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2) >
“지석호씨, 시범 부탁합니다!”
옆에서 멧돼지와 함께 뻘쭘하게 서 있던 지석호는 이박복 피디의 말에 반색하며 멧돼지와 아이 콘택트를 시작했다.
“핑크, 이제 나와 연습했던 걸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거야. 준비됐지?”
“꾸엥!”
핑크는 멧돼지의 이름이다. 방송도 타게 됐겠다, 언제까지 멧돼지라고 부를 수 없지 않냐는 지석호의 의견에 박준혁과 지석호, 그리고 나는 집 앞마당 평상에 둘러앉아 멧돼지를 앞에 두고 이름을 고민했었다.
노을이와 찹쌀, 그리고 포동이의 이름을 지을 때는 이런 고민도 없이 지었는데, 과연 두 사람의 머리가 더 생기니 그만큼 고민도 배로 늘어났다.
‘사장님, 썬더 어때요? 썬더!’
‘멧돼지한테 썬더가 뭐냐?’
‘아니, 봐봐요. 얘 이 삐쭉삐쭉한 털을···. 아닌가?’
‘어디가 삐쭉거려! 요새 강 할머니가 얘 털 부드럽게 해보겠다고 울 샴푸까지 써서 엄청 부드러워졌구먼.’
‘꾸엥!’
막내인 지석호는 멧돼지의 삐죽삐죽한 털을 보며 멋진 번개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제안했지만, 멧돼지의 털은 이미 울 샴푸로 감겨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완전히 밍크 털처럼 부드러운 건 아니지만 뭐랄까, 뻣뻣함 속에 부드러움이랄까. 왜인지 중독적인 멧돼지의 털을 슥슥 쓰다듬을 때였다.
‘형님, 저팔계 어때요? 어? 멧돼지인데 막 우리 말도 잘 알아듣고, 개인기도 할 줄 알고. 이 정도면 보통 멧돼지가 아니니까, 저팔계!’
‘에이···. 저팔계가 뭐예요?’
‘뭐야? 너 치키차카초코초코초 몰라?’
‘그게 뭔데요? 아아 대학교 응원가 말하는 거죠? 그 정도는 알죠!’
‘아니, 그게 아니라···. 어휴. 패스하죠. 형님.’
박준혁도 지석호에 이어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의견을 꺼냈지만, 저팔계를 모르는 막내 때문에 기각. 치키차카초코초코초를 대학교 응원가로 착각을 하다니.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나이에서도 세대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음···. 그럼, 브라운 어때?’
‘네?’
‘뭐라고요? 사장님?’
‘쟤 털 색이 갈색이니까, 브라운. 괜찮지 않아?’
‘아니 그게 무슨 얼굴 보고 별명 짓는 것 같은 말씀입니까? 자고로 저희 어머니가, 사람을 얼굴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털이 갈색이어서 브라운. 이 얼마나 외우기 쉽고 직관적이 이름인가. 노을과 찹쌀의 이름을 지을 때도 같은 방법을 썼던 나는 ‘타도! 외모지상주의!’를 외치고 있는 박준혁의 시선을 피해 막내에게 눈길을 돌렸다. 내 시선을 받은 막내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그···. 사장님, 브라운 말고, 핑크 어때요 핑크?’
‘핑크?’
방금 전만 해도 썬더 같은 강한 이름을 짓더니 갑자기 핑크라니. 멧돼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에 눈썹을 올렸다.
‘꾸엥?’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멧돼지는 핑크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핑크?’
‘꾸엥!’
혹시나 해 다시 불러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멧돼지는 핑크가 제 이름이라도 되는 듯 찹쌀이가 병아리를 돌보는 곳에서 기웃거리다 우리 앞으로 왔다.
‘뭐지? 지금 얘 핑크가 좋다고 한 거 맞죠?’
‘글쎄···.’
‘왜 이럴까요?’
지석호와 내가 겉모습과는 정말 하나도 어울리지 않은 단어에 반응하는 멧돼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아···! 맞다! 그랬었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박준혁이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반쯤 열린 대문이 활짝 열리며 강 할머니가 등장했다.
‘아이고. 우리 핑크, 여기 있었나? 이리 와라. 밥 묵자.’
‘꾸에에엥!’
시원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온 강 할머니의 손에는 양푼이 하나 들려있었는데, 양푼을 발견한 멧돼지는 여태껏 들었던 울음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울음소리를 내며 할머니에게로 뛰어갔다.
두두두두-
‘아이고. 고만 뛰어라. 살 빠진다. 지금도 봐라. 니네 우리 핑크한테 일 너무 시키지 마라. 알았제?’
‘꾸엥’
‘아니라꼬? 그래그래. 우리 착한 핑크. 밥 묵자.’
강 할머니는 무서운 속도로 뛰어가는 멧돼지를 무슨 동네 똥강아지 대하듯 쓰다듬었다.
‘멧돼지···. 살 빠졌냐?’
누가 봐도 통통한 멧돼지를 보며 볼살이 빠진 것 같다니 – 원래 멧돼지는 볼살이 없다 – 몸통이 작아진 것 같다니 하는 강 할머니의 평에 박준혁이 멍한 표정으로 지석호에게 물었다.
‘아뇨. 육시육끼 먹이는데요.’
출근을 멧돼지와 고라니의 밥을 챙겨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지석호가 박준혁과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멧돼지는 어느새 강 할머니가 가지고 온 음식을 다 먹고는 그 큰 머리를 할머니의 다리에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와이고마. 예쁜 짓 하는 거 봐라. 우리 큰 순돌이 같네.’
‘꾸에엥!’
‘그래그래. 니도 예쁘다. 지난번에 내 고랑에 빠질 뻔한 거 구해줘서 고맙데이?’
‘꾸엥!’
구해줘서 고맙다는 강 할머니의 말에 멧돼지는 목에 달린 리본이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
‘아아. 밤에 할머니가 밖에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서 고랑에 빠질 뻔했는데···!’
‘했는데?’
‘멧돼지가 달려와서 받쳐줬대.’
‘네···?’
지석호는 박준혁의 설명에 사실이 맞냐며 나를 쳐다보았다.
끄덕끄덕.
믿기지 않겠지만, 박준혁의 말은 사실이었다. 핑크색 리본을 두르고,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난 뒤로 멧돼지는 비닐하우스뿐만 아니라, 마을 경비원을 자처하고 있었다.
‘...다 뭇나? 내가 내일 또 주께. 한울이 말 잘 듣고 있어라? 알았제? 핑크야?’
‘꾸엥!’
‘저기···. 할머니, 그러니까 핑크가 쟤 이름인 거죠?’
‘어! 몰랐나? 우리 다 그렇게 부르는데?’
‘어, 언제부터요?’
‘우리 핑크는 특별한 앤데 우예 그냥 멧돼지라 부르노. 내가 이 핑크색 리본 딱 달아준 그때부터 핑크라고 불렀제. 내사 이렇게 꽃분홍색이 잘 어울리는 아는 첨 봤다 아이가. 그체 핑크야?’
‘아···.’
그러니까, 뒷북이라는 소리였다.
‘니네는 그렇게 생각 안 하나?’
“핑크! 물어와!”
“꾸엥!”
“핑크!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꾸에엥!”
그렇게 핑크가 된 멧돼지는 지석호의 말에 따라 착착 움직였다.
“핑크! 사과 찾아와!”
“꾸···.”
“핑크! 먹으면 안 돼!”
물론, 100% 완벽한 건 아니었다.
“푸하핫 사과 반은 먹고 줬어!”
“히히히 아니 이름은 또 어떻고! 저 등치에 핑크래 으하하하!”
“어머 저 리본 팔랑거리는 거 봐봐”
“좋았어! 클로즈업! 핑크 따라가!”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핑크의 그 모습에 출연자들과 제작진들은 배를 잡고 뒤집어졌다.
“핑크! 이제 이리와! 제자리. 잘했어.”
지석호는 마지막 개인기를 성공한 핑크가 가까이 오자, 미리 준비한 무언가를 건넸다.
“꾸엥!”
핑크는 망설임 없이 지석호의 손에 있는 간식을 먹었다.
“그게 뭐예요?”
눈이 반달이 되도록 맛있게 간식을 먹는 핑크의 모습에 밭에 도착한 이후부터 쭉 멧돼지에게 눈을 떼지 않았던 아라가 물었다.
“오이에요.”
“오이??”
“네. 실컷 뛰어놀면 목말라서 그런지 오이를 좋아하더라고요.”
“갑자기 오이 먹고 싶네···.”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면 식욕이 돋는다고 했던가. 오이를 마치 세상에서 몇 개 없는 진미를 먹는 듯 황홀한 표정으로 먹는 핑크의 모습에 강산이 침을 꼴깍 삼켰다. 출연자들의 시선이 모두 핑크에게로 향한 걸 확인한 이박복이 외쳤다.
“이곳의 미션은 바로!”
미션 이야기가 나오자, 출연자들이 고개를 홱 돌렸다.
“바로?”
“지석호씨가 보여주신···.”
“에이. 그건 아니죠.”
이박복 피디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출연자 측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우우우! 아무리 핑크가 귀여워도 그건 안된다!”
“맞다!”
이추성이 선창하자, 강산이 힘을 보탰다. 하지만 아무리 모두가 같은 말을 할 때도 한 명쯤은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
“...해볼 만하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멧돼지만을 보던 아라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피디님, 여기서 이기면 어떤 혜택이 있나요?”
김은비 또한 아라의 옆에서 진지하게 물었다. 계속 고개를 저으며 안된다고 하는 저쪽 무리와는 달리, 진지하게 미션에 임하려는 아라와 김은비에게 만족한 이박복 피디가 그 질문만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 미션에서 이긴 분께는, 마을 회관에서의 미션 1등 혜택이었던 집 열쇠를 드림과 동시에!”
“...”
출연자 중 아무도 마을 사람들을 이기지 못해 아직까지 제작진들의 손에 있는 키를 언급한 이박복은, 눈을 돌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출연자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아라를 조금 더 길게 주시한 그는 의미심장한 어투로 이번 미션의 혜택을 말했다.
“소고기! 돼지고기! 혹은 작물! 중 저녁 메뉴를 선택할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소고기??”
“한우! 투 뿔! 시원하게 쏩니다!”
“우오오오!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저 멀리 있던 이추성과 강산이 서둘러 뛰어와 피디 앞에 섰다. 아까와는 달리 소고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기세였다.
“간단합니다. 멧돼지에게 선택을 받으시는 분께, 모든 혜택이 돌아갈 예정입니다. 어떤 방법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멧돼지의 선택을 받으시면 됩니다!”
“멧돼지의 마음을?”
“아까 저분은 쉽게 하던데···.”
“오! 오케이!”
“...”
이박복 피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생각에 빠졌던 출연자들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뿔뿔이 흩어졌다.
“어? 아라씨는 안 가시나요?”
“전···. 이미 준비됐습니다.”
한 명만 제외하고.
**
“우쭈쭈 사과 여기 있지?”
“아까 먹었는데 또 먹겠냐? 우쭈쭈 이리 온. 아저씨가 맛있는 거 가져왔다.”
“어후. 선배님, 징그러워요. 우쭈쭈. 이리 온. 누나가 더 맛있는 거 가져왔지요~”
흩어졌던 출연자들은 어디서 났는지 하나같이 먹을 걸 손에 들고 멧돼지를 유혹하고 있었다.
“꾸에에에엥?!”
핑크는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관심에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좋아 죽겠다는 표현이었다.
쉬익.쉬익.
얼마나 흥분했는지, 핑크는 어느새 콧김까지 내뿜으며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핑크, 앉아!”
지석호는 부릉부릉하고 있는 핑크를 진정시키기 위해 좀 전에 핑크가 반을 먹고 주었던 사과를 꺼냈다.
“꾸엥!”
사과가 눈앞에 나타나자, 핑크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출연자분들은 저기 하얀 선 뒤에 서주시고, 지석호씨는 핑크 데리고 대기해 부탁드립니다.”
“꾸엥!”
신비농장 표 사과를 먹어 기분이 좋아진 핑크가 지석호를 따라 출발선에 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기권하셔도 됩니다. 기권하시면, 저희 제작진이 저 숲속에 특별히 마련한 곳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숲이 되게 이쁘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아, 밤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들 준비해오신 것들 꺼내셨으면······. 시작!”
삐익-!
휘슬이 울리고, 핑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