
"연예인인가 본데?"
"뭐꼬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한울아 니는 아나?"
마을 어르신들은 차에서 내린 여자를 보며 낯이 익긴 한데, 누군지 모르겠다며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야. 야는 또 와 이라노. 준혁아?"
벤에서 내린 여자의 얼굴을 본 박준혁이 평상 옆에 서서 강정에 이어 한과를 집어 먹다 말고 털썩 바닥에 주저 앉은 것.
"아, 아라님···!"
주저앉으면서 연예인의 이름을 내뱉은 박준혁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라님?"
"아라? 아아. 그 내 들어봤다. 가수다. 가수!"
"가수? 참말이가?"
"어. 어디서 봤나 했더니 우리 손주 프로필 사진이 저 처자드라. 이 봐봐라."
장 이장님은 박준혁의 말에 그제야 생각났다며 핸드폰을 켜 손주의 프로필 사진을 띄워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과연 이장님의 말씀대로 손주의 프로필은 아라로 도배되어 있었다. 노래 부르는 아라, 음식을 먹는 아라, 팬 사인회를 하는 아라 등등.
"워매···. 니 손주 괘안나?"
도대체가 본인의 사진은 없고 오직 연예인의 사진으로만 가득한 이장님 집 손주 프로필에 심 할아버지가 걱정 어린 소리를 했다.
"아이고. 심 할배, 걱정 마이소. 우리 손주 전교 회장이다."
"으잉?"
심 할아버지의 걱정에 조용히 계시던 꽃분이 할머니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호호 웃으며 말했다.
"제 팬분들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더라고요. 안녕하세요, 이번 촬영에 참가하게 된 가수 아라라고 합니다."
꽃분이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벤 앞에서 내린 후 바로 시작된 어르신들의 대화에 타이밍을 놓쳐 어색하게 서 있던 가수, 아라가 재빨리 끼어들어 인사를 했다.
"와이고. 우리 손주도 그리 말하던데. 나중에 사인 한 장만 해 줄 수 있나요?"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아라의 태도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장 이장님이 어색한 표준어를 구사하며 손을 앞으로 모으고 같이 인사했다.
"어유. 당연하죠. 어르신. 괜찮으시다면, 영상 통화도 가능합니다."
"어이구. 그랴? 그럼 나는 너무 고맙지. 어디 보자, 내가 우리 손주한테 일단 전화해도 되는지 먼저 물어볼게. 잠시만 기다려봐요."
"천천히 하세요. 어르신."
"우..현...아...니...전...화...되...나..."
영상 통화까지 해 주겠다는 아라의 말에 장 이장님이 화색을 띠며 더듬더듬 문자를 치기 시작할 무렵.
"아,아,아, 아라님···!"
어쩐지 가수 아라가 벤에서 등장했을 처음보다 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박준혁의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어,어,어, 어떻게, 저,저를 알아, 보시, 나요?"
"어유. 당연히 기억하죠. 그때 샐러드 양보해 주셔서 덕분에 배 고픈 일 없이, 잘 보냈는걸요?"
"새, 샐러드, 또, 드리겠습니다!"
박준혁은 아라가 자신을 기억해 주었다는 것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샐러드를 드리겠다는 말을 남긴 뒤 바로 텃밭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다가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와 헉헉거리며 허락을 구했다.
"형님! 샐러드 좀 만들어와도 되겠습니까!"
물어보는 거 맞지?
마치 내가 허락해 줄 거라고 확신을 가진 듯 우렁차게 물어보는 박준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레싱 재료는 있어?"
"네! 그때 가르쳐 주신 이후로 종종 만들어 먹고 있습니다! 강 할머니 댁 냉장고에 다 있습니다!"
"그래. 이왕 만드는 거 몇 개 더 만들어와."
"네! 알겠습니다!"
내게 텃밭 이용 허락을 받은 박준혁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전쟁에 나가는 전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금 텃밭을 향해 뛰어갔다.
그런 박준혁의 뒷모습을 보며 강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쯔쯔. 쟤는 평소에는 멀쩡한데, 한 번씩 저런다."
"평소에는 멀쩡한 거 맞나?"
"사랑은 원래 그런기다."
강 할머니의 옆에 있던 심 할아버지는 원래는 멀쩡하다는 말에 의심을 표했고, 장 이장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암. 그렇고말고’라고 하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기 다른 세분의 반응을 흥미롭게 보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이렇게 다시 뵙네요."
다른 어르신들과 모두 인사를 마친 아라가 내게로 와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연예인이라면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람들도 많이 만날 텐데. 한번 판매자와 구매자로 만난 것이 다인데 이렇게 살갑게 인사를 해 줄 줄이야. 매번 콧대 높은 연예인들만 보다 이런 연예인을 보니 또 새로웠다.
‘특정 분야에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은 성격은 아닐 테니까.’
우리 미화리 산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만 해도 다 제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듯 말이다.
어르신들에게도 싹싹하고, 기억력도 좋은 걸 보니 이번 촬영이 수월하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때 샐러드랑 같이 샀던 야채가 너무 제 몸에 잘 맞아서 다시 주문하려고 했더니, 주문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럴 줄 알았으면 그때 더 살 걸 하고 후회되는 거 있죠? 혹시 여기서 산지 구매 가능할까요?"
성큼 한 걸음 더 다가온 아라가 두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물어보는데, 아마 박준혁이 있었더라면 내 장담하건대 무조건 예스! 를 외쳤을 터였다.
"음···. 일단 촬영부터 하시죠."
둘러 말한 거절을 알아들은 아라의 표정이 삽시간에 간식을 빼앗긴 고양이 같이 변했다.
강아지가 아니다. 고양이. 억울하면서도, 설마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라는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뒤쪽에 서 있는 사람에게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 뒤에 있는 피디님이 설명해 주실 겁니다."
내 말에 아라가 뒤를 돌아보자, 아라와 내가 대화를 시작할 무렵 도착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임승훈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네! 그건 저희 제작진들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
아삭아삭.
"나머지 출연자들은 언제 오는 거람?"
팽나무 밑, 평상 위.
제작진보다 이곳에 더 먼저 도착한 예능 출연자, 아라가 오이를 집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약속 시각까지 한 10분 정도 남았으니까, 좀만 더 기다리면 될 것 같은데? 그보다 너 계속 먹어도 돼? 배 안 불러?"
아라의 매니저는 아까 이곳 마을 청년이 가지고 온 샐러드를 다 해치우고도 또다시 평상에 앉아 신비농장의 것으로 보이는 오이와 당근, 양배추 등을 먹어대는 아라를 보며 물었다. 워낙에 평소에 소식을 하는 터라, 갑자기, 그것도 촬영 바로 직전에 과식하는 아라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라는 그런 매니저의 걱정에 괜찮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실험을 해봤는데, 여기껀 아무리 먹어도 괜찮더라고."
평소에는 뭐만 조금 먹고 나면 몸이 무겁다고 하더니···. 전생이 토끼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신비농장의 야채들을 아삭거리며 먹는 아라의 발은 신이 난 것처럼 까딱거리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만 발을 까딱거리는 걸 알고 있는 매니저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더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궁금했던 사항을 물었다.
"아까 피디님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이렇게 기분이 좋아?"
"아아. 그거.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아마 여기 촬영만 잘하면, 신비농장 프리패스권 받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어? 어떻게?"
"어허. 매니저님,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곧 알게 될 겁니다."
아라는 자꾸 프로그램의 내용을 묻는 매니저에게 검지를 입 앞에 붙여 보였다.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라는 다시금 접시로 손을 뻗어 먹기 좋게 잘린 오이를 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아삭아삭.
**
"자자, 이제 준비들 다 되셨죠? 촬영 시작합니다. 3, 2, 1"
탁.
슬레이트가 쳐지고, 미화리 산골 마을 최초의 방송 촬영이 시작되었다.
"자, 제작진분들. 이제 말씀해 주시죠. 여기가 어딥니까?"
슬레이트가 쳐지자, 제일 연륜이 많아 보이는 남자 연예인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은, 시골입니다."
출연자들의 맞은편, 땅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이박복 피디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아니, 피디님. 여기가 시골인 건 알죠. 저희 질문은, 여기서 저희가 이제 뭘해야 할지 말씀해 달라는 말입니다. 뭐, 마을로 들어가면 됩니까?"
연륜이 많아 보이는 남자 연예인의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자 연예인이 양손을 앞으로 뻗고는 뭐라도 알아야 촬영을 하지 않겠냐며, 답답해했다.
사실 출연자들의 지금, 이 반응은, 대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리얼. 이 반응을 위해 사전 미팅 때도 시골로 가 예능을 찍을 거라는 것만 알려주고, 자세한 사항들은 일절 비밀에 부쳤었다. 이박복 피디는, 자신의 계획대로 얼굴에 ‘정말 촬영에 대해 아는 게 없음’이라는 감정을 명백히 드러낸 출연자들을 보고 씨익 웃으며 준비된 대본을 읽었다.
"여기서 혹시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 손들어 보십시오."
이박복 피디의 질문에 출연자들을 서로를 쳐다보았다.
"없습니까?"
하지만 이박복 피디가 다시금 상기 시킬 때까지도 그들 중 손을 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라의 옆에서 양옆을 번갈아 가며 보던 개그우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라는 그렇다 치고. 거기 두 분은 왜 손을 안 드세요?"
개그우먼의 지적을 받은 남자 연예인 두 명은 발끈해 하며 항의했다.
"아니! 나는 조 부모님 때부터 서울에서 살던 토종 서울 사람이야!"
"우리 집은 조상님 대대로! 전부 서울에 사셨어! 막 내가 얼굴이 이래도, 얼굴로 사람 판단하면 안 되지! 내가 이래 봐도 아주 곱게 자란 사람이야."
"아···. 예."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출생지를 알리는 남자 연예인들에 개그우먼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믿어준다는 투의 대답이었다. 마지못한 그녀의 대답에 조상님 대대로 서울에서 터를 잡아 살았다던 남자 연예인이 고개를 돌려 피디에게 억울함을 전달했다.
"우와. 진짜 너무 하네. 피디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네?"
남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보고 좋다고 하는 피디의 말에 귀를 후볐다.
"시골에서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여러분들과 이렇게 촬영을 시작할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박복 피디는 만나자마자 투덕거리는 출연자들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사전 미팅을 식사 자리가 아닌, 사무실에서 형식적인 형태로 했었다.
그건 바로 우당탕거리는 이들의 캐미를 보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예능 판에서 꽤나 유명한 강산과 은퇴한 격투기 선수인 이추성, 요즘 SNS에서 인기몰이를 하는 개그우먼 김은비라면, 서로가 낯선 상황을 이용해 장면을 만들어 낼 거라고 확신했다. 오프닝부터 티격태격하는 이들이 사전 미팅 때 잠깐 만난 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는 걸 누가 알까. 문제는 데뷔한 지 이제 1년밖에 안 된 가수 아라인데···.
"피디님, 얼른 미션 알려주세요."
옆 사람들이 투덕거리던지 말든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본론을 얘기하는 아라에 이박복 피디는 아라에 대한 걱정을 내다 버렸다. 눈이 초롱초롱하다 못해 은은한 광이 도는 게···. 어쩌면 나머지 세 명이 분량 걱정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든 출연자와 한 번씩 눈을 마주친 피디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출연자들에게 미션을 알려주었다.
"첫 번째 미션은, 마을로 들어가 여러분들이 지낼 집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주민분을 찾으시면 됩니다. 제한 시간은 20분. 제한 시간 안에 찾지 못하시면, 집이 아닌 곳에서 주무셔야 할 겁니다. 자, 그럼 시작!"
"예? 마을 주민들?"
"예?"
이박복 피디의 일방적인 설명이 끝나자, 강산과 이추성이 맹하게 반문했지만, 이박복 피디는 그들에게 대답하는 대신 휘슬을 불었다.
삐익!
"제한 시간, 20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