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말이다...(3) >
“마, 됐다. 시작하자.”
“아, 예, 옛!”
카리스마 넘치는 강 할머니의 말에 이추성은 저도 모르게 차려자세를 하며 대답했다. 조용해진 이추성을 확인한 박경배는 나머지 게임 룰을 설명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제한 시간은 1분. 1분 동안 더 많은 박을 깨뜨리시는 분이 이기는 겁니다. 그럼, 시작!”
삐익-!
간단한 게임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휘슬이 울렸다. 강 할머니의 말에 테이블 앞에 꼿꼿이 서서 박만 바라보던 이추성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박을 들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머리로 가져갔다.
빡!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박이 박살 났다.
“오우···. 보기만 해도 아픈데, 저분은 아무렇지도 않나 봐요. 역시, 격투기 선수 출신이라 이건가.”
이추성의 머리에 부딪혀 살벌하게 박살 나는 박에 박준혁이 자신의 머리가 아픈 듯 몸서리쳤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머리에 박을 내리치고 있는 이추성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오. 역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나이!”
파죽지세로 박을 처리하는 이추성의 모습에 강산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이추성은 격투기 선수 은퇴 후, 몇 권의 책을 냈는데, 책의 내용은 각각 ‘무적 명상법’, ‘절대 무적’ 이었다. 내용은 책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다시피, 어떻게 무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심오하다면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었다.
예를 들어, 이추성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이유는 바로, ‘무적 명상법’ 때문.
‘아픔이 느껴질 때, 이게 내 피부, 내 몸이라고 생각하면 진짜 아프지 않습니다.’
명상법이라곤 특별한 게 없었다. 이추성은 명상을 통해, 스스로 최면을 걸어 아프지 않게 만든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책들을 본 뒤 웃었지만, 글쎄. 지금 보니 정말로 이추성은 그 ‘무적 명상법’을 통달한 사람 같아 보였다.
“아뵤오옷!”
생각처럼 잘 박살 나는 박들에 흥이 났는지 이추성은 손잡이밖에 남지 않은 박을 들고 예의 포즈를 지어 보였다.
“아이고. 잘 따라 하네.”
어르신들은 이추성의 포즈에 손주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손뼉을 짝짝 치며 웃었다. 어르신들의 반응에 신이 난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강 할머니를 보려고 고개를 돌릴 때였다.
“헐···?”
강 할머니의 모습을 본 이추성은 제 눈을 의심했다. 박을 깨는 속도는 자신이 월등할 거라고 자신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차분한 표정으로 일정한 속도로 박을 박살 내는 강 할머니의 속도는 자신이 따라갈 수 없었다.
빡!빡!빡!빡!빡!
거의 1초도 안 되는 간격으로 박살 나는 박들을 보며 이추성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너무 일정한 음이라 제작진들이 흥을 위해 음악이라도 깐 줄 알았건만. 저게 전부 다 박을 깨뜨리는 소리였다니.
“질 수 없죠! 그럼 저도 손바닥으로!”
짧은 관찰을 통해 강 할머니가 손바닥을 이용해 가공할 속도로 박을 깬다는 걸 알게 된 이추성은 솥뚜껑만 한 손을 쫙 펴 둥그렇게 뒤집힌 박을 향해 내리쳤다.
“악!”
그리고는 내리친 손바닥을 붙잡고 어찌할 줄 몰라고 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손바닥을 내리치자마자 박이 깨지기는커녕 ‘둥!’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박 대신 이추성의 손바닥이 그 힘을 다시 고스란히 받은 것.
“어윽! 내 손-!”
“쯔쯔. 이게 뭐 쉬운 건 줄 아나? 아가, 다친다.”
팔짝거리며 손이 부러진 것 같다고 난리 치는 이추성을 강 할머니는 철이 채 들지 않는 아이처럼 부르며 주의를 주었다.
“아가요···?”
마흔을 넘은 나이에 ‘아가’라는 소리를 들은 이추성이 방방 뛰다 말고 멈춰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니가 아가지 뭐꼬. 지 손 뿌라지는지도 모르고 일단 하고 보는데, 아가들이랑 똑같다.”
“오 그래요?”
강 할머니가 자신을 아가라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된 이추성은 다시 한번 손바닥을 펼쳐 박을 내려쳤다.
“아야!”
“으이고. 진짜 아네. 아.”
“아?”
“아가라꼬. 아.”
‘아’가 ‘아기’의 사투리인 걸 알게 된 이추성은 ‘아가래 흐흐.’라며 철없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우리 순돌이같네.”
그런 이추성의 행동에 강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혀를 차면서도 할머니는 규칙적으로 박을 부수고 있었다. 분명 이추성은 강 할머니처럼 하고도 저렇게 손을 붙잡고 난리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추성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듯, 다른 걸 물었다.
“순돌이요?”
삐익!
이추성의 질문과 동시에 종료 휘슬이 울렸다.
“자! 시간 경과 하였습니다. 두 분 모두 책상에서 손을 떼 주세요.”
박경배는 스톱워치를 보며 말하고 제작진들에게 눈짓했다. 혹시라도 휘슬이 불린 후에 깨진 박은 카운트에서 치지 않을 테니 빼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박경배의 걱정과는 달리, 참가자들은 벌써 테이블에서 손을 뗀 체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1분 동안 스톱워치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박경배는 뒤늦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 할머니와 이추성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순돌이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할매, 그러니까, 순돌이가 강아지라고요?”
“어. 우리 강아지다.”
“...그, 혹시, 종이 막 시베리안 허스키 이런 거 맞죠? 아니면 도베르만 이라거나...”
“뭐라카노? 우리 순돌이는 시고르자브종이다!”
“시고르자브... 뭐요?”
“아이고. 젊은아가 이런 것도 모리나. 시골 잡종이라고.”
“예?”
순돌이가 카리스마 넘치는 시베리안 허스키나 도베르만 같은 유서깊은 혈통의 강아지가 아닌, 시골 똥개라는 말에 이추성은 나라라도 잃은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할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순돌이라는 강아지, 저를 닮았다면 분명히 혈통 있는! 아주 카리스마 넘치는 강아지일 게 분명합니다. 맞죠? 그쵸?”
자신이 시골 똥개와 비슷할 수 없다며 이추성이 머리를 흔들며 부정했다. 하지만 영혼이 안드로메다로 가기 직전인 그와 달리 강 할머니는 아주 평온했다.
“아나. 봐봐라.”
‘복덩이 멧돼지’라는 자주색 자수가 박힌 꽃분홍색 조끼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강 할머니는 핸드폰을 꺼내 몇 번 조작하더니, 익숙한 말투로 스크린 화면에 있는 순돌이에 대해 설명했다.
“이름, 강순돌. 나이, 2살. 종은, 시고르자브종. 어디서 왔냐고? 야 출신은 천국이다. 그게 아니면 우리 순돌이 미모를 설명할 길이 없는 거라.”
“...시고르자브종이라면서요...”
시큰둥하던 아까와는 달리, 눈을 반짝이며 순돌이에 대해 설명하는 강 할머니는 ‘팔불출’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이 가능했다.
“아이고, 야가 시골 잡종 무시하네. 얘네가 제일 튼튼하다. 그리고 얼마나 잘 뛰어댕기는데. 니 아까 막 아픈데도 박 쳤제? 니랑 똑같다. 통뼈다 통뼈.”
“통뼈라고요? 그럼 인정이죠. 자세히 보니까 쌍꺼풀도 있는 게 진짜 미남이네요. 저랑 닮은 거 인정.”
“그제? 낸중에 내가 보여줄게. 사진 찍어도 된다.”
“오? 정말요? 기대하겠습니다.”
어쩌다보니 연예인이 강아지와 사진 찍는 걸 고대하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게 된 박경배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박복 피디님의 예상이 맞았다. 출연자들도 출연자이지만, 무엇보다 출연자들과 마을 사람들과의 티키타카가 백미였다.
‘이거 진짜 괜찮겠는데?’
여느 스펙터클한 예능과는 달리, 소소한 시골 마을 사람들과의 나날을 촬영할 계획이라 그렇게 많은 시청자의 이목은 끌지 못하겠지만, 힐링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는 100% 먹힐 것이 분명했다.
“자, 두분 이야기 다 나누셨으면,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흐뭇한 미소를 유지한 박경배는 아직도 강 할머니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오손도손 이야기 중인 두 명을 향해 외쳤다.
“어? 아. 맞다. 저희 경기 중이었죠.”
아가같다는 말부터 정신을 어디로 빼놓았는지 박에 관심을 두지 않던 이추성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네. 승자는, 준비한 박을 모두 깬 강 할머니!”
짝짝짝.
승자가 발표되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을 절반밖에 깨지 못한 이추성에 비하면, 아주 놀라울 만한 결과지만, 마을 사람들의 박수 소리는 앞선 장 이장님 때와는 달리, 현저히 적었다. 원인은 바로 할아버지들. 할아버지들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는, 마지못해 치는 기색이 역력했다.
“...? 뭐꼬. 제대로 안 치나?”
마을 사람들, 특히나 강 할머니에게 시달렸던 심 할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할아버지가 치는 약하디약한 박수에 강 할머니가 서슬 퍼런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강 할머니의 눈빛을 마주한 할아버지들은 심드렁하게 손가락으로 박수를 치다 말고, 수령을 대하는 인민들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개보다 더 빠른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 깡패! 내는 강 할매 니가 이길 줄 벌써 알았다!”
“맞다. 맞다. 다 알아서 그렇게 재미가 없더라.”
“우리 마을 천하장사를 누가 이길끼고? 축하한다!!”
하지만 열렬한 박수와는 달리, 할아버지들의 축하 말은 저 가슴 깊숙이에서 우러나온 듯,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것이었다.
“,,,뭐라꼬?”
강 할머니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마지막, 심 할아버지의 멘트에 정신을 차리곤 그 무리로 뛰어들었다.
“아이고마! 이 할매가 내 죽인다!”
“와, 깡패라메. 깡패한테 함 맞아봐라!”
“깡패 취소! 취소!”
심 할아버지를 필두로 강 할머니에게 한 번씩 응징을 당한 어르신들이 ‘아이고, 아이고.’를 외쳤다.
“어이쿠. 어르신, 고정하세요.”
“할머니, 잠시만요, 아얏!”
강산과 이추성이 그 모습을 보고 강 할머니를 말리려 했지만, 도리어 눈먼 팔에 한대 얻어맞고는 나가떨어졌다. 안절부절못하며 놀라는 출연자와, 제작진들과 달리, 마을 사람들은 평온했다.
“참... 어르신들은 그렇게 당하시고도 저러고 싶으실까요?”
박준혁이 벽에 기댄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르신들은 저게 놀이야.”
나 또한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이고! 나 죽는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타이밍 좋게 심 할아버지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괜찮은 거 맞죠...?”
보다못한 박경배도 나에게 다가와 진짜 괜찮은지를 물었다.
“어후. 아무렴요. 진행 계속하셔도 됩니다. 아주 사이가 좋으신 분들이십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촬영을 진행해도 무방하다는 내 말에, 박경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로 돌아가, 출연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그럼 자리 이동하겠습니다.”
“예? 아직 저 게임 안 했는데요?”
갑작스레 자리를 옮긴다는 소리에, 아직까지 돌림판을 만지지도 못한 강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피디님, 아직까지 한 명도 못 이겼는데, 1등은 어떻게 가리나요?”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승부욕으로 이글거렸던 아라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휘권을 얻어 우리 밭의 작물을 장히도 먹고 싶은 듯했다. 김은비와 이추성의 표정도 앞선 두 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출연자들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본 박경배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희가 다음 코스를 준비했습니다! 그건 바로! 멧돼지와 함께 춤을!”
어딘가 굉장히 신 나는 표정의 박경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출연자들은 아연 질색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에? 뭐라고요? 멧돼지요?????”
하지만 출연자들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박경배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놔라! 아, 아프다고! 악!”
그의 뒤로 배경음악처럼 아직까지 강 할머니와 전투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출연자들의 미래를 점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