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1) >
“에? 뭐라고요? 멧돼지요?????”
출연자들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마을 회관 안에 울려 퍼졌다.
“네. 멧돼지입니다.”
경악한 출연자들과 달리, 박경배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다.
“아니 멧돼지라니요. 저 숲 속에 사는 멧돼지 말씀하시는 거 맞아요?”
“네. 맞습니다.”
믿기지않다는 눈빛으로 강산이 다시금 제가 아는 멧돼지가 맞느냐고 물었지만, 박경배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벌써 세 번이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 멧돼지가 맞다는 확답을 받은 출연자들은 서로 말도 안 된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침 질질 흘리고, 콧김 슝슝 뿜는 그... 멧돼지?”
“오우. 멧돼지라니. 드디어 제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네요.”
아, 한 명만 제외하고.
이추성은 멧돼지라는 말을 듣자마자 턱을 앞으로 내밀며 자신감을 보였다. 멧돼지 따위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제압할 수 있다며,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옆에 앉아있던 마을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아이고마. 그렇게 티셔츠 안 걷어도 되는데.”
“우리 마을 멧돼지는 좀 특별하다. 안 그러나?”
“그렇지. 얼마나 순하고 귀여운데. 한번 보면 매력이 철철 넘친다.”
멧돼지는 맞지만, 순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출연자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할머니, 진짜에요?”
이추성이 어느새 할아버지들과의 전투를 마치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테이블로 돌아온 강 할머니에게 물었다.
“하모. 여기 내 조끼 안 보이나?”
강 할머니는 어딘가 뿌듯한 표정으로 이추성에게 조끼에 있는 자수를 가리켰다.
[복덩이 멧돼지♥]
분홍색 조끼에 자주 색실로 자수된 문구에 이추성은 호들갑을 떨며 한 손을 입 앞으로 가져다 댔다.
“헉. 하트까지 있어!”
“하모. 우리 복덩이 멧돼지가 얼마나 착한 줄 아나? 내가 볼 때 우리 멧돼지는 천재다. 안 그러나 한울아?”
강 할머니는 이추성에게 멧돼지를 자랑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인자한 표정이 꼭 손주를 자랑하는 것 같았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예쁜 손주의 칭찬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 마음이랄까. 할머니의 의도를 알아챈 나는 두 팔을 올려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션에 참가요원들로 저쪽 안에 있는 어르신들과 달리 박준혁과 나는 그 외 인원으로 벽 쪽에 붙어있어 목소리를 내봤자, 방송에 실리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어 카메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진행을 원활하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우와, 근데 저분은 누구세요? 피부가 엄청 좋으시네. 혹시 저분도 여기 마을 주민이신 거에요?”
김은비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강 할머니의 질문으로 주목되었던 이목이 더욱 집중되었다. 이추성과 달리 멧돼지의 위험성에 관해 토론하던 출연자들까지 나를 보게 된 것.
“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굉장히 중요한 분이 될 겁니다.”
박경배는 나를 향해 씩 웃더니 출연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했다.
“예? 왜요?”
당연히 출연자들은 의문을 표했다. 나 같아도 그럴 것이다. 스태프들과 같이 공기같이 조용히 있던 사람보고 갑자기 중요해진다니. 특히나 멧돼지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던 터라 그 정도는 더했다.
“멧돼지의 주인분이시거든요.”
박경배는 그런 출연자들의 부담스럽지 않은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한 뒤 어깨를 으쓱이며 이제 더는 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제스처를 보낸 그의 모습에 출연자들의 시선은 내게 몰렸다. 4명 모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느냐는, 정말로 강 할머니의 말대로 복덩이냐는 질문을 눈빛으로 전했다.
그들의 간절함에 나는 대답했다.
“어... 그렇습니다. 아주 착해요.”
**
마을회관을 나와, 멧돼지가 있는 밭으로 이동하기 전, 출연자들은 게임 탓에 흐트러진 모습을 정돈하기 위해 각자의 스타일리스트에게 얼굴을 맡겼다.
“안녕하세요. 강산입니다.”
“네. 김한울입니다.”
“듣자하니, 멧돼지의 주인이라고 하시던데... 다른 게 아니라 혹시 다음 미션에대한 힌트라도 조금 알 수 있을까 해서...”
강산의 말에 각자의 스탭들과 같이 있던 출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어떻게, 이동하면서 대화 나누실까요?”
다른 출연자들의 눈빛을 본 강산은 내게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는 제안을 했다. TV에서는 허당 캐릭터를 도맡아 실제 성격도 비슷할 줄 알았는데, 강산은 의외로 진중했고, 또한 매너가 좋았다. 나 또한 눈에서 레이저라도 뿜을 듯 뚫어지게 쳐다보는 출연자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기에, 그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아까 별다른 활약을 못해서 말입니다...”
출연자들과 조금 거리가 벌어지자, 강산은 겸연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게 예능은 솔직히 말하면 전쟁이거든요. 어떤 프로그램도 똑같지만, 분량싸움인 거죠.”
참... 고향에 돌아와 노을과 찹쌀, 그리고 포동이를 보며 마음 편하게 농사를 짓고 있어 잠시 잊고 있었다. 일터에서 살아남기란 전쟁과 비슷했다. 강산의 말을 이해한 나는 넌지시 힌트를 주기로 했다.
“멧돼지는, 돼지죠.”
“...네?”
강산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문을 표했지만, 더는 말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순진한 눈을 한 임승훈이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
“뭐하세요? 설마... 막 힌트 같은 거 주신 거 아니죠?”
임승훈은 질문하면서 빠른 속도로 뒤쪽을 향해 곁눈질했다.
“..헉! 아니? 아니! 한 적 없지. 아유 참. 그럼 사장님, 이따 또 얘기합시다!”
임승훈의 곁눈질이 가리키는 방향에 있는 매의 눈을 한 박경배를 발견한 강산이 괜스레 오버액션을하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사장님, 저희가 부탁드렸던 대로 절.대. 출연자들에게 힌트를 주시면 안 됩니다.”
“어... 도와주는 것도 안되나요? 아까는..”
임승훈의 주의에 내 옆에 있던 박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전 미션에서 어르신들의 훈수가 넘쳐났던 걸 회상하는 듯했다.
“아, 어르신들은 상관없습니다.”
“...?”
“저희 메인 피디님께서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하셔서요. 그리고 설득하기도 좀...”
“하긴. 그렇죠. 아까 마지막 미션에서 박 깬 할머니 보셨죠? 설득하다가 수틀리면...”
스윽.
박준혁은 다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날을 가로로 세워 자신의 목을 그어 보였다.
꿀꺽.
“네. 명심하겠습니다.”
박준혁과 눈빛을 교환한 임승훈이 침을 꼴깍 삼키고는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분명, 둘은 진지한데 왜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덤앤더머가 연상되는 건 어떤 이유일까? 하는 행동들이 비슷한 그들의 모습에 내가 고개를 저을 때였다.
“꾸엥!”
미리 촬영장소로 점찍은 곳에서 지석호와 같이 있던 멧돼지가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귀엽게 울었다.
**
“저, 저, 저, 저, 저..!”
“메, 메, 멧..!”
꼬르르.
임승훈의 제지 때문에 마을 회관 앞에서 기다렸다가 다른 출연자와 함께 온 강산을 필두로 남자 출연자 두 명의 기절할듯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어머, 쟤 지금 리본 단 거야? 어머머! 복돼지라고 쓰여 있어!”
그에반만 김은비는 처음에는 조금 놀라는 것 같더니, 곧 적응하며 멧돼지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참고로 멧돼지는 박경배와 임승훈이 사전답사를 할 때 그 모습 그대로 온몸에 핑크색 리본을 두르고 있었다.
“네가 그 아이구나. 생각보다 귀엽게 생겼네?”
아라는 김은비보다 한술 더 떠 멧돼지의 앞까지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멧돼지를 쓰다듬는 손이 조금 떨리긴 했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꾸엥!”
자신을 향한 칭찬을 알아들은 멧돼지는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 그, 그, 메,멧,돼지가 조, 좋아하네요”
중요한건 아라를 지척에서 본 지석호가 덜덜 떤다는 점이었다. 지석호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멧돼지의 목욕 담당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무서워하더니 지금은 친해져 멧돼지의 개인기까지 만들어 내게 보여줬었다.
“쓰읍. 너무 떠시는데... 다른 사람으로 갈까요?”
“조금만 더 보지.”
사시나무 떨듯 아라에게 대답하는 지석호의 모습에 박경배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미리 이곳에 와 지석호의 말대로 개인기를 선보이는 장면을 예고 영상으로 찍었던 이박복 메인 피디가 고개를 저었다.
“동의합니다.”
지석호가 오늘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만약 지금 여기서 교체를 말하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요 몇 주 동안 밭을 개간한다고 멧돼지와 온종일 붙어있던 것도 지석호, 멧돼지의 개인기를 만든 것도 지석호였다.
“오케이. 어차피 편집해야 하는 건데, 한울 씨 말대로 하지.”
이박복 피디는 이곳에 도착해 신인이라고는 하지만, 최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라에게도 꿈쩍하지 않고, 촬영한다는 기쁨에 들떠 있는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홀로 달관한 듯 모든 상황을 관망하는 한울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한울이 신비 농장과 멧돼지의 주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자신의 보는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그런 자신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저 청년의 말을 들어서 안 좋을게 없을 거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진행하지. 출연자 여러분, 이쪽으로 와 주시죠.”
몇마디 대화로 의사를 결정한 이박복 피디가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있는 출연자들을 불러모았다.
“어, 저...피디님, 전 여기 있겠습니다!”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하지만 멧돼지의 모습을 보자마자 밭 가장자리로 도망갔던 두 명의 남자는 이박복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에이. 멧돼지는 한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다면서요?”
누가봐도 겁에 잔뜩 먹은 그들의 모습에 김은비가 놀려댔다. 그녀의 이죽거림에 이추성이 반응했다.
“당연하지! 제압 당연히 가능하지! 내가 여기 있으려는 이유는, 호옥-시나 멧돼지가 흥분해서 밭을 탈출할 때, 막으려고!”
이추성은 셔츠를 둘둘 걷어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보이는 팔뚝을 보이며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멧돼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아라가 이박복 피디에게 말했다.
“저희 먼저 시작하죠. 룰 설명해 주세요. 피디님.”
차분하게 룰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 아라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꼭 1등을 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네. 그럼 이번 미션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꿀꺽.
이곳으로 오기 전, 박경배에게서 ‘멧돼지와 함께 춤을!’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아라와 김은비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아무리 순한 멧돼지라고 해도, 멧돼지는 멧돼지. 긴장되는 것은 당연했다.
예상한 반응을 보이는 출연자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이박복은 손가락을 튕기며 멧돼지의 리본을 꽉 잡고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있던 지석호에게 말했다.
“지석호씨, 시범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