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 (3)
“호에, 이게 뭐냐?”
집으로 들어와 손을 씻은 후 주방으로 가자, 노을이 두 앞발로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이 담긴 병을 집고 얼굴을 딱 붙이고 있었다. 신이 날 때마다 팔랑거리는 노을의 꼬리를 본 나는 요리를 할 때 사용하는 라텍스 장갑을 끼며 말했다.
“방울토마토를 매실에 절인 거야.”
“...뭔지 모르겠지만 맛있는 냄새가 난다 컁!”
내 말에 귀를 쫑긋거리던 노을은 이내 고개를 다시 돌려 매실에 잠긴 방울토마토를 보았다.
“노을아, 가만히 보고만 있어. 금방 맛있는 거 만들어 줄테니까.”
“컁! 나만 믿어라!”
“그래.”
자신을 믿으라며 풍성한 꼬리를 바닥에 탁탁 치는 노을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지난번 요리를 도와주겠다고 저 조막만 한 손으로 재료를 씻겠다며 철퍽 거리다 다 쏟은 적이 있었기에, 저 말이 그렇게 믿기지는 않지만, 저렇게 의욕이 충만한데 응원해 줘야지. 노을에게 화이팅을 외친 나는 냉장고를 열어 미리 만들어 놓은 리코타 치즈를 꺼냈다.
“나중에 이것도 더 만들어야겠네.”
치즈는 사 먹어도 맛있지만, 리코타 치즈는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어 자주 만들어 먹는다. 따끈하게 구운 식빵에 듬뿍 올려 먹거나, 샐러드를 만들 때 같이 곁들여 주면 풍부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호에에···.”
냉장고에서 나온 리코타 치즈는 밤새 수분이 빠지도록 면 보자기에 싼 뒤 그릇에 올려놓아 꾸덕함이 최고조에 달아 있었다. 치즈를 감싼 면 보자기를 걷어내자, 노을이 어느샌가 나가와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자.”
“컁! 고맙다!”
리코타 치즈를 조금 떼어서 주자, 노을이 두 앞발로 치즈를 잡은 뒤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응? 아. 깜빡했네.”
반짝이는 노을의 시선을 받은 나는 곧 노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다. 찬장을 열어 꿀을 꺼내 노을이 들고 있는 치즈에 살짝 얹어주었다.
“호에에! 너무 맛있다!”
담백하면서도 약간의 짠맛을 가진 치즈는 꿀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표정으로 꿀이 발린 리코타 치즈를 음미하는 노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재료를 준비했다.
“꽥! 혼자 뭘 먹냐!”
아니, 준비를 하려고 했다.
“호에? 난 혼자 먹은 게 아니다! 찹쌀이가 없던 거다!”
찹쌀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주방에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한울! 병아리들을 돌보고 왔다!”
“그래. 수고했어. 찹쌀아. 여기.”
내 앞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며 자신은 늦은 게 아니라 일을 하고 왔다고 어필하는 찹쌀에게 리코타 치즈를 조금 떼어 꿀을 발라 주었다.
“꽤애액!”
꿀이 발린 치즈를 부리에 문 찹쌀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컁! 귀 아프다! 한울! 도와줄 게 있으면 불러라!”
찹쌀의 노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노을이 얼어붙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치즈와 함께 거실로 사라졌다.
“꽈악? 나도 같이 가자!”
노을과 달리 한입에 치즈를 삼킨 찹쌀이 노을의 뒤를 따라 뒤뚱거리며 뛰어갔다. 아마 노을 혼자 TV를 본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만들어볼까?”
엉겁결에 혼자 남게 된 나는 아까 노을이 붙들고 있던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이 담긴 병을 끌어와 뚜껑을 열었다.
“음. 냄새 좋고.”
달큼하면서도 신선한 향이 나는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이게 했다.
“하나 먹어볼까?”
매실에 절인 방울토마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특히나 햄버거를 먹을 때 피클 대신 먹노라면, 끝도 없이 햄버거를 먹게 만드는 마성의 음식이었다.
“음. 맛있다.”
껍질이 벗겨져 속살만 남겨진 방울토마토는 매실의 맛과 향을 듬뿍 머금어 씹을 때마다 방울토마토와 매실의 맛이 하모니를 이루며 입안을 즐겁게 했다.
매실 방울토마토 절임 한 알을 입에 머금은 채 콧노래를 부르며 밭에서 갓 따온 샐러드용 채소를 손질하기 위해 물을 틀 때였다.
“뭐가 맛있냐? 킁.”
싱크대 밑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내려다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포동이 서랍 손잡이에 매달려 등반 중이었다.
“읏차. 언제 왔어? 배고프지?”
둥그런 배 때문에 등반을 하는 것인지 매달려 있는 건지 모를 자세로 낑낑대는 포동을 안아 싱크대 위에 올렸다. 평소에는 숲에 있으면서, 밥때는 귀신같이 알아 이렇게 오는 게 매번 신기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왔다! 킁!”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를 먹다 걸린 만큼, 포동은 방울토마토에 관해서는 개 코가 따로 없었다.
“자, 여기. 이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킁! 고맙다! 근데 저건···?”
“저건 지금 만들고 있는 중. 노을이랑 찹쌀이도 이것만 먹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다! 천천히 해라. 킁!”
“그래. 고마워.”
포동이에게도 꿀을 묻힌 리코타 치즈를 주니, 잠시 병에 담긴 방울토마토를 아련하게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식탁으로 갔다.
“작대기 두 개랑 동그라미 하나 맞냐? 킁?”
“응. 고마워.”
노을과 찹쌀이 있는 거실로 갈 줄 알았더니, 포동은 식탁 의자로 등반하더니 식탁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포동의 의지대로 수저통에서 식탁으로 날아가는 젓가락과 숟가락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 한번 같이 만들어볼까.”
조금씩이지만 리코타 치즈를 나눠주었더니 딱 샐러드에 쓸 양만큼 밖에 남지 않았다.
“우유, 생크림, 레몬즙, 소금···. 그리고 설탕.”
내일 아침에 빵에 발라먹으려면 지금 만들어 놓아야 한다. 갓 만든 리코타 치즈는 수분을 빼야 하기에 바로 먹지 못하기 때문.
“우유는, 심 할아버지 댁 우유.”
심 할아버지는 작은 축사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할아버지네 축사는 기계로 가득했다. 몸치 중의 몸치지만, 기계 하나는 마을에서 제일 잘 다루는 만큼, 심 할아버지네 축사 안은 최신 기계들로 가득했다. 때문에 할아버지의 축사를 방문할 때마다 마을가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간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크. 이거지.”
심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번 우유를 짰는데, 그 중 한 병을 꼭 오다 주웠다며 주시곤 했다.
“이 우유 마신 후로는 시중에서 못 사 먹는다는 게 좀 단점이긴 하네.”
심 할아버지의 우유는 치즈가 잘 만들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시중의 것보다 훨씬 더 고소하고, 풍미가 좋았다.
“생크림을 좀 넣고.”
리코타 치즈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크림이 필요한데, 파스타나 수프를 해 먹을 때도 쓰기에 자주 구비해 놓는다.
“비율은 2:1.”
우유 2, 생크림 1의 비율로 넣은 뒤 약불로 뭉근히 끓여준다.
“소금이랑 설탕도 넣고.”
우유와 생크림이 들어간 냄비의 가장자리가 끓어오르려고 자글거릴 때쯤, 소금이랑 설탕을 넣고 가볍게 저은 후, 가장자리가 바글거리면···.
“레몬즙 투하.”
레몬즙은 시판용으로. 사실 레몬 생 과즙이 풍미가 더 좋지만, 개인적으로 신건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빠르게 소비하지 못해 시판용을 사놓는 편이다. 시판 레몬즙을 하나 사놓으면 이렇게 치즈를 만들 때 쓰거나, 무더운 여름 글라스에 얼음을 가득 붓고, 탄산수와 레몬즙, 그리고 꿀만 있으면 시원한 레모네이드도 만들 수 있다.
“오케이. 샐러드 준비하면 되겠네. 포동아, 접시 하나만 꺼내줄래? 우리 샐러드 먹는 거로.”
리코타 치즈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순간은 레몬즙을 넣은 후이다. 레몬즙을 한번 크게 섞어준 뒤에는, 온도를 더 낮춘 뒤 관찰해야 한다.
약불로 줄인 뒤, 치즈가 몽글몽글 뭉치기까지는 약 10분 정도가 걸린다. 그동안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식탁 의자에 앉아 그 작은 리코타 치즈를 아껴먹으며 가스레인지 쪽을 보고 있는 포동에게 부탁했다.
“킁! 알았다!”
포동이 발딱 일어나 내 상단 수납장의 문을 열어 접시를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주었다.
“포동아 땡큐.”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포동이의 능력은 정말 일상생활에서 정말 유용했다. 노을과 찹쌀의 능력도 발군이지만, 노을의 능력은 식물에 한정되어 있고, 찹쌀의 능력은···. 긴말하지 않겠다.
“킁!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그렇게 움직이기 싫어하는 포동이 내 칭찬에 뿌듯해하며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럼 다른 친구들 좀 불러와 줄래?”
포동이 노을과 찹쌀을 부를 동안,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놓은 채소들과 토마토를 섞어놓을 참이었다. 하지만 정령들은 내 생각을 뛰어넘었다.
“불렀냐! 꽥!”
“컁! 노을이도 왔다! 나 여기 있다!”
포동이 주방을 나가기도 전에 찹쌀과 노을이 헐레벌떡 주방으로 들어온 것.
“킁!”
포동은 주방을 나서다 말고 멍하니 서서 둘을 보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뒤뚱거리며 의자를 등반하는 걸 보니, 포동이 말하진 않았지만, 생각이 보이는 듯했다. 아마 자신이 아무리 빨리 가봤자, 저 둘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걸 빠르게 인정한 게 분명했다.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다됐으니까.”
야채는 우유 끊는 동안 잘라 볼에 담아놓았으니, 이제 소스와 함께 버무리면 된다.
“발사믹이···. 여깄다.”
샐러드용 소스는 많지만, 그 중 발사믹과 올리브오일을 섞으면 산뜻하면서도 영양가 높게 샐러드를 즐길 수 있다.
손으로 야채와 소스를 버무린 뒤, 반으로 자른 매실에 절인 방울토마토를 넣은 뒤 한 번 더 섞는다.
“리코타 치즈가 빠질 순 없지.”
마지막으로 한입 크기로 떼어놓은 리코타 치즈를 위에 듬뿍 뿌리면 끝.
“자! 먹자!”
완성된 샐러드를 식탁으로 가져가 포동이 세팅해 놓은 접시에 덜어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흡입하기 시작했다.
“호에에···! 이 맛은!”
“킁! 방울토마토에서 다른 맛이 난다!”
노을은 한입을 먹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고, 포동은 미식가처럼 천천히 음미했다.
“꽥꽥!”
찹쌀은···. 그저 신났다. 접시에 코를 박고 내가 해 준 샐러드를 맛있게 먹고 있는 정령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식탁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울렸다.
“킁! 여기 있다.”
“오. 땡큐.”
잘 뭉친 치즈를 면 보자기에 넣느라 고개만 돌려 핸드폰을 보자, 포동이 능력을 사용해 내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김찬명 할아버지···?”
핸드폰 화면에는 후각의 신(神)인 김 할아버지의 이름이 떠 있었다.
“네. 한울입니다.”
포동이 준 핸드폰을 목과 어깨 사이에 끼고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에서 다급할 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울아! 큰일 났다! 우야노!]
“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큰일 났다고 하는 김 할아버지의 말에 치즈를 만들던 걸 멈추고 핸드폰을 고쳐 쥐었을 때였다.
[한울아, 니 지금 집에 있제?]
“네. 지금 집이긴 한데···.”
[내 지금 가고 있으니까네, 쪼매만 기다리라!]
“예? 지금 오신다고요?”
[어. 거의 다 도착했다. 잠시만, 문 열어라.]
빠르게 걷고 있는 듯 가쁜 숨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문을 열라는 김 할아버지의 말고 동시에 인터폰이 울렸다.
-띵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