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 (1)
”그리고, 그 품질관리를, 저희가 같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작물들의 품질관리를 도와준다는 내 말에 빨간장화, 예능 미션에서 뛰어난 촉각을 자랑하던 김찬명 할아버지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한울이 니가? 아무리 잘 팔린다고 해도, 우리도 우리만의 노하우가 있다.“
김찬명 할아버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도시에서 일하다 이제 겨우 이곳에 와서 몇 달 농사 지은 놈이 품질관리를 한다고 하면, 누구든 김 할아버지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찬명이 니 한울이네! 작물 안 먹어봤나?”
하지만 그 당연한 것도, 옆에서 누군가 도와준다면 달라진다.
“어? 당연히 안 먹어봤지.”
“뭐꼬? 촬영 첫날 한울이가 평상에 펼쳐놓았던 것도 안 먹었었나?”
장 이장님은 신비농장 표 작물을 한 번도 안 먹어봤다는 김찬명 할아버지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며 물었다. 그저 질문한 번 했다가, 이상한 사람이 된 김 할아버지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니 카메라 보는 거 도와준다고 바빴다 아이가. 그리고 밭에 가면 있는 거를 내가 왜 묵나. 아, 제수씨가 만든 건 먹었었다. 역시 제수씨 음식솜씨는 따봉이다. 따봉!”
그러면서도 장 이장님을 포섭할 수 있는, 꽃분이 할머니에 대한 칭찬을 빼놓지 않았다.
“하하하! 우리 꽃분이가 음식솜씨가 좋긴허제!”
장 이장님은 꽃분이 할머니의 칭찬에 헤벌쭉 웃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 이게 아이지. 그, 뭐꼬. 한울이 농사 실력은 내가 보장한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하지만 김찬명 할아버지는 장 이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눈썹을 찌그러트리면서 되려 이장님을 이상한 사람 보듯 했다. 그런 김 할아버지의 모습에 장 이장님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말이 되는 소리다. 아이고마. 니가 한 번이라도 한울이가 키운 걸 먹었으면 이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데. 니는 와 혼자 안 먹고 그러나?”
“내만 안 먹어 본 기가? 내만 이상한 거가?”
“함 봐라. 한울이 말하고 나서 니 말고 누가 뭐라고 했는지.”
“와 없겠노? 다들 한울이 생각한다고 말을 안 해서 그라지, 다 마음속으로는 내랑 같은 생각했을구로? 자, 봐라.”
장 이장님의 말에 콧방귀를 뀐 김찬명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팔을 활짝 펼친 모양새가, 모두가 제 생각과 같을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뭐꼬?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하지만 다른 마을 주민들의 표정은 김찬명 할아버지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으이구. 가만있으면 반이라도 가제. 쉰 소리 말고 앉으라.”
혼자만 동떨어진 생각을 하는 김찬명 할아버지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심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쉰 소리라니?”
과연. 장 이장님의 말대로 홀로 딴소리를 한 사람이 된 김찬명 할아버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한울을 제외한 모두가 앉아있는 가운데 홀로 외딴섬처럼 우뚝 솟아오른 김 할아버지의 모습에, 뒤에 있던 강 할머니가 외쳤다.
“아따. 마, 알았으면 퍼뜩 앉으이소. 덩치가 작으면 또 몰라. 뭐 곰같이 큰 양반이 그렇게 서 있으면 뒤에 있는 우리가 보일까, 안 보일까?”
“어? 아. 어. 당장 앉는다. 봐라. 앉았제?”
강 할머니의 싸늘한 눈빛을 받은 김찬명 할아버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앉았다. 김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어. 됐다. 한울아, 사태파악 못 하는 양반은 치웠으니까, 천천히 말해봐라. 어떻게 품질을 관리할 생각인데?”
우리 신비농장 작물의 단골이기도 한 강 할머니는 어서 얘기해 보라며 재촉했다. 할머니의 재촉에 나는 싱긋 웃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말이죠···.”
**
마을회관에서의 주민 회의가 끝나고 몇 주가 지난 후.
미화리 산골 마을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아이고. 한울아!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잘 마주쳤네. 니 아직 저녁 먹기 전이제? 우리 집에 와서 먹거라.”
길을 걷다 마을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이렇게 반색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집에 반찬이 많아서···.”
가까이 오자마자, 내 손을 붙잡고 저녁을 먹고 가라는 할머니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어? 왜? 니 맨날 혼자 밥 먹는다메. 혼자 먹으면 밥이 뭐가 맛있노. 있던 입맛도 뚝떨어지제.”
할머니는 내 거절에 눈을 흘기며 말했다. 손을 토닥토닥하며 어차피 우리 할배 차려주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 거라며.
“어···. 제가 저녁에 할 일이 있어서요.”
혼자서 먹을까 걱정하는 할머니의 생각과 달리, 우리 집에는 내 요리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정령들이 있었다. 그러니 저녁을 먹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루 전, 아니 오전까지는 알고 있었어야 했다.
노을은 다른 건 다 아무렇지 않아 하며 맹-한 표정을 짓다가도, 밥을 빼먹기만 하면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디서 봤는지 비련 한 여주인공처럼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내면서. 몇 달 전, 생각보다 길어지는 방송 촬영 때문에 한 끼를 뛰어넘었다가 그 모습을 목격한 후로는, 더는 노을이 세상 다 잃은 듯 ‘아이고’를 하지 않도록 심혈 기울이는 중이었다. 바닥을 짚고 ‘아이고, 아이고’를 하는 건 귀엽긴 하지만, 커다란 눈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건 조금 그랬다.
“그래. 우리 한울이가 억수로 바쁜사람이제. 우리들 것도 파느라. 알았다.”
일이 있다고 하니 내가 저녁을 먹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할머니의 고집이 움직였다.
“그라믄 반찬이라도 가지고 가라.”
저녁을 먹는 대신, 반찬이라도 가져가라는 것.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할머니 많이 드세요. 저 반찬 많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반찬이 많았다. 마주치는 어르신마다 먹을 걸 주는 바람에 우리 집 냉장고는 이미 테트리스 쌓기에 돌입했다.
“반찬 갖다 준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안 먹었나? 있어봐라. 그럼 내가 새 반찬 가져다줄게. 원래 있던 건 닭들 주라. 알았제?”
“할머니, 괜찮······. 습니다···.”
괜찮다며 할머니를 붙잡았지만, 할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홱 뒤를 돌아 열심히 당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닭들한테 주라니. 이미 우리 집의 닭들은 찹쌀의 보살핌 속에서 아주 쑥쑥 자라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입맛이 아주 고급이라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는 말.
“...”
반찬이 많다는 내 말은 무시한 채로 집으로 들어가신 할머니를 말리지 못한 죄로 나는 길가에 멍하게 섰다.
바쁜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바로 며칠 전부터 신비농장 온라인 스토어에서 작물을 판매하신 분 중 한 명이다.
내가 말한 비법은 별거 없었다. 이미 작물을 키우는 방법이라면, 김찬명 할아버지의 말대로 나보다 도가 트신 분들이기에. 내가 말한 건 단 하나였다. 신비농장에서 제공하는 비료를 쓰시라.
“아이고. 많이 기다렸제? 이거 받아라. 아주 맛있게 담아졌다. 니 이거 좋아하제?”
내가 몇 주 전 일을 떠올리는 동안 집에서 나온 할머니는 큰 병에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을 한가득 담아 나오셨다.
“어후. 이거 만들기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많이 주셔도 돼요?”
방울토마토를 살짝 삶아 껍질을 벗기고, 매실엑기스에 재우는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은 만들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 방울토마토를 뭉개지 않으며 껍질을 벗기다 보면 어깨도 아프고, 눈도 아팠다.
“내가 요즘에 눈이 안 침침해. 여기저기 쑤시던 것도 없고. 이게 다 니 덕분아이가. 거기다 요즘에는 내가 기르는 것마다 니가 사서 가져가니까···. 매일이 딱 요즘 같았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건 니 혼자 다 무라. 알았제?”
“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다 먹을게요.”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을 받아 품에 안고 활짝 웃자, 할머니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뿌듯한 얼굴로 내 품에 있는 절임을 본 할머니는, 이제는 어서 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다 먹고, 또 필요하면 말해라?”
“네. 감사합니다.”
“오야. 니도 내 것 잘 팔아줘서 고맙데이.”
“별말씀을요. 준혁이랑 잘 나눠 먹겠습니다.”
“됐다. 갸는 강 씨가 잘해서 맥인다. 니가 혼자라서 문제지. 어디 참한 아가씨 없나?”
“하하. 그러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넘어가나 했더니. 어김없이 듣는 ‘참한 아가씨’ 소리.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만큼, 듣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소리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이고. 노력 안 해도 된다. 인연이면 언젠가는 다 만나게 돼 있다. 그저 그 인연이 더 빨리 왔으면 해서 그런 거지.”
결혼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그저 말 그대로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걸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가 손을 까딱이셨다.
“...?”
할머니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숙이니, 한 손을 입 옆에 세운 할머니께서, 낮은 소리로 속내를 말씀하셨다.
“사실···. 결혼 안 해도 된다! 요즘 세상에는 혼자 살아도 된다!”
할배한테는 비밀이라며 ‘쉿’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나도 똑같이 속삭이며 말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
할머니에게서 받은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산책을 하셨는지, 대나무 숲 쪽에서 나를 향해 손을 열심히 흔드는 장 이장님을 발견했다.
“한울아, 이제 오나?”
“네. 산책 다녀오신 거예요?”
“어. 아니, 다음에 촬영할 장소 좀 보고 왔다.”
“오. 정말요? 어디 괜찮은 곳 발견하셨나요?”
장 이장님이 말하는 촬영은 바로 너튜브 촬영. 멧돼지로 이미 기인정도로 알려졌던 장 이장님은, 예능 방송 이후로 인지도가 꽤 높아졌다.
“어. 내가 완전! 억수로! 좋은 곳을 발견했다 아이가.”
정말 좋은 곳을 발견했다며 장 이장님은 어깨를 흔들며 턱을 치켜들었다. 이장님은 요새 너튜브에 푹 빠지셨다. 그 이유는 바로 마을에서는 받지 못했던 찬양을 너튜브 댓글에서 볼 수 있어서였다. 때문에, 아직까지 너튜브 인원이 지정되지 않아 이장님의 노래 영상은 비록 2주에 한 번 밖에 너튜브 촬영을 하지 못하지만, 그 한번을 위해 이장님은 일을 마치고 매일 마을을 돌아다니셨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마을의 아름다움을 알려야 한다는 말을 하시며.
“어디요?”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하지만, 그 지역 사람보다 관광객들이 해당 지역에 대해 더 잘 안다는 말도 있듯이, 장 이장님이 직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장소들은 우리 마을 사람들도 미처 몰랐던 곳들이 많았다. 이장님이 찾아낸 곳은 하나같이 풍경이 빼어나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기다릴 정도였다.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장 이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며 자신이 발견한 곳을 얘기했다.
“놀라지 마라. 저 산에 폭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