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62화 (62/163)

< 촬영 시작 (3) >

“헐.”

아라의 당황스러운 소리에 뒤따라 들어온 김은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안쪽을 보았다.

“와우.”

김은비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나왔다.

마을 회관 안쪽, 넓은 방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촬영 스태프들은 한쪽 벽 쪽에 서서 가운데 있는 마을 사람들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연예인인 자신보다 더 화려했다. 등장과 동시에 입구에서 멈추어 선 둘을 향해 박경배가 말했다.

“도착하신 순서대로 여기 돌림판을 돌리시면 됩니다.”

“이거요···?”

아라는 박경배의 말에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돌림판을 발견하긴 했지만, 선뜻 돌리고 싶지 않았다. 돌림판은 4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칸마다 단어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돌림판을 돌린 다음, 해당 단어에 해당하는 미션을 하시면 됩니다. 각 미션의 상대는 바로 여기 계신 마을 주민분들입니다. 첫 번째로 성공하시는 분께는 집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성공이라고 하면, 여러 번 도전도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이 한 번에 성공할 수도 있으니, 먼저 시작하는 게 좋겠죠? 아라씨, 도전하시겠습니까?”

박경배는 간단하게 룰을 설명한 후, 아라에게 참여 여부를 물었다. 아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했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외쳤다.

“도전!”

사실 단어로는 어떤 미션을 해야 할지 몰라 다른 사람을 먼저 하게 하려 했지만,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다면, 제일 처음 하는 게 더 나았다. 미션이 4가지나 있으니, 앞에 사람이 했던 걸 자신이 다시 고를 거라는 확신도 없으니.

“네. 알겠습니다. 그럼, 돌림판을 돌려주세요.”

두근두근.

돌림판 앞에선 아라는 심장이 빨리 뛰는 걸 느꼈다. 1등으로 오긴 했지만, 미션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라는 돌림판을 돌리기 전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힐끗 보았다. 하나같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해 팽나무 밑에서 봤을 때만 해도 순박하게 보이던 분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마을주민들의 의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것 같았다.

“도전!”

아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돌림판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돌렸다.

타라라라-

아라가 손을 떼자, 돌림판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어찌나 힘을 주고 세게 돌렸는지, 돌림판의 단어들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타닥, 타닥, 탁, 탁

얼마나 지났을까. 돌림판의 속도가 줄어들며 4가지 단어를 천천히 지나갔다.

노래.

힘.

미각.

촉각.

노래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어떤 형식의 미션이 될지 짐작조차 갸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촉각은 예상이 되었다. 분명 눈을 가리고 박스 안에 이상한 느낌의 물건들을 넣어 그것의 정체를 맞추라고 할 것이다.

‘으으. 그건 절대 싫어.’

손끝이 예민하기도 하거니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에 아라는 제발 저 촉감만 걸리지 않기를 바랬다. 촉감만 아니라면, 나머지 3단어에 마련된 미션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두 손을 꼭 잡은 그녀가 점점 느려지는 돌림판을 보며 간절히 빌 때였다.

탁!

드르륵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돌림판이 멈추고, 화살표가 어떠한 단어에 멈추었다.

“안돼!”

아라는 돌림판이 가리키는 단어를 보며 모으고 있던 양손을 풀어 머리를 싸맸다. 간절히 생각하면 이루어진다더니. 너무나 강하게 생각을 해서일까. 돌림판은 그녀가 그토록 안 된다고 중얼거렸던 그 단어가 적힌 구역에 멈추었다. 정말 작은 차이로 ‘노래’가 아닌 ‘촉각’에 당첨된 아라는 나라를 잃은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스!’

박경배는 극적으로 반응하는 아라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출연자 중 예능 경험이 유일하게 없는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돌림판만 한번 돌렸을 뿐인데도 쓰기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 제작진들, 준비해 주세요!”

웃음기 가득한 박경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방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 두 명이 박스가 올려진 테이블을 들고 와 세팅했다.

“피디님, 혹시 마음에 들지 않은 걸 고를 경우,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나요?”

윗부분만 동그랗게 뚫린 상자를 본 김은비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김은비도 아라처럼 비위가 약해 이런류의 미션에는 쥐약이었다.

“안됩니다!”

김은비의 표정은 간절했지만, 박경배는 냉정했다.

“본인이 하셔야 합니다!”

단어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무조건 본인이 해야 한다는 박경배의 말에 김은비와 아라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아이고. 괘안타. 내가 아까 봤는데, 재료들이···.”

“어르신, 안됩니다!”

김은비와 아라의 표정을 본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안쓰러운지 촉감 미션에서 사용될 재료들의 특징을 말하려고 했지만, 박경배가 있는 한 그건 불가능했다.

“...커흠. 아무튼, 괘안타.”

박경배에게 경고를 받은 어르신은 무안한 표정으로 연신 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연신 무서워 할 것 없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아요. 해보죠! 뭐!”

어르신의 걱정스러운 응원을 받은 아라는 바닥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으로 가 섰다. 하지만 당당한 표정과는 달리, 상자 앞에 선 아라의 손은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너무 무서우시면, 미션 실패를 외치시고 뒤로 가시면 됩니다.”

미션을 통해 재밌는 장면을 뽑아 내려던 거지, 출연자를 잡을 생각은 없었던 박경배가 아라에게 미션을 포기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출연자들이 괴로워하는, 도를 넘는 연출은 시청자들이 거북해했다. 출연자들이 즐겨야 시청자들도 몰입해서 즐길 수 있는 법. 자신이 말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아라를 보며, 박경배가 한 번 더 아라가 ‘촉감’ 미션에서 빠질 방법을 말해주려 할 때였다.

“오! 여기 다 계신다!”

“찾았냐? 오. 반갑습니다.”

뒤늦게 이추성과 강산이 현관과 이어진 복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 늦어.”

김은비는 자신이 따돌렸던 이추성과 강산의 등장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우리는 꼼꼼히 찾아보고 오느라 늦은 거야.”

김은비의 말에 이추성은 짐짓 태연한 척, 늦은 이유를 설명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산골에 있는 마을인 만큼, 마을의 지형이 여느 도시와 달리 복잡해 헤매다가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 온 것도, 담당 VJ가 진행을 위해 눈짓으로 알려주었기 때문.

“네네. 알겠습니다.”

김은비는 이추성의 설명에 설렁설렁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션을 앞두고, 박경배의 말에 고민하던 아라는 강산과 이추성의 등장에 생각을 멈추고 외쳤다.

“시작, 하시죠.”

**

“옴마야. 저게 뭐꼬.”

제작진들이 들고 오는 미션 재료에 꽃분이 할머니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감상평을 내뱉었다.

"어후. 저건 진짜 좀···. 아까 테스트 할 때.는 저런 거 없지 않았어요. 형님?"

"그러게."

분명 출연자들이 오기 전, 예행연습을 했을 때만 해도 박준혁의 말처럼 저런 건 없었다.

“으으. 저도 저건 못 만질 거 같은데···. 좀 힘드실 것 같은데요?”

아까 돌림판을 돌린 후의 반응을 보니 썩 좋지는 않았다. 좋기는커녕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 마을 팀이 이길 것 같아 씩 웃을 때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안대를 끼고 있던 아라의 고개가 우리 쪽으로 돌려졌다. 분명 안대를 껴서 눈빛이 보이지 않았건만, 기세가 가시화되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게. 이번 판은 어르신들이 이기겠네.”

안대를 뚫을 정도로 기세를 내뿜는 걸 보니 승부욕이 아주 대단한 거 같았다. 거기다 귀도 좋은 것 같고. 작게 말했는데도 들은 걸 보면 분명했다. 만일, 촉각이 아닌, 노래에 걸렸으면 아마 바로 미션을 통과했을지도. 하지만 아까 질색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번 판은 가능성이 없었다. 더욱이 상대가 벌레도 손으로 덥석덥석 잡는 마을 어르신들이라면.

하지만 아라의 기세를 느낀 박준혁은 말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형님, 전 지금 딱! 촉이 왔습니다!”

“촉?.”

“이번 판은 아라님이 이기십니다!”

“갑자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힘들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제작진이 들고나오는 미션 재료들을 보고 힘들 것 같다고 말한 지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이없다는 내 말에도 박준혁은 바뀐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네! 징그러운 걸 굉장히 싫어하신긴 한데, 한번 목표를 정하면 목표를 이룰 때까지 가시는 스타일이시라 무조건 성공할 겁니다.”

‘그러니 화이팅!’이라고 주먹까지 꽉 쥐며 자신의 최애를 응원하는 박준혁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

“네! 안 믿기시면, 내기하시겠습니까?”

“내기?”

내기라. 갑자기 내기하자는 박준혁에 나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네! 제가 지면 일주일 동안 형님네 집 청소! 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어차피 청소는 찹쌀이가 다 하고 다닌다. 평소에도 노란 부리로 틈만 나면 자신의 깃털을 정리하는 찹쌀이는, 우리 집에서 제일가는 깔끔이였다.

노을이와 찹쌀이, 그리고 포동이는 지금 집에서 포식 중이다. 촬영 때문에 밥을 제때 못 챙겨줄 것 같아 간식을 잔뜩 만들어 줬더니 촬영을 3일 정도 하고 와도 된다고 했다.

마을 회관으로 장소를 옮기며 남은 강정과 유과를 가져다줄 때는 찹쌀이 나에게 촬영을 한 달 동안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앞서 간식만 줄 때는 그래도 아쉬운 기색을 숨기며 말하다니, 더 맛있는 간식을 가져다주니, 나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찹쌀은 양반이었다. 나머지 정령들은 두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전통 간식에 정신이 팔려 나를 보지도 않았다. 한 달 동안 촬영을 하더라도, 집 청소는 걱정 말라며 가슴 깃을 부풀리는 찹쌀의 뒤로 노을과 포동이는, 유과에서 나온 튀밥을 입가에 잔뜩 묻힌 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정령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내가 물에 동시에 빠졌을 때, 어쩌면 내가 아닌 음식을 먼저 건질 수도 있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할 때였다.

“분명! 제 말이 맞을 겁니다! 어, 시작합니다.”

“우와아! 김찬명이! 잘해라!”

심 할아버지의, 막역지우이자, 빨간 장화를 늘 신고 다니는 김찬명 할아버지가 근엄한 표정으로 안대를 쓰고 아라의 옆에 섰다.

그들의 앞에는 똑같이 생긴 박스가 자리해 있었다. 참가자들의 준비를 확인한 박경배는 크게 게임의 룰을 성명했다.

“룰은 간단합니다! 저희 제작진은, 두 상자에 똑같은 물건을 넣을 겁니다. 물건은, 생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기회는 5번! 먼저 3번을 맞추시면 됩니다. 그럼 시작!”

삑!

박경배의 휘슬이 울리고, 앞면이 트인 상자 안에 첫 번째 아이템이 들어갔다.

꿈틀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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