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 시작 (4) >
삐익-!
휘슬이 울리고, 촉각 미션이 시작되었다.
“김찬명이! 바로 맞추라!”
“아라야! 화이팅!”
안대로 시각을 차단한 상태에서 시각과 후각은 평소보다 배는 더 민감해 졌다.
“후우···.”
아라는 옆에서 응원하는 목소리들을 애써 무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상자 입구에 겨우 손날만 넣은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쑤욱.
상자의 입구를 막고 있는 검은 천을 완전히 통과한 하얀 손은 앞면이 뚫려 있는 상자에 넣어진 터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주 잘 보였다.
“아라야! 좀 더 넣어야 해! 아직 안 닿았어!”
“그래! 김찬명이! 남자다! 퍼뜩 맞춰삐라! 살아있네!”
김은비는 아라를 응원하며 손을 문제가 있는 곳으로 집어넣으라고 독려했고, 산골 마을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빨간장화, 김찬명을 응원했다.
“어디 보자···. 보자보자, 이거 촉감이 익숙한데···.”
김찬명 할아버지는 휘슬소리가 울리자마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상자 안으로 손을 쑥 넣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문제를 찾아 손을 휘저었고, 아라가 손을 입구에만 걸쳐두고 고민하는 사이에 답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흡!”
경쟁상대의 여유로운 음성을 들은 아라는 눈을 질끔 감고 아직 문제에서 10cm는 떨어져 있는 손을 쑥 넣었다.
챱.
얼마 넣지 않아 아라의 손은 정체 모를 문제와 접촉하였다. 문제는 너무 빨리 넣은 탓에 손가락의 1/3 정도가 그것에 푹 넣어졌다는 것.
물컹.
“꺄아아아악!”
물컹거리고 미끈거리는 무언가와 접촉하자마자 아라는 참지 못하고 손을 상자에서 빼내었다. 손이 상자에서 나오는 속도는 넣어지던 속도 보다 10배는 빨라 보였다. 하지만 물체와 닿자마자 기겁한 그녀와 달리, 그녀의 상대인 김찬명 할아버지는 태연자약했다.
“음······. 미끈하고, 꿈틀거리고, 그러면서도 쪼매 단단한 거 보니까네···. 정답! 전복!”
문제와 닿고도 아무런 동요 없이 침착하게 손으로 물체를 더듬던 할아버지는, 바깥에 있는 손을 번쩍 들고 정답을 외쳤다.
“네! 맞습니다! 1:0! 다음 넣어주세요!”
박경배 피디는 빠르게 정답을 인정하고, 제작진들에게 눈짓에 다음 문제를 세팅하게 했다.
“자, 그럼 2번째 라운드! 시작!”
삐익-!
세팅 후 휘슬이 불었고, 아라와 김찬명 할아버지는 다시금 상자 안으로 손을 넣었다. 둘의 표정은 아주 대조적이었다.
**
“승자는···. 마을 대표, 김찬명 어르신!”
문제를 넣자마자 족족 맞추어 버리는 김찬명 할아버지 덕분에 아라의 미션 경기는 아주 빨리 끝났다. 그의 승리가 확정되자, 옆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크게 손뼉 치며 기뻐했다.
“으하하! 잘했다! 점마는 어릴 때부터 겁이 없더니 이런 데서 써먹네!”
“내 말이 그 말이다! 손끝에 감각도 좋다 하더구먼, 그걸 이렇게 써먹을 줄 누가 알았나!”
첫 미션을 하자마자 바로 얻은 승리에 마을 사람들은 연신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네네. 감사합니다. 고만하이소. 이게 뭐 그리 어렵다고. 에헴!”
마을 사람들의 환호에 김찬명 할아버지는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사람들을 진정 시키려 하다, 실패하자 바로 전략을 바꾸어 잘난 체를 했다. 그 결과, 할아버지를 향해 응원과 고생했다고 하던 말들이 뚝 끊겼다.
“아이고 부끄러버레이. 아까는 진중하니 괜찮더구먼, 왜 갑자기 저러고 앉았나. 마을 창피하게. 김찬명이, 거기서 고만 잘난체하고 퍼뜩 들어온나!”
이제는 칭찬은커녕 동네 부끄럽게 하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는 소리가 자자 했지만, 김찬명 할아버지는 하늘까지 솟아오른 어깨를 굳이 내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3번을 연달아 정답과 맞추었고, 그 시간이 라운드당 1분을 넘기가 않았다. 그야말로 촉각의 신(神)이라 할 수 있겠다.
“아라야, 괜찮아?”
“으으···.”
반면 출연진 쪽은 3번째 라운드부터는 어떻게 손을 제대로 넣지도 못한 아라를 위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럼 다음 분, 김은비 씨. 혹시 그 다음 분으로 넘길까요?”
박경배의 말에 아라를 위로하던 김은비가 고개를 번쩍 들고 절레절레 저었다. 필사적인 거부 의사였다.
“아뇨. 당연히 제가 해야죠. 피디님도 참.”
김은비는 눈꼬리를 접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박경배는 가지고 있는 질문 목록 중 하나를 골라 물었다.
“그럼 김은비 씨는 어떤 종목이 나오면 좋을 것
“어···. 저는, 노래만 빼만 다 좋을 것 같아요.”
“노래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다 잘하는데, 노래만 못 불러서···. 아시잖아요? 제 노래 실력?”
김은비의 말에 박경배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현재 너튜브 개인 채널에서 ‘장기자랑’을 주제로 하여 춤부터 시작해, 기인열전에 나올법한 소재들로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중 노래 파트가 가장 조회 수가 많았다. 조회 수가 많은 그 영상에는 댓글의 비율도 다른 영상들보다 높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운 김은비의 노래 실력 때문이었다.
“네. 도전을 외치시고 돌려주세요.”
다른 곳에서는 김은비의 노래를 악마의 노래라고 언급하며 한 소절만이라도 노래를 불러 달라 요청을 했었다. 도대체 ‘세상에서 제일 노래 못하는 사람’ 제목의 밈으로 돌아다니려면 얼마나 노래를 못해야 하나 궁금하다면서.
일반 사람 같았더라면, 부끄러워하며 거절했겠지만, 김은비는 개그우먼이었다. 사람들을 웃길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었다. 특히나 개그우먼의 경우 예능을 나가도 편집되기 일쑤인데, 그 노래만 했다 하면 항상 풀로 방송을 탔기에 이번에도 노래를 부를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터였다.
그런데 노래를 안 시킨다니?
“오-. 피디님, 밀당 좀 하시는데요? 오케이. 알았어요. 내가 최초로, 요청도 안 했는데 불러준다. 메인 피디님께 꼭 말씀드려야 해요? 제가 먼저 시청률을 챙겼다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김은비가 검지로 박경배를 콕콕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패널들의 성원에 마지못해 불렀건만. 모양새는 조금 빠지지만, 프로그램에 출연만 하면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준다는 이박복 피디를 생각해 노래를 한 소절 부를 생각이었다.
“괜찮습니다. 자, 돌림판을 돌려주세요!”
하지만 김은비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박경배는 시계를 흘끗거리며 김은비의 노래를 거절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10분 안에 강산과 이추성의 미션까지 보고, 이들 중 1등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른 진행이 필요하다.
“에···? 오. 아, 어···. 그럼, 돌리겠습니다. 도전.”
단호한 박경배의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김은비는 할 말을 잊고 말을 더듬거리더니 맥빠진 소리로 도전을 외치고는 돌림판을 돌렸다.
타라라.
김은비가 맥없이 돌린 돌림판은, 바로 전, 아라가 돌렸던 것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단어들이 뱅글뱅글 돌았다.
“내 분량···.”
김은비는 힘없이 돌아가는 돌림판을 보며 돌림판보다 힘없는 소리로 분량 걱정했다. 노래가 아니면 뭐든 재미가 없을 게 분명했다. 본래 예능이란, 잘하고, 완벽한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닌, 조금은 모자라고, 엉뚱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주는 것이었다. 노래가 걸릴 확률은 단 25%. 이미 박경배의 말에 이곳에서 노래할 기회는 없겠다는 생각에 팽배한 그녀의 눈은 꼭 동태 눈깔같이 텅 비어있었다.
“어어? 노래? 촉각?”
멍하게 돌림판이 멈추기만을 기다리던 김은비는 옆에서 제 차례라도 된 듯, 호들갑을 떠는 이추성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돌림판은 어느새 움직임을 거의 멈추고, 돌림판에 붙은 붉은 화살표는, 노래와 촉각, 이 두 단어 사이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오! 제발, 제발제발제발!!”
그 모습을 발견한 김은비는 바로 축 쳐져 있던 자세를 풀고 두 손을 같이 꼭 쥐며, 온갖 신들을 찾기 시작했다.
“오오! 하나님, 부처님, 신부님, 알라님, 성모마리아님.... 아무튼, 모든 힘 있으신 신님들! 노래로 선택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저래서 되겠나?”
“신이 뭐 저리 많노? 너무 많이 불러가 헷갈려서라도 못 해주겠다.”
그야말로 온갖 신을 다 찾는 김은비는, 정말 간절해 보였으나, 너무 많은 신을 부른 나머지 마을 어르신들의 걱정을 받았다.
“....제발!”
하지만 김은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은 두 손에 더 힘을 주며 간절하게 돌림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무릎은 꿇린 채였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간절해 보여서였을까.
틱.
빨간색 화살표는 드디어 줄다리기를 멈추고, 두 단어 중 한 가지를 선택했다.
그건 바로, ‘노래’.
“꺄아아아악!!! 앗싸! 노래다아아아!!!”
화살표가 ‘노래’를 가리키자마자, 눈도 깜빡이지 않고 화살표와 돌림판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김은비의 입에서 기쁨의 함상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열. 이게 되네?”
“휴.”
김은비와 같은 포즈로 돌림판의 결정을 지켜보던 이추성이 축하한다며 손뼉을 짝짝 쳤다. 반대로 그의 옆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돌림판을 보던 아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노래라면, 저 은비 언니가 절대 못 이기지.’
아라는 이미 김은비의 너튜브 채널에 초대되어 듀엣으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어, 김은비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김은비는 일부러 노래를 못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노래를 못했다. 그것도 엄청. 듀엣 노래 영상 촬영 날, 아라는 노래를 부르다 하도 웃어 며칠간은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자동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지기까지 했다.
“어디 한번, 가 보시죠!”
신의 안배였는지, 자신의 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운은 나의 편! 이라고 외친 김은비는 박경배 피디를 향해 레이저 같은 눈빛을 쏘며 도발했다.
“네. 그럼 노래 팀에서 선수 한 분 나와 주시겠어요?”
미션 대결의 상대는 출연자가 고를 수 없었다. 무슨 기준으로 팀이 나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은 흥의 민족. 어르신들이라면 더욱, 자신보다 노래를 못할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김은비는 돌림판을 돌리기 전과 다르게 활짝 웃으며 마을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허억.”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은비는 앉아있던 마을 사람 중 박경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어르신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타조의 깃을 뽑아 염색했는지 풍성한 깃털로 만들어진, 눈이 아릴 정도로 강렬한 색상의 핑크색 목도리. 마찬가지로 눈이 아릴 만큼 반짝반짝하는, 금색 스팽클 자켓. 그리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골동품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은갈치 색상의 정장 바지까지. 눈을 들어 올리니 보이는 깃털이 꽃인 페도라와 코털과 우스꽝스러운 코가 달린 선글라스까지 확인한 김은비는 개그우먼 인생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김은비에게 위기감을 선사한, 어르신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살짝 긁으며 말했다.
“내 노래 잘 못 하는데···. 퍼포먼스로 승부해 보지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