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픈 (2)
“우와···. 이거 되게 오랜만이네.”
지민은 강 할머니가 손에 가득 쥐여준 한과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하나만 먹어볼까?”
납작한 원통 모양새의 한과 위에는 전통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다식이었다. 대부분 다식의 경우 가루를 베이스로 만들어 포슬포슬한 식감이 다수였지만, 강 할머니가 쥐여준 다식은 손가락으로 톡 건드린다고 툭 하고 부서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바스락.
노랗고 동그란 다식을 감싼 비닐 포장지를 벗긴 지민은, 보통의 다식보다 절반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진 강 할머니 표 다식을 입에 넣었다. 한입 크기보다 더 작게 만들어진 다식은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으음···. 음···?!”
이 달콤함 뒤에 닥쳐올 가루테러를 예상한 지민은 호흡을 조절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뭐야, 이거. 내가 알던 다식이 아닌데?”
다식이라 함은, 송홧가루 따위의 가루를 꿀이나 조청에 개어 만드는 것이 보통. 여기서 꿀은 정말 소량만 넣어 섞기 때문에, 틀에서 나온 다식은 조심성 없이 다루다간 깨지기 십상이다. 완성된 다식은 포스스한 식감으로 인해 앞니로 조심스럽게 베어 물어도 가루가 온 사방으로 날리는 게 보통. 그런데 강 할머니가 준 다식은 달랐다.
“우와. 너무 맛있어!”
입에 들인 순간 호흡을 조절해야 하는 포스스함은 커녕, 강 할머니의 다식은 쫀득했다. 그리고 달콤했다.
-바스락.
-바스락.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과 쫀득한 식감에 지민은 입안의 다식이 사르르 녹아 없어질세라 바삐 손을 놀려 다식이 담긴 비닐을 까기 시작했다.
“헐? 이 포장지 잔해는 다 뭐에요? 설마···. 그새 다 먹은 거예요? 그 단걸??”
주방에서 꽃분이 할머니가 쥐여준 나무 트레이를 들고나온 박준혁은, 자신의 호주머니 가득 들어있는 다식 포장지와 같은 모양의 것들이 널브러진 테이블 위를 보며 기겁했다.
“어? 어···. 아니, 너무 맛있어서 말이지. 너도 한번 먹었으면 나처럼 계속 먹을 수밖에 없었을걸? 근데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내려 봐봐.”
“아니···. 맛있는 건 이해 못 하는 게 아닌데···. 그거 그렇게 먹다가는 돼지···.”
“뭐??”
지민은 박준혁의 놀람에 테이블에 널브러진 다식의 포장지‘였던’ 잔해를 수습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다, 돼지라는 말에,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와-. 이거 진짜 맛있겠다. 꽃분이 할머니가 손님한테 정식으로 선보이는 건 처음이라고 하시네요. 먹고 평가 좀 해주세요.”
-탁.
서슬 퍼런 지민의 눈길을 모른척한 박준혁은 들고 있던 나무 트레이를 과장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머.”
자연스럽게 박준혁이 내려놓은 트레이로 시선을 옮긴 지민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켠 것이 언제였다는 듯, 두 손을 가슴께로 꼭 모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차차. 이럴 게 아니지. 사진. 사진. 핸드폰!!”
분명 트레이위에 있는 것들은 다과이건만, 지민은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한참을 황홀한 표정으로 보기만 하더니, 의자를 더듬거리며 다식을 먹음과 동시에 내팽개쳐 놓았던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엉덩이에 깔린 거 아니에요?”
상체를 요리조리 비틀며 핸드폰을 찾아대는 지민의 모습에 박준혁은 지민의 엉덩이에 깔려 압사당하기 직전인 핸드폰의 끄트머리를 발견하고 말했다.
“어머? 얘가 왜 여기 있지?”
“아니. 거기 깔려있는데 느낌도 안 나는 겁니까?”
정말로 몰랐다는 듯, 손뼉을 짝 치며 핸드폰을 꺼내는 지민의 모습에 박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지민은 개의치 않았다.
“원래 내가 한군데 집중하면, 다른 건 신경을 안 쓰거든. 아마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모를걸?”
“네네.”
둔하다는 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지만, 지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박준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거기서 비켜봐.”
심드렁한 박준혁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지민은 핸드폰 카메라값을 설정한 뒤, 박준혁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이렇게요?”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지민의 모습에 박준혁은 그녀의 지시대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조금 움직였다.
“아니. 아직도 앵글에 걸쳐있잖아. 조금만 더. 아니다. 그냥 일어서서 내 쪽으로 와. 의자는 내벼려두고!”
한번 호응해주자, 지민의 요구사항은 더욱 구체적이 되었다. 박준혁은 지민의 요청대로 의자를 이렇게 뺐다가, 다른 테이블에 있던 의자를 가져왔다, 종국에는 작업대에 있는 꽃바구니를 가지고 와 지민이 말한 위치에 놓아 배경이 되게 해야만 했다.
“...”
“오케이! 좋았어! 이번에는 위에서 항공 샷!”
여러 가지 포즈로 꽃분이 할머니께서 차려준 다과상을 대략 153번을 찍은 듯한 지민이 외쳤다.
항공 샷이라니. 그럼 지금까지 다과상을 빙빙 돌아가면서 찍은 구도는?
박준혁은 지민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사진은 그만 찍고 먹기나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는 지민의 모습에 또 한 번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꾸역꾸역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 형님 보고 싶다.’
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한울을 간절히 부르며.
**
박준혁이 지민에게 시달리며 사진보조를 해줄 무렵.
“귀가 왜 이렇게 가렵지?”
할머니들의 요청을 반영해 수정된 메뉴판을 뽑아 든 나는, 집을 나서다 말고 갑자기 간지러워지는 귀를 쓸었다.
“컁! 오늘이냐!”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 말고 귀를 쓸고 있으려니, 거실에서 찹쌀과 함께 쿠션에 앉아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던 노을이 우다다 뛰어와 내 어깨 위로 폴짝 올라오며 말했다.
“어. 오늘이 가오픈날.”
“컁? 가오픈이 뭐냐?”
오픈은 알지만, 가오픈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본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을의 턱을 긁어주며 나는 간단하게 가오픈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가오픈은 말이지···. 정식 오픈이 아니라, 시범해서 오픈해 보는 기간이라고 하면 될까? 이 기간에는 메뉴도, 가격도 픽스되지 않은 게 많지. 보통 지인들을 초대해서 여러 가지 시범 메뉴를 선보이면서 코멘트도 받고. 쉽게 말하면, 진짜 오픈을 위한 연습 기간.”
쫑긋.
내 설명을 잠자코 듣던 노을의 귀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하늘로 향해 솟구쳤다.
“호에에? 그럼 나도 가면 안 되냐?”
가오픈이면, 본격적인 오픈도 아니거니와, 외지 사람들도 없을 테니 노을도 나와 함께 가 한과를 맛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미안하지만 안돼. 대신 올 때 맛있는 거 많이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가오픈날만큼 정신없는 기간은 없다. 특히나 가오픈 첫날은, 카오스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할 정도. 익숙하지 않은 일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와중에 만들어 놓았던 상품들이 하나라도 사라지는 순간, 아마 멘붕에 빠지지 않을까.
“컁! 알았다! 나는 참을성이 아주 강한 노을이다!”
다행히 노을도 내 설명을 이해했는지, 씩씩하게 대답한 후, 내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리고는 다시금 찹쌀에게로 도도도 뛰어갔다.
“아! 맞다! 잘 다녀와라! 컁! 밭은 우리가 책임지고 있겠다!”
노을은 찹쌀에게 뛰어가다 말고 끼익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걸더니, 고개를 내 쪽으로 홱 돌려 아주 믿음직한 자세를 만들어 보였다.
“그래. 고마워.”
내가 근래에 밭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리모델링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노을과 찹쌀, 그리고 포동이 덕분이었다. 알아서 작물들을 척척 기르고, 수확하고, 포장까지 하니 내가 할 일은 거의 없는 셈. 요새는 병아리에서 제법 닭처럼 성장한 우리 집 꼬꼬들도 농사를 거드는데, 찹쌀이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해충들만 쏙쏙 잡아먹어 농장운영에 아주 큰 도움이 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박준혁이나 지석호는 날 보고 그 많은 일을 하면서 농장일은 언제 했냐고 괴물 보듯 하긴 하지만.
턱을 치켜들고 나와 찹쌀의 중간지점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노을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찹쌀에게도 눈길을 보낼 때였다.
“꽈악! 끝났다! 이제 일하러 갈 시간이다! 가자!”
돌연 내가 현관에 서 있을 때도 붙박이처럼 TV 앞 쿠션과 물아일체를 선보이던 찹쌀이 날개를 퍼덕이며 쿠션을 박차고 일어나 마당과 이어진 거실 창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안갔냐? 꽈악?”
찹쌀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지만,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쉽게 말해 거실 통창을 향해 달리는 와중에 내게 시선을 돌린 것.
“어. 이제 나가려고. 어서 가봐.”
조금은 오싹한 그 광경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을 휘저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찹쌀이 네 할 일을 하라고. 하여튼, 우리 집에서 가장 계획을 완벽이 이행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찹쌀임이 분명했다.
내 배웅을 받은 찹쌀은 날개를 재차 퍼덕이며 거실 통창을 통과하기 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꽈악! 이따 보자!”
“그래···.”
내 인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닭장으로 달려가 꼬꼬들을 통솔해 마당을 나가는 찹쌀의 전광석화 같은 행동에 나는 현관에 멀뚱히 서서 중얼거렸다.
“우리 찹쌀이, 맛있는 거 많이 해 줘야겠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맛있는 거라도 많이 해주지 않는다면, 언젠가 저 부리에 쪼일지도.
**
-디디딩~
“어서 오세, 아이고! 우리 사장님 오셨네! 어여 앉아라. 준혁이랑 지민이도 저기 와 있다.”
사랑방의 문을 열자 훅하고 맡아지는 달콤한 내음과, 훈훈한 공기. 주황빛 조명을 쓴 내부는 실내에 가득한 식물들을 따사로이 비춰 이곳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편안한 기분이 들게 했다.
“형님! 오셨습니까!”
서까래에 고정되어 길게 내려온 팬이 천천히 돌아가는걸 보고 있으려니,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창문 앞, 테이블에 있던 박준혁이 헐레벌떡 내 앞으로 왔다.
“어.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러냐?”
비료 만드는 양이 아주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기계도 사주었고, 발효는 노을이 하루에 한 번 작업실로 들어가 활성화 시키는 덕분에 마을 전체에 뿌리는 비료량은 충분했다. 이미 재고도 어느 정도 쌓아놓은 상태라 이곳에 들러 리프레싱좀 하라고 불렀건만. 얼굴 상태가 영···. 어젯밤 작업실에서 볼 때 보다 더 좋지 않았다. 갑자기 나빠진 박준혁의 몰골에 이렇게 만든 원인을 찾으려던 찰나.
“준혁아! 저것 좀 들어줘!”
“히익-! 형님! 저 좀 살려주십쇼!”
창가에 있던 지민이 큰 소리로 박준혁을 불렀고, 박준혁은 지민의 목소리가 야차라도 되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왜 그러는 거야?”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지민의 목소리에 왜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 도리가 없던 나는 박준혁을 진정시키며 연유를 물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지민 쪽을 힐끗거리던 박준혁은 진정하라는 내 말에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 구름 떡집 사장님이···! 미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