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후 (1) >
[핑크야! 이리와!]
[핑크야! 여기야 여기! 이게 더 맛있어!]
“참···. 멧돼지가 리본도 멨는데 뭐가 무섭다고. 나 같았으면 어? 처음부터 바로 했지.”
오랜만에 주말 여유가 생긴 수빈은 소파 밑에 기대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새로 나온 예능 ‘시골 탐사대’를 보는 중이었다.
[어어어? 뭐야? 왜 그쪽으로 가!]
화면에는 멧돼지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4명의 연예인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어수룩한 부분이 웃음을 자아냈다.
“확실히. 회사 사람들이 보라고 하는 건 다 재밌단 말이지.”
요즘 뜨는 드라마나 예능, 혹은 너튜브 프로그램을 알고 싶다면 회사 점심시간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다들 같은 처지라, 근무 날에는 어디 갈 생각도 못 하고 집으로 들어가 TV나 영상만 주구장창 보니까. 그렇게 밤새 프로그램을 본 뒤, 회사 사람들과 나누곤 했다. 자신의 영업에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뿌듯해하며 후기를 나누는 게 직장을 다니는 낙 중 하나였다. ‘시골 탐사대’의 추천도 같은 맥락이었다. 수빈과 친한 동료 직원이 방송 후기를 같이 나누고 싶으니 꼭 보라고 난리를 쳐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아까 1화에서 잠깐 나왔던 남자 두 명이 눈에 익는데···.”
수빈이 지금 보는 건 2화. 다행히 자신이 구독하는 OTT 해당 방송을 취급해 1화부터 볼 수 있었다. 출연자들의 조합도 웃겼지만, 미션들을 마을 사람들과 같이하는데 전부 진 게 더 웃겼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미션을 할 때는 연예인들보다 마을 사람들에게 더 눈이 갔다. 특히 이추성과 대결한 마지막 할머니가 가장 눈길이 갔는데, 다른 미션들은 솔직히 제가 더 잘할 자신이 있었지만, 표주박을 1초마다 하나씩 깨는 할머니의 모습은 정말로 입을 떡 벌리고 볼 만큼 놀라웠다.
“지금도 화면에 가끔 잡히고 말이야.”
카메라가 돌아갈 때마다 살짝씩 걸리는 남자 두 명. 원래라면 출연자를 제외한 사람들이 카메라에 스치듯 잡히면, 스태프이거니 하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테지만 어쩐지 저 두 명은 눈에 익었다.
“하···. 우리 고객님들 중 한 명인가?”
영업직인 수빈은 평소 기억력, 특히나 사람에 관한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더 호의를 보이곤 하니까.
“아닌데, 우리 고객 중에서는 저런 사람이 없는데···. 으아아! 생각해내라! 머리!”
무언가 걸리면 알아낼 때까지 머리를 쥐어뜯는 기질인 수빈은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화면을 본격적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어디서 본 사람들인데···.”
수빈이 두 손으로 옆머리를 거머쥐고 TV를 째려보거나 말거나, 화면에서는 멧돼지의 선택을 받은 연예인이 기뻐하고 있었다.
[예스!]
[이럴 수는 없어! 핑크야! 네 덩치를 생각하면 그쪽으로 가면 안 되지!]
[우와···. 아까 사과에 환장하는 건 다 가짜였던 거야? 이 사과가 어떤 사과냐면···! 농약도 안 치고! 세척도 다 해서! 하나하나씩 낱개 포장으로 된! 고당도! 맛도 겁나 좋은 사과란 말이다···.]
[바나나는 별로인가···?]
멧돼지의 선택을 받아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연예인, 아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저게 뭔데 저 멧돼지가 저렇게 좋아한대?"
머리를 쥐어뜯던 수빈도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꾸엥?]
[하하. 이제 없어. 미안 핑크야.]
아라의 손에 있는 무언가를 다 먹고 난 멧돼지가 아라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무조건 찾아낼 거라는 기세였다. 멧돼지의 모습에 제작진들도 궁금한지 물었다.
[아라씨, 뭘 주신 거죠?]
[아, 피디님도 아시는 거요.]
[...?]
[아까 도착해서 마을 분들이 평상에 웰컴 푸드 주셨잖아요.]
[엥? 그런 게 있었어?]
[선배님은 늦게 오셔서 몰랐구나. 그 마을 어귀에 큰 나무 있었잖아요? 그 밑에 평상에 마을 분들이 오느라 고생했다고 준비해 놓으셨더라고요.]
"웰컴 푸드라니. 역시 연예인이 좋긴 좋아. 돈 받고 촬영하러 간 건데도 환영받고."
웰컴 푸드라는 건 친구들과의 계에서 몇 년 동안 계를 모아 갔던 해외 특급 호텔에서밖에 보지 못했던 수빈이 중얼거렸다. 화면 속, 혼자만 웰컴 푸드를 보지 못했던 강산도 수빈과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웰컴 푸드가 있는걸 알았으면···. 더 일찍 왔을 텐데. 그래서 뭐가 있었는데?]
[우리 핑크도 좋아하는 맛있는 거요.]
[그러니까, 그게···.]
[스테비아 방울토마토.]
아라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걸 밝힘과 동시에 멧돼지가 맞다며 옆에서 '꾸엥'하고 울었다.
"스테비아 방울토마토??"
웰컴 푸드로 그 비싸디비싼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를 내놓는 곳이라···.
"어?"
스테비아 토마토와 남자 둘을 번갈아 생각하던 수빈은 무엇을 깨달은 듯 급히 핸드폰을 집어 검색했다.
"그때 그 박람회 위치가···. 미화리였지? 지금 방송하고 있는 마을도···."
징징징
수빈의 빠른 타자에 핸드폰이 터치 진동음을 울려댔다. 몇 번의 터치 음이 울렸을까.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걸 찾아낸 수빈은 핸드폰 화면을 내려놓고 환호성을 질렀다.
"미화리! 신비농장! 그래! 신비농장 사람들이었어."
**
같은 시각, 한울의 집 안.
“컁! TV에 한울이 나온다!”
“신기해?”
“꽈악! 신기하다! 나도 나오나?”
“글쎄···?”
나는 TV에 내가 나오자 흥분해 TV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을과 찹쌀을 말리며 대답했다. 1화는 기념적인 날이니 같이 봐야 한다는 강 할머니의 주장에, 마을회관에서 다 같이 봤었다. 하지만 2화부터는 선택사항이기에 혼자 조용히 보기 위해 집에서 보는 것을 택했건만. 내가 TV에 나온다는 사실 하나로 정령들이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바보 찹쌀! 당연히 안 나온다! 우리는 저기 가지도 않았다! 컁!”
“아니다! 나는 한번 갔었다! 꽉!”
“호에? 언제 갔었냐?”
노을은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TV에 나오겠냐며 컁컁 웃었지만, 찹쌀은 한번 촬영현장에 온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냐면···.
-펑!
“컁! 이게 무슨 소리냐!”
TV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카메라를 덮쳤다.
“저 때였지.”
찹쌀이 촬영장에 온 시기는 딱 저 때였다.
멧돼지의 선택을 받은 아라가 소고기/돼지고기/텃밭 중 텃밭을 골라 우리 집 텃밭을 털어간 그때.
‘아니 왜! 그 좋은 소고기랑 돼지고기를 두고 텃밭 작물인데!’
물론 강산과 이추성이 항의하긴 했지만, 선택은 1등 마음. 어쩔 수 없이 텃밭 작물로 하루 두 끼를 때우게 된 두 명의 남자는 어떻게든 텃밭 작물들을 입맛에 맞게 요리하려고 머리를 맞대었다.
‘형님, 튀기면 신발도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튀기죠.’
‘그럴까? 근데 너 튀김 할 줄 알아?’
이추성이 밭에서 갓 따온 깻잎을 팔랑팔랑 흔들며 튀김을 주장했지만, 그 말을 듣는 강산의 얼굴엔 의심이 가득했다.
‘거, 불도 못 피우시는 분들이 튀김은 무슨. 그냥 불도 피웠겠다,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거로 먹어요. 그냥.’
수돗가에서 감자의 흙을 제거하고, 감자 칼로 껍질을 벗겨내고 있던 김은비가 칼을 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귀가 너무 밝은 것 같습니다.’
‘소머즈여 뭐여.’
‘어허. 다 들립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기수가 낮은 김은비의 호통에도 강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추성도 그러했다. 이곳에서 격투는 누구보다 더 뛰어나지만, 여자를 상대로 주먹을 내지를 수는 없다. 낭만 파이터의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미 강산과 자신은 신뢰를 잃었다.
‘형님, 아직 턱 쪽에 검은 게 묻었습니다.’
‘어? 여기? 야, 너도 오른쪽 눈 옆에···.’
‘아직도 있습니까? 하아···.’
그건 바로 시골에 왔으니 시골 방법으로 불을 피우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선 1시간 동안 나무판과 나뭇가지를 비비다가 실패한 것. 결국, 불을 피우는 데 성공을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심 할아버지의 도움 덕이었다.
‘아이고, 아직 못 피웠나? 아나. 이걸로 한번 해보던가. 아니 무슨 시골을 우째 보고 저걸로 불을 피운다쌌노. 우리 증조할아버지도 성냥 쓰셨다.’
제작진이 잡은 집이 바로 심 할아버지 댁의 담과 맞닿아있었는데, 밥을 먹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을 피우는 두 덤앤더머를 본 심 할아버지가 보다못해 ‘없는 게 없는’ 할아버지의 창고에서 서바이벌용 키트를 꺼내 건넨 것. 검댕이 좀 묻긴 했지만, 그 키트를 사용하고는 30분 만에 불을 피워낼 수 있었다. 총 1시간 30분 만에 불을 피워낸 둘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제 검댕은 다 없어 진 것 같으니, 요리를 좀 해보자고요. 일단 밀가루를 묻혀서 넣으면 되니까···.’
‘그래? 그럼 이거 먼저 한번 넣어볼까?’
얼마나 자신감에 찼으면,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튀김에 도전하게 된다.
‘오. 좋은 생각입니다. TV에서도 셰프들이 본격적으로 튀기기 전에 뭔가를 넣어서 온도 체크 하더라고요.’
‘오케이. 그럼 이걸 한번 넣어보자고.’
요리는 할 줄 모르지만, 어디서 본 건 많은 이 덤앤더머들은 방금 수돗가에서 씻어온 깻잎을 고요한 기름에 던져넣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어, 어? 안돼!’
그들의 모습을 찍던 FD가 본능적으로 ‘안돼’를 외쳤지만, 이미 물기를 가득 머금은 깻잎은 강산의 손을 떠난 후였다. 그 모습을 본 FD는 얼른 카메라를 물리고 백스텝을 하였고, 물기를 가득 머금은 깻잎은 모두가 FD의 경고에 물러난 직후, 고요한 기름과 만났다.
펑-!
땔감을 미친 듯이 넣어 미친듯한 화력을 자랑한 불에 고요히 온도를 높이고 있었던 기름은 물에 적셔진 깻잎을 만나자마자 저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
스스스-
‘무슨 일이야?’
‘불, 불났어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깻잎의 물기를 순식간에 튕겨낸 기름은 자욱한 연기까지 만들어냈다. 그 연기가 어찌나 자욱한지 이추성과 강산은 바로 옆에 있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
‘쿨럭. 쿨럭.’
‘으에취.’
기름 바로 앞에 있던 둘은 서둘러 자욱한 연기에서 빠져나와 콜록댔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끊이지 않은 화력으로 인해 냄비에 담긴 기름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이여!!’
서바이벌 키트를 전달해 주고 집에 들어갔다, 걱정되어 다시 나왔다가 연기와 함께 불을 목격한 심 할아버지는 급하게 마을 단체톡방에 출연자들의 집에 화재를 알렸고, 덕분에 몇 분도 되지 않아 통에 물을 가득 받은 마을 사람들이 도착했다.
‘뭐꼬? 뭣 때문에 지금, 이 연기가 나는 기고?’
‘그게···. 깻잎을···. 튀기려고···.’
‘으잉? 깻잎을? 물기 제거 안 하고 그냥 집어넣었나? 저 불 조절도 안되는 데에다?’
‘...’
몇 마디 대화로 순식간에 상황파악을 마친 어르신들은, 물이 담긴 통들을 놓고는 소화기를 찾아 나섰다.
‘여있다!’
이미 사정을 파악한 뒤, 기름에 붙은 불도 꺼뜨리는 K급 소화기를 창고에서 찾아온 심 할아버지 덕분에 화재를 빨리 진압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갔었다. 꽉!”
“그랬지.”
화면에는 그 긴박했던 순간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있었다. 검댕이 묻은 덤앤더머의 모습을 화재가 진압된 후에 편집해 띄우는데, 그 맹한 모습 덕분에 해당 장면은 코미디스러운 해프닝의 한 부분으로 끝났다.
[와. 뭐지, 그냥 먹어도 맛있네?]
[멧돼지가 좋아할 만했네. 구황작물이 이렇게 맛있을 일이야?]
사고 친 덤앤더머는 아무런 소리도 못 하고, 김은비와 아라가 삶은 감자와 고구마를 먹게 되었다.
“츄릅. 한울, 감자가 갑자기 먹고 싶다 컁!”
“고구마가 좋다. 꽥!”
많은 일이 일어나서인지, 이추성과 강산은 그 많던 감자와 고구마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정령들뿐만이 아니라 나까지 침이 고일 정도.
[...그래도! 단백질이 필요하다!]
[...협상하시겠습니까?]
[꼬꼬댁!!]
영상은 단백질을 원하는 이추성이 제작진과 딜을 하는 장면과 장 이 장님댁 수탉의 며느리발톱이 반짝하고 빛나는 예고편으로 끝났다.
동시에, 내 핸드폰도 미친 듯이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잉지잉
“역시. 방송은, 반응이 빠르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