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커피! (1)
“다! 다! 만들래요! 딸기 잼! 블루베리 잼! 방울토마토 잼!”
평상 위에 앉아있던 민율이 가스 버너 위에 냄비가 세팅되자 벌떡 일어나 방방 뛰며 말했다.
“다···? 너무 많지 않을까?”
곤란한 듯한 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옴팡지게 꼭 쥔 두 손과 결연한 눈빛은 기필코 자신이 수확한 모든 작물을 동원해 잼을 만들겠다는 일념이 담겨있었다.
“고놈 참. 그래! 사내라면 욕심이 있어야제!”
모자가 좀 더 편하게 잼을 만들 수 있도록 재료를 전달해준 뒤 그곳에서 빠져나온 김 할아버지가 투명한 비닐 뒤로 보이는 민율을 보고는 코를 쓱 닦으며 말했다.
“근디, 아기 엄마가 좀 피곤하긴 하겠다. 벌써 다크써클이 여까지 내려왔네.”
“그러게요.”
김 할아버지의 말대로 민율의 엄마인 수진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피곤함이 가득했다.
“아···. 커피가 필요해···.”
좋아하는 잼을 만들 생각에 엉덩이가 이리 씰룩 저리 씰룩거리는 민율과 달리, 벌써 민율을 따라다니느라 기력을 소모한 수진의 입에서 카페인 수혈을 원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웅···? 커피···?”
분명 잼을 만들어야 하는데 커피를 말하는 엄마에 민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엄마가 그랬어?”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는지, 수진은 아이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헛소리였다는 말이었다.
“아이고. 아기 엄마가 피곤한가 보네. 믹스 커피 밖에 없는데 우짜지?”
뒤편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김 할아버지가 허둥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체험농장을 하기 위해 비닐하우스의 뒤편을 조금 막아 매점 처럼 만들어 과자와 따뜻한 물 등을 준비해 두었지만, 간이매점인 만큼, 품목이 다양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믹스커피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펭귄 과자들뿐.
“그거라도 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요?”
“아이다. 니가 몰라서 그라는데 우리 아들내미도 믹스 안 마신다. 뭐 살이 찐다나 뭐라나. 이미 살은 찔 대로 쪄놓고서는 살찐다고 믹스커피 안 마신다는 게 말이 되나?”
김 할아버지의 아들이라면, 풍채가 아주 좋으신 분인 만큼, 할아버지의 말도 이해가 간다. 아마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이미 그 등치를 가졌으면서, 믹스 커피 조금 마신다고 해서 별다를 게 있겠냐는 생각이실 테다.
“할아버지 말씀도 틀린 게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도 어릴 때 나만 보며 사탕이라도 하나 거머쥐어주었던 삼촌인 만큼, 편을 조금 들어주었다. 그러자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혀를 끌끌 차던 할아버지가 태도를 바꾸었다.
“그래. 니 말이 맞다. 그 뭐라드라? 테레비에서도 그러던데···. 프라...플래...플래시?”
“플라세보 효과요?”
“어! 맞다! 진짜 약이 아니라 비타민을 줬는데도 진짜 약이라 생각하고 먹으니까 상태가 호전 되데. 금마도 그런 건가 보네. 그래도 믹스는 쪼매 그런데···.”
“아마 괜찮지 않을까요? 진짜 피곤할 때는 달달한 믹스가 당기거든요. 괜히 회사에서 믹스커피를 종류별로 몇 박스씩 쟁여 놓는 게 아니라니까요?”
“으잉? 그러나? 하기사. 뭐 회사 드라마 보면 전부 다 종이컵에 믹스 타서 휘휘 저어서 먹기는 하드라. 니도 그랬나?”
어후. 아무렴요. 직장인들에게 믹스 커피는 소울 푸드를 넘어, 없어서는 안 될 생존 키트 중 하나이다.
“네. 저도 하루에 두 잔씩은 꼭 마셨습니다.”
끄덕끄덕. 김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자, 확신을 가진 할아버지는 바람처럼 움직이며 믹스커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오케이! 사실 내가 말이다, 우리 마누라도 인정하는 믹스커피 타기 달인이다! 이 말이다! 내가 탄 믹스커피 한번 마시면 다른 믹스커피는 뭐다? 그냥 흙탕물이다.!”
믹스커피를 타는것 만큼은 이 세상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며 눈 깜짝할 새에 믹스를 뜯어 종이컵에 부은 김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저쪽에서 잼을 만드느라 신난 민율이처럼 씰룩거리고 있었다.
“이게 타는 게 쉬워 보이지? 근데 말이다, 제일 중요한 게 있다.”
커피가 다 나온 봉지의 끝을 툭 두드린 김 할아버지가 말했다.
탁.
정수기에 종이컵을 올린 김 할아버지는, 진지한 눈빛으로 뜨거운 물의 양을 조절했다.
“이거거든. 물의 양이 제일 중요한기라!”
“아···.”
다른 믹스커피는 흙탕물이라는 말에 김 할아버지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을 줄 알았건만. 비법이 그저 물 조절이라니. 나도 모르게 맥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꼬? 지금 물 조절을 무시하나?"
"아뇨. 너무 예상치 못한 비법이라···."
"으잉? 그럼 무슨 비법을 예상했던기고?"
나의 맥빠진 소리를 들은 김 할아버지는 내용물이 빈 믹스 봉지를 위협적으로 흔들며 물었다.
"음···. 굳이 말하자면? 2:2:2 같은? 옛날에는 믹스커피 비율만 잘 맞춰도 인정받았다고 들어서요."
우리 할머니가 매일 하시던 말. 옛날에는 믹스커피만 잘 타도 먹고 사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물만 부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나는 반문했지만, 할머니는 커피와 설탕, 그리고 프림의 조합을 완벽하게 맞추는 사람이 귀하다고 했다. 아무리 같은 비율로 커피를 타더라도 타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다며.
"뭐? 2:2:2? 아이고마. 그게 도대체 언제적 얘기고? 그거는 옛날, 설탕이랑 프림이랑, 커피랑 다 따로 팔았던 때 얘긴데? 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를 하고 있노."
김 할아버지는 가루들의 비율을 언급하는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며 티스푼을 꺼내 물이 담긴 종이컵을 휘휘 젓기 시작했다.
"요즘 믹스커피는 옛날이랑 달리 이미 섞여서 나오잖아? 그거슨 다 저기 대기업에 다니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그 비율을 정한 거제! 며칠이 뭐꼬? 몇 년은 걸렸을 거다!”
표면에 떠 있는 갈색 커피 알갱이들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종이컵을 티스푼으로 휘휘 젓던 김 할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보았다.
"그···. 렇죠?"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자, 김 할아버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비율은 나보다 한 10배는 똑똑한 사람들이 만들었으니까···. 내가 해야 할 건 딱 하나! 그게 바로 물 조절인기라! 자! 백문이 불여일견! 함 무봐라!"
척!
커피 알갱이가 다 사라진 종이컵에서 티스푼을 꺼내든 김 할아버지는, 다른 손으로 종이컵을 내게로 내밀었다.
"어떻노? 냄새 쥑이제?"
김 할아버지의 손에 있던 종이컵을 건네받은 나는, 아직까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쓰읍. 하.
눈을 감고 맡은 커피의 향은 여느 믹스커피와 다르지 않았다. 대중화된 그 향.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향이었다. 익숙한 그 향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네요."
"맛은 더 좋을끼다. 아무리 대기업에서 머리 좋은 사람들이 최고의 비율을 뽑아냈다 카더라도, 그걸 희석을 내처럼 잘 시키는 사람은 없을 기거든. 쭉 한번 들이켜 봐라."
"네."
분명 그 커피를 마시고 나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탄 믹스커피는 절대 마시지 못할 거라며 김 할아버지는 호언장담하였다. 자신감이 넘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눈을 살짝 감고 종이컵에 입을 대었다.
후후.
아직까지도 흰 김이 폴폴 나오고 있는 믹스커피를 마시기 전, 한번 입김을 불어 식힌 나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어···?"
김 할아버지가 탄 믹스커피를 마신 나는, 마치 정령들이 내 요리를 먹은 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본 할아버지가 씩 웃으며 말했다.
"물 조절이 키 포인트 맞제?"
**
김 할아버지네 체험농장의 첫 손님이었던, 수진과 민율의 다녀간 지 딱 3일 되던 시점.
"저기, 사장님···. 혹시 믹스커피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수확을 마친 체험자들에게 버너를 가져다주자, 핸드폰을 보던 여자가 호호 웃으며 물었다.
"네. 1000원입니다."
"혹시 카드 되나요?"
"당연하죠."
"여기요. 3잔 부탁드려요."
여자에게서 카드를 받아든 나는, 매점과 체험장을 구분하는 비닐 벽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운 김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커피 3잔 주문이요."
"진짜가? 내가 후딱 타줄게!"
체험농장의 문을 열고부터 처음 들어오는 커피 주문에 김 할아버지가 신남을 감추지 못하고 커피믹스를 꺼내 2개를 한꺼번에 뜯으며 외쳤다.
"네. 천천히 하세요."
순식간에 봉지에 있는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털어놓고 정수기 쪽을 향하는 김 할아버지를 보며 말한 나는, 뒤를 돌아 아이들과 함께 잼을 만들거나, 샐러드를 만드는 방문자들을 보았다. 체험농장 오픈 직후, 연습 겸 오직 한 팀만 열어놓았던 첫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풍부 왕이 된 체험농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 여기! 다 됐다!"
풀부킹이 되어 사람들로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믹스커피의 주문은 처음. 간이매점에 구비해 놓은 물건 중 오직 커피만이 여태껏 시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그런 거 아이가?'
믹스커피 실력을 뽐내고 싶었던 김 할아버지는 나에게 가격 인하를 제시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었다.
'할아버지, 아직 며칠 안 됐으니, 일주일까지만 보고요.'
할아버지가 만드는 믹스커피는 1봉지가 아닌 2봉지가 들어갔다. 거기다 아이스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음까지 구비해 둔다고 소형 냉장고와 셰이커까지 들이셨다. 온수기에, 냉장고에, 인건비까지 포함한다면, 1000원은 충분히 받을만했다. 거기다 맛이 끝내주니, 한번 팔리기만 한다면 끝도 없이 나갈 게 분명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완성된 커피를 가져다주자, 주문한 여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쯉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더니. 커피를 주문한 여자의 옆에서 딸기를 뭉개고 있던 아이가 제 엄마의 모습을 보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읏차. 조심. 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나는 고개를 숙이다 못해 평상바닥과 맞닿으려는 아이의 이마를 손으로 받쳐 올린 뒤 일어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을 해 주었다.
"어머? 진짜네?"
작은 손을 옴팡 쥐고 주걱으로 딸기를 얼마나 신나게 뭉갰는지, 아기의 얼굴 여기저기 튄 딸기 잔해를 닦는 용으로 허리 앞치마 호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주고 뒤를 돌자, 뒤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 왜 그래 수빈 엄마? 뭐가 진짜야?"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댕그랗게 뜨고 커피를 바라보는 수빈의 엄마를 보며 맞은편에 있던 일행이 의아한 눈빛을 하며 물었다. 그러자 커피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수빈 엄마가 번뜩 정신을 차리며 입을 떼기 시작했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봐 진규 엄마. 내가 여기 오기 전에 혹시나 해서 후기를 찾아봤다고 했잖아?"
"그렇지? 거기서 지금 저 커피 가져다주신 분이 신비농장 사장님이라는 것도 알려줬다며."
"어어. 근데 거기서 마지막에 커피 맛이 끝내줬다면서, 저기 할아버지 사장님이 계시면 꼭 믹스커피를 한번 먹어보라고도 했거든?"
"아아. 그래서 믹스커피를 시킨 거였어?"
"아니. 사실 믹스커피가 맛있어 봐야 얼마나 맛있겠어. 그냥 좀 피곤해서 카페인 충전도 할 겸, 집에 가서 카페 가기 전에 그냥 한 모금 하려고 시켰거든? 그런데···."
"그런데?"
쫑긋.
조금 큰 목소리의 대화에 김 할아버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맛있다는 소리겠제?"
간이매점 쪽으로 다가가자, 평상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던 김 할아버지가 두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겠죠? 오늘도···."
"쉿!"
하지만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김 할아버지는 검지를 세워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수빈엄마라고 불린 여자가 입을 떼기 시작한 것. 다행히 두 사람이 앉은 자리가 가까운 데다, 둘 다 목소리가 큰 탓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둘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