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농장! (1)
-띵동.
김 할아버지의 말과 동시에 울리는 인터폰에 샐러드를 흡입 중이던 정령들의 행동이 일제히 멈추었다.
“얘들아, 플랜A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혼자 사는 줄 알고 있는데, 혼자 있는 집에서 접시가 3개나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하다.
“컁! 알았다!”
혹시나 몰라 장난삼아 정령들과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 할 때를 대비하여 상황별 플랜을 짜 두었는데, 이렇게 사용할 줄이야.
“킁! 나는 다 먹었다.”
내 말에 노을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접시를 들고 방으로 도도도 사라졌고, 벌써 샐러드를 다 먹은 포동은 찹쌀의 접시를 들어 노을의 뒤를 따라갔다.
“같이 가자 꽉!”
마지막으로 찹쌀이 포동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나는, 대문을 열었다.
“한울아-!”
현관문을 열자, 한달음에 달려온 김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모를 이상한 표정을 한 김 할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야꼬. 그 뭐냐, 농장체험! 그래! 그거 있다 아이가!”
“네.”
내가 주관한 마을회관에서의 회의 후,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노선을 정했다. 신비농장이 자체 개발한 비료를 사용하여 농작물을 생산해 온라인 스토어로 판매하거나, 혹은 체험농장을 하거나. 김 할아버지는 그 중 체험농장을 선택했다. 침착하게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침을 꿀떡 삼킨 할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떼셨다.
“니가 말해준대로, 니가 올리라는 사이트에 올렸는데, 지금 막 핸드폰이 계속 울린다. 이거 봐봐라.”
어쩐지 조금 전부터 진동 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김 할아버지의 몇 마디로 상황을 파악한 나는 할아버지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아. 걱정 마세요. 다 예상했던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잠깐 따뜻한 차라도 드시면서 계시죠. 대추차, 괜찮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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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알림 시간을 김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재설정했습니다. 지금 핸드폰 진동 안 울리죠?”
“어. 안 울린다. 어떻게 했는데?”
“이건 설정에 들어가서···. 이렇게···.”
“이야. 신기하네. 니 무슨 마술사가?”
흥분한 김 할아버지를 부엌 식탁에 앉혀 따뜻한 대추차를 드리자, 대추차를 홀짝이던 김 할아버지가 내 모습을 보며 큰 눈을 끔뻑거렸다.
“몇 번 하다 보면, 할아버지도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내사 뒤돌아보면 까먹는 나이라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핸드폰을 조작하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김 할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말은 자신 없어 해도 눈은 내 손가락을 열심히 쫓고 있는 게 열심이시다.
“에이. 까먹는다면서 농사는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아이고 마! 내가 좀 농사는 잘 하긴 하제? 하하하!”
내 칭찬에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었다.
“근데 나는 태어나서부터 흙만 파먹었으니까 당연히 잘할 수밖에 없는 건데, 니는 어떻게 그리 잘하는데? 들어봤더니만 비료도 준혁이 금마가 만든 게 아니라 니가 거의 90%를 도와줬다면서.”
“운이 좋았습니다. 전부 어르신들 덕분이죠. 저도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는데, 보고 들은 게 있잖습니까.”
“허허. 그러나? 하기는. 니 어릴 때 사람들이 전부 다 저 땅강아지라고 불렀잖아. 똥강아지가 아니라.”
“...? 그랬나요?”
그런 별명을 들을 적 없다며 잡아떼자, 김 할아버지의 입에서 내 흑역사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하이고마. 니 불리한 기억은 안 한다는 거제? 니가 얼마나 땅을 파먹었으면 우리가 그렇게 불렀겠노. 눈만 떼면 사고를 치고 앉았다 안카나. 아니 두꺼비 집을 만들라 했더니 만들어가지고 지가 거기 들어가는 사람이 어딨노? 그 뿐이가? 뭔 놈에 티비에서 개미 수프를 끓여 먹고 장사가 됐다고 개미를 주워 먹지를 않나······.”
“할아버지, 이렇게 기억력이 좋으신데, 뒤돌아서면 까먹는다고요?”
내 흑역사를 곱씹느라 신이 난 김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이고. 당연하지! 이건 내 젊을 때 기억이라 기억을 잘 하는 거고. 그리고 니가 들어도 니가 한 짓이 희한하지 않나? 낸중에 니 나이 들어서 결혼하면 니 색시한테 말해줄라고 우리가 전부 기억하고 있다 아이가.”
“예?”
내 미래의 아내에게 말해주기 위해서 온 마을 사람들이 내 흑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니. 최근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자, 김 할아버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우리가 누꼬? 다 니 생각하는 사람들 아이가. 딱 니 마누라 보고,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은 것들만 말할 테니까.”
“...”
나를 놀리며 신이 난 김 할아버지의 모습에, 내 기억 한구석에 짚어 놓았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참고로 말하자면, 김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심 할아버지 다음으로, 사고를 많이 치시는 분이었다.
“어? 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기억하나가 떠올랐는데요···.”
“응? 무슨 기억?”
“예전에 할아버지네 집에 고추 말릴 때···. 할아버지가 개똥이랑 논다고 그 고추 전부 흙투성이 만들었던···.”
“응? 그게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리이긴요.
김 할아버지가 제 흑역사를 아는 만큼, 저도 할아버지의 비밀을 안다는 말씀이죠.
“글쎄요. 그때 할머니가 엄청 화나셨던 거 같던데. 다 말라서 걷기만 하면되는 거에 흙을 묻혀놔서 못쓰신다고···. 잡히면 죽일 거라고 하셨던···. 지난번에 뵀을 때도 그 얘기 하시던데요? 할머니가 기억력이 엄청 좋으시더라고요. 또 뭐라고 했더라, 아!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라고 하셨죠.”
나는 씩 웃으며 두 엄지손가락을 들어 따봉을 외쳤다. 할머니의 기억력을 알게 되자, 나를 놀리느라 미소가 가득하던 김 할아버지의 얼굴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상한 말투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허허. 어떻게, 서로의 기억을 잊는 건 어떠한가?”
“에이. 무슨 소리세요.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잖아요.”
“크흠. 그렇지. 사실 나도 입이 억수로 무겁다.”
헛기침을 연신 하며 협상을 요청하는 김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최소한 김 할아버지에게서 내 흑역사가 퍼지는 일은 없을 터.
“네. 당연히 알죠. 할아버지 입 무거운 거.”
만족스러운 얼굴로 동의하니, 김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안 그래도 집사람이 요즘 내 뭐 잘못만 하면 눈을 요래 시퍼렇게 뜨고 쳐다본다 아이가.”
할머니 얘기를 하며 두 손으로 눈꼬리를 쭉 올린 김 할아버지는 따라 하면서도 할머니의 화난 모습이 생각나는지 진절머리를 쳤다.
“그래도 할머니가 잘 해주시잖아요.”
“웃기는 소리! 내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오늘도 체험농장 때문에 좀 허둥댔다고 단박에 니한테 찾아가라고 쫓겨났다 아이가. 근데 니 밥은 묵었나?”
아하. 이제야 김 할아버지가 이 늦은 시간(시골에서는 해만 넘어가면 늦은 시간이다.)에 우리 집에 온 것이 이해가 되었다.
“언제든, 오셔도 됩니다. 밥은 이따가 먹으면 되죠. 일단 알림 껐고, 사이트에 공지도 올렸으니, 나중에 손님이 오시면 제가 한번 가서 봐 드릴게요.”
체험농장은 작물을 재배해야 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 분명 할머니는 김 할아버지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련의 일들이 걱정되어 내게 보낸 게 분명할 것이다. 외부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오신 할머니와 달리, 할아버지는 평생을 이곳에서 농사만 하셨으니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걱정할만한 일이다.
“어이구! 그럼 내사 안심이제! 진짜로 와줄 거가?”
“당연하죠. 제가 제안한 사업인데요.”
처음 마을 사람들에게 내 의견을 제안할 때도 그렇게 약속했었다. 작물들을 기르고, 관리하는 건 어르신들의 몫이지만, 그 외의 것들. 예를 들어 광고라던지, 판매는 내가 맡을 거라고. 그러니 김 할아버지의 체험농장을 방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고맙데이. 진짜 니 오고 나서 마을에 활기가 돈다! 활기가!”
하지만 김 할아버지는 그 말을 잊은 듯 아이처럼 좋아하며 손뼉을 치셨다.
“내 마음 같아서는, 니가 우리 마을에서 안 나갔으면 좋겠다!”
요즘 들어 어르신들을 만나면 항상 듣는 말. 인사치레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내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짓게 했다.
“...근데, 니가 여기 있으면 사람들도 못 만나고. 그러면, 니 짝지도 못 만나니께 안돼제. 암.”
역시나.
김 할아버지 역시 다른 어르신들처럼 마지막은 내 미래의 아내에 대한 걱정으로 마무리했다. 마치 온 마을 어르신들이 짠듯한 말에 나 역시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짚신도 제짝이 있고,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중 하나는 있겠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이 되새기며 입꼬리를 힘껏 올리며 말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정색을 해야 한다. 이렇게 모순이 넘쳐나는 표정을 만들어내면, 어르신들은 알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시곤 했다. 김 할아버지도 역시나 똑같은 반응을 하실 거라 예상했건만.
“....어···. 그래. 그런 말이 있기도 하지. 그런데 말이다···. 내가 이만치 살다 보니까, 그 짝이 없는 사람도 있더라.”
할아버지의 반응은 다른 어르신들과는 달랐다.
“예?”
예상치도 못한 김 할아버지의 답변에 내가 멍하게 되묻자,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제 입을 탁 때리더니 되물었다.
“...설마, 내가 지금 입 밖으로 말을 꺼낸기가?”
스스로 놀란 듯 눈을 끔뻑거리는 김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네. 방금 저한테 ‘짝이 없는 사람도 있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김 할아버지는 입을 막았던 손을 슬쩍이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슬슬 밀기 시작했다.
“야. 니, 진짜 희한하다. 어떻게 내가 속에 있는 말을 내뱉게 만드노. 크으. 진짜 능력 좋아. 이야. 장가갈 수 있겠어! 이렇게 능력이 좋은데 당연히 갈 수 있지! 암! 그럼 첫 손님 오는 날 오는 거 맞제? 그런 거로 알고 간다! 저녁 빨리 무라. 방해해서 미안타!”
나에게 연신 따봉을 날리며 너스레를 떤 김 할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 슬슬 걸음을 옮기더니, 말을 끝마칠 때쯤엔 현관문 앞에서 손을 들고 힘차게 흔들었다.
“네. 할아버지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어느 때보다 재빠른 김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 또한 한쪽 손을 들어 흔들었다. 저렇게 팔팔하시니, 앞으로 운영할 체험농장 또한 아주 잘해 내실 게 분명했다.
“어! 니도 잘 먹고! 손님 오면 꼭 와야 한다? 아니면 내 또 헛소리할 수도 있다! 니한테 그런 것처럼 손님한테 마음의 소리를 하면 안 되잖아! 그제?”
빠른 걸음으로 벌써 대문까지 가 밖을 향하던 김 할아버지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 그때 뵙죠.”
계속 나에게 확인을 하려고 하시는 걸 보니 정말 걱정이었던 모양.
“오야.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입맛이 도네! 고맙다!”
내 확답을 들은 김 할아버지는 상체를 흔들며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고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김 할아버지는 저녁을 먹고 왔다며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해가 확실히 길어졌네.”
신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김 할아버지의 앞에 붉은 노을이 뉘엿거리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노을은 할아버지의 길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