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커피! (3)
[제목: 체험 농장 가시는 분들 커피 꼭 드세요! (56)]
카페에 올라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아 인기 글이 되어버린 게시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녕하세요. 6살짜리 남아의 엄마입니다. 제가 최근 친한 엄마와 함께 체험 농장을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굳이 가야 했나 싶었는데, 결과만 말씀드리면 꼭! 가보시라고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해서, 저희는 차 한 대로 가서 교대로 운전했어요 - 요즘에 하루짜리 운전자보험이 잘 나와서 안심하고 운전할 수 있어요 -. 아이들이 이제 좀 커서 차를 잘 타긴 하지만, 오래 타면 멀미해서 저희는 가까운 호텔에 1박 머무르고 왔어요. 아쉽게도 마을에는 숙박 시설이 없더라고요···.]
글의 중반쯤을 읽던 나는, 숙박 시설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스크롤을 멈추었다.
"호텔···? 아. 이걸 깜빡했네."
나야 이곳이 고향이기도 할뿐더러, 내려 올 때면 며칠씩 머무르다 다시 서울로 갔던 터라 체험을 위해 단기간 왔다가는 방문객들의 고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확실히 체험 농장을 오는 사람들은 아이를 동반한 보호자들이 많으니까···."
지금은 신비농장의 작물을 원하는 사람들의 니즈와 최근 방영된 우리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예능 덕분에 체험 농장 예약 창이 열릴 때마다 순식간에 마감되는 기염을 토하고 있지만···. 방문한 사람들에게 불편하고, 힘들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면 이 기세가 빠른시일 내에 꺾일 거라는 건 내가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흠···."
당장 숙박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로는 인근 숙박 시설과의 연계를 통한 할인 및 바우처 제공을 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이 방법은 실현 가능성이 낮았다. 방금 인터넷으로 검색한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의 거리가 약 30km. 이 정도면 연계를 안 하느니만 못하다.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페셜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허울만 뻔드르르해질 확률 99%.
"그럼,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두 번째로 생각한 방법은 바로 마을의 빈집을 인수해 통째로 방을 빌려주는 방법이 있다.
"집값도 싸고, 인테리어는···. 뭐, 심 할아버지도 계시고···."
첫 번째 방법과 달리, 이 방법은 멀리서 여기까지 오 손님들에게 아주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마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봤자 15분. 이 정도면 아침에 일어나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저 대나무 숲을 산책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농장체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을의 진면모도 보여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좋은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구체적인 플랜이 만들어 지는 게, 당장 오늘부터라도 시작할 수 있어 보였다. 손님들을 위해 숙박업소를 짓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거니와, 자금도 많이 들어 당장 실행하기엔 무리가 있어 실현 가능성 0%에 수렴하지만, 이미 있는 집의 내부 인테리어만 바꾸는 거라면 얘기가 달랐다.
"길어봐야 2주."
집의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리 상태가 좋지 않아 철거부터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2주면 충분히 숙박공간의 기능을 갖출 수 있을 터였다.
"오케이. 좋았어. 장 이장님댁에 먼저 가보자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생각했다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게 상책. 이 게시글을 읽은 뒤 바로 장 이장님께 갈 생각으로 멈추었던 스크롤을 움직였다.
[...신비농장 사장님께서 아이를 달래주셔서 늦게나마 커피를 마셨는데! 어머나 세상에! 제가 태어나서 먹은 믹스커피 중에 제일 맛있는 거 있죠? 그 맛이 잊히지 않아서 집에 와서 타 먹어봤는데, 그 맛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한 달 뒤에 또 갑니다! 갔다 왔더니 아이 비염도 좀 덜 한 거 같고···. 무엇보다 아이가 자꾸 그때 먹은 과일 먹고 싶다고 해서요. 이번에는 가면 체험 농장 도착과 동시에 마실 생각입니다···. (중략)]
글은 김 할아버지가 탄 믹스커피에 대한 찬양과 내가 아이를 어떻게 쉽게 달랬는지에 대한 칭찬, 그리고 우리 마을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공기는 또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 쓰여있었다.
"우리 마을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예쁘지."
칭찬이 일색인 글을 모두 읽은 나는 댓글도 확인했다. 댓글들은 대부분 예약에 실패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부러워요. 저는 신비농장도 선착순 실패. 체험 농장도 실패. 똥손인가봐요 정말 ㅠㅠ
-금손 부럽습니다ㅠㅠ 저도 신비농장 선착순 실패하고 방법이 없나 찾다 찾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이 글을 보니까 오기가 생기네요! 예약 성공 팁 좀 공유해 주세요.
-전 다음 주에 가는데! 꿀팁 공유 감사합니다!
-헉. 저는 다녀왔는데 왜 커피 마실 생각을 못 했을까요? 믹스라 그냥 아이 과자만 사줬는데···. 저도 다시 도전!
-그런데 쓰니님, 정말 가면 신비농장 작물들 직거래 가능한가요?
"직거래 그리고 커피라···."
멀기도 멀거니와, 접근성도 극악인 이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 농장을 오는 부모들의 대부분은 신비농장의 작물들을 구매하고 싶어 했다.
"이거, 잘하면 석호 일이 좀 줄어들겠는데?"
현재 신비농장의 직원은 나를 제외하고는 딱 두 명밖에 없다. 박준혁과 지석호. 준혁은 현재 비료 생산에 집중하고 있어, 자잘한 일들은 현재 석호가 모두 다 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노을과 찹쌀, 그리고 포동이 기본적인 작업을 다 해 놓는다고는 하지만, 외부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기존 온라인 스토어 포장 외의 추가적인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해 석호의 업무가 점점 늘어나는 중이었다.
"만들어 놓으면 수요도 있을 것 같고···."
하지만 이 시설을 만들어 놓는다면, 석호뿐만이 아니라, 매드 사이언티스트에 빙의하고 있는 준혁도 두 손 두 발을 들고 환영할 게 눈에 보였다.
"그럼 움직여야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
"어이쿠! 이게 누구야! 우리 김 사장!"
장 이장님은 집이 아닌, 팽나무 밑의 평상에서 나를 맞이했다.
"...? 그 옷은···."
평상시 이 시간이라면 집에서 꽃분이 할머니를 도와 저녁을 준비하시는 걸 종종 봐왔던 터라, 현재 주걱이 아닌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있는 장 이장님의 모습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게다가 저 반짝이 옷은, 촬영을 할 때 입는 일명 무대용 의상인데···. 혹시나 싶어 주위를 살피니, 나무 뒤에서 인영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튀어나온 인영은 바로 장 이장님의 손녀인 민주.
"어. 안녕. 근데 오늘 촬영 일 아니지 않아?"
영상학과에 재학 중인 민주는 장 이장님에게서 내 제안을 듣자마자 수락해 현재는 우리 마을 유튜브의 피디이자, 편집자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
"네! 아니긴 한데, 요즘 할아버지 영상 반응이 좋아서 추가 촬영 중이었어요."
촬영본을 적당히 편집해서 학교 과제로 낸다더니. 민주는 정규 촬영일을 제외하고도 틈만 나면 왔기에 오늘 여기 있는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추가 근무를 자처하는 민주를 보고 있자니, 새삼 담당자를 잘 뽑은 것 같아 뿌듯해졌다. 역시, 뭐든 인맥이 최고다.
"니 이번 영상 봤나? 사람들 반응이 쥑인다! 내 요새 이 댓글 보는 재미로 산다 아이가!"
"네. 당연히 봤죠. 이장님 노래 실력이 계속 늘어나던 거 같던데요?"
"글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내밀자, 장 이장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장님의 노래 실력은 너튜브 업로드 이후로 날개를 단 것처럼 늘고 있었다.
"이게 다 우리 팬들 덕분이제!"
놀랍게도 장 이장님에게는 팬들도 생겼는데, 팬들은 장 이장님께 '장블리'라는 별명도 지어주었다.
"아직도 채널 독립할 생각은 없으세요?"
장 이장님의 인기가 늘어남에 따라 나는 이장님께 채널 독립을 제안했었다. 현재 채널의 주인은 나이기에 더 나은 수익을 가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이고. 니 또 그 얘기가! 난 됐다니까네! 내는 지금처럼 우리 산골 마을 채널에 붙어있을 거다!"
"그래도 독립하시면 수익 면에서···."
"니 자꾸 수익, 수익하는데···. 내 이미 죽을 때까지 걱정 안 할 만큼 벌어놨다. 우리 민주한테 들으니까 니 수익분배가 말도 안 되는 비율이라고 하더구먼! 내는 따로 독립할 생각 없다. 그냥 니 채널에 붙어가 안락하게 있을란다. 나가서 수익이 붙어봤자 얼마다 더 붙는다고. 일 없다!"
혹시나 해 손녀인 민주가 있을 때 다시 물어본 거였건만, 장 이장님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에 동의한다는 듯, 민주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그러시다면, 전 수수료 받고 좋죠! 이장님 영상 더 많이 찍어 주십쇼."
확고한 어투로 '독립 NO!'를 외치는 두 명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암만! 걱정 마라! 근데 니 지금 이 시간에는 우짠 일이고? 밥은 뭇나?"
부러 수수료를 언급해보았지만, 장 이장님은 콧방귀를 뀌며 내게 이곳으로 온 목적을 물었다.
"이장님과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밥은 먹고 왔습니다."
밥은 정령들과 같이 먹은 지 오래. 요새는 군고구마에 빠져서 오기 전 고구마를 한솥 구워서 놔두고 오는 길이었다. 밥도 먹고, 고구마까지 먹은 터라 별생각이 없어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래? 그래도 더 무라. 오늘 우리 꽃분이가 야 온다꼬 맛있는 거 많이 차렸을기다! 가자!"
하지만 장 이장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내가 쓴웃음을 짓자, 장 이장님은 내가 혹할만한 걸 내놓았다.
"오늘 내가 술 담은 거 꺼낼 건데?"
"..."
"10년산."
다른 건 몰라도, 장 이장님이 직접 담근 술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탐낼 정도로 그 맛이 깊다. 근데 10년짜리라니. 배가 아무리 불러도 그 술을 위한 공간은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맛본 적이 있던 장 이장님이 담근 술맛을 되새긴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가시죠."
**
"크으."
"흘흘. 맛있제? 자. 안주도 하나 무라."
"네. 감사합니다."
꼴꼴꼴.
내 빈 잔에 투명한 술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다시 채워졌다. 하얀잔 안에 담긴 술은, 투명한 붉은빛을 품고 있었다.
"이기 약이다. 약. 내가 여기 산수유도 넣고, 저 뒷산에서 온갖 좋은 건 다 따서 넣었다 아이가."
술잔을 들어 물끄러미 그 고운 빛깔을 보고 있자, 장 이장님이 턱을 치켜들며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술에 대해 설명했다. 만드는 방법은 대외비라 말해줄 수 없지만, 그 맛만은 최고일 거라고 가슴을 팡팡 쳐댔다.
"인정합니다."
장 이장님이 만든 술은 맛도 맛이지만, 향이 일품이었다. 거기다 아무리 마셔도 숙취가 없다. 그러니, 이장님의 술에 대한 자부심은 인정할만했다. 자신의 술에 대한 자랑을 마친 이장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뼉을 짝 치며 물었다.
"참, 그래서 아까 의논하고 싶다는 게 뭔데?"
장 이장님의 말에 나는 손에 든 잔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게 말이죠, 집을 몇 개 사려고요. 마을에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