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바람(1)
“엥? 한울아, 내가 지금 잘 못 들은 거야? 마을 입구라고?”
지민이 강 할머니 앞에 남아 있는 한과를 몰래 집어 먹다 말고 멍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네. 제가 내려가 보겠습니다. 거기 평상에 앉아있으십쇼. 네. 네.”
으쓱.
나는 지민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박준혁에게 눈짓했다. 핸드폰을 어깨에 낀 채 서둘러 앞치마를 벗는 걸 보니 그 선배라는 사람이 온 것이 맞다.
“그럼, 할머니! 저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선배 데리고 여기로 와도 될까요?”
“암만! 데꼬 온나! 우리 집 하숙생 그럼 또 느는기가? 호호호. 내는 대환영이다!”
강 할머니는 박준혁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여 선배. 아니, 새로운 하숙생을 데리고 오라 독려했다.
“네! 그럼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다 넘어진다. 천천히 갔다 온 나. 천천히.”
“네엡!”
-디디딩~
박준혁이 주방을 나가고, 곧이어 맑은 풍경소리가 준혁이 완전히 사랑방을 나간 것을 알려주었다. 준혁이 사랑방에서 나간 걸 확인한 지민은 상체를 강 할머니에게 기울이며 말했다.
“할머니, 그런데 집에 방이 몇 개에요? 저도 거기 들어가서 살면 안 될까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곳에 내려와서도 부모님 집에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가게와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하숙이라니. 설마 하는 생각에 지민을 쳐다보았지만, 이미 지민의 눈동자는 누가 뭐라 해도 들어먹지 않을 것을 시사하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광기로.
“하이고. 우리 집에 방이 암만 많아도 우리 아가씨는 안된다. 남녀칠세부동석인데 으델!”
강 할머니는 가소롭다는 듯이 지민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가볍게 지민의 부탁을 거절했다.
“할머니, 제가 밥을 좀 잘하는데···. 청소도 깔끔하게 할 자신 있습니다!”
“꿈도 크다. 아직 100년은 멀었다!”
“그럼, 저도 밭일 도와드리면 안 될까요? 아. 그럼 그 대학원생만 보려나. 야, 한울아. 어때? 내가 필요하지 않니?”
아무리 사랑에 미친다고는 하지만···. 저 정도면 중증이다. 나는 지민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가볍게 무시하며 꽃분이 할머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곷분이 할머니, 그럼 할머니도 강 할머니랑 같은 생각이실까요?”
“응? 아니. 나는 여기 문 닫을 때까지 있으려고. 누군가 한 명은 봐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내 아픈 뒤로는 우리 바깥사람이 내한테 뭘 시키질 않아서 내는 괜찮다. 아, 대신 밥은 해 주러 갈끼다. 괜찮나?”
강 할머니처럼 꽃분이 할머니도 아침 작업만 하시고 간다고 하면, 아무래도 한과는 인당 구매 수량을 정하고 가야 할 것 같아 여쭈어봤는데, 다행히 점심만 챙겨 주러 가신다고 하니 안심이다.
“아무럼요. 점심 휴식 시간 2시간 드릴 테니까 천천히 다녀오세요.”
“그럼 그동안은 누가 가게 보는데?”
점심시간을 2시간이나 준다고 하니 꽃분이 할머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회사 다닐 때 가장 불만 중이었던 것 중 하나. 점심시간. 1시간밖에 안 되면서 이 금쪽같은 시간을 풀로 누릴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놈의 회의는 점심시간 직전이나 후에만 잡혔고, 또 뭔 놈의 업체 미팅을 전부 점심으로 잡는지. 점심때만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회사는 노예가 1시간이라도 제대로 노는 꼴을 보지 못했다.
“아르바이트생 구하면 됩니다. 걱정 마세요.”
사람이 모자라면, 사람을 더 뽑으면 될 일. 경험한 바로는, 근무환경이 좋아야 직원들의 능률도 올라간다. 그렇지 않으면 잦은 이직과 퇴사로 인해 남아 있는 사람들만 목이 조여오고, 점점 망하는 길로 빠지게 된다. 내가 이곳에 있는 한, 직원 부족으로 인한 오버 워킹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마시라는 내 말에, 강 할머니가 옆에서 거들었다.
“꽃분이 동생, 걱정 마라. 야가 뭘 허투루 한 거 봤나? 이미 우리 한울이 머릿속에는 모든 계획이 다 들어있을 거로?”
“계획?”
“그치. 여기 폐가를 누가 이리 예쁘게 탈바꿈 시켜가 카페 만들 생각을 했겠노. 우리도 여기서 평생을 살았지만, 이런 생각 못 했잖아?”
“그렇긴 하지.”
“이것뿐인가? 저짝 김 할배 체험농장도 카페인가 뭔가에 홍보해가 매일 손님들이 줄지어 오지. 쟈 인터넷 가게에서 우리 마을 사람들 작물 팔리는 거 봐라. 맨날 다들 모이면 한울이 칭찬한다고 바쁘지.”
“맞다. 우리 바깥양반도 너튜브? 요즘 그거 찍는다고 정신없다. 얼마 전에는 뭔 오디션? 참가하라고 연락도 왔다.”
“뭐어?”
“네에?”
꽃분이 할머니의 마지막 발언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민에게서 괴성에 가까운 반응이 튀어나왔다. 오디션 제의라니. 이건 나도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그···. 뭐라 하더라? 무슨 트로트 오디션 피디한테서 참여 의향 있으면 접수해 달라꼬. 1등 하면 상금이 5억이라던데···. 첨 들어보는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이라 이름을 까묵었다.”
“헐? 상금이 5억이요? 미쳤다. 잠시만요. 어떤 프로그램인지 검색해 볼게요. 트로트···. 오디션···. 상금···. 5억···. 찾았다! 헐! 이거 미쳤는데요?”
꽃분이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몇 가지 단서를 검색하여 트로트 오디션의 프로그램을 알아낸 지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핸드폰을 흔들어 재꼈다.
“좀 가만있어봐라. 우리도 좀 보자.”
스크린은 할머니들 쪽으로 돌린 후 흔든 탓에 할머니들은 흔들리는 화면을 따라다니다 이내 포기하고, 한 손을 내밀었다. 주라는 소리였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
“마. 됐다. 그것만 주면 우리는 괜찮아 질 거다.”
“네. 여기요.”
지민은 자신의 호들갑으로 인해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할머니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어디 보자···. 뭐꼬? 이 오빠가 여기 와 있노?”
“오빠···. 요?”
나는 내 귀가 이상해 진줄 알았다. 위로 아래로 10살까지는 모두 평등하게 반말로 일관되게 대하는 강 할머니의 입에서 오빠라니. 만약 심 할아버지가 들었다면 대번에 뒷목을 잡고 쓰러질 사안이었다.
“오메. 진짜 울 오빠야 맞네. 이기 채널이 어데고? QBS? QBS면 우리 복댕이 찍으러 왔다가 우리 마을에서 며칠 먹고 자고 간 그 방송국 아니가?”
꽃분이 할머니까지 오빠라는 단어로 부르는 걸 보면, 할머니 세대에서 엄청난 아이돌임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QBS라. 이거 잘하면 우리 마을이 다시 방송에 탈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
“맞네. 맞네! 장 이장한테 당장 참여 신청 하라 캐라. 다른 방송들 보니까 1등 되면 가족들 다 초대하더니만? 마 우리 마을 사람들도 응원하려 함 가야 되지 않겠나?”
“이를 말이가. 당연히 같이 응원 가야지. 내우리 바깥양반한테 오늘 가가 꼭 출연하라고 해야겠다. 고마워. 아가씨.”
핸드폰 화면에 뜬 모든 정보를 섭렵한 두 할머니는 ‘오빠’라고 불리는 가수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자신보다 더 높은 텐션을 선보이는 할머니들에 멍하니 있다. 얼떨떨하게 핸드폰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맞다. 지민이 니가 정보 알려줬으니까는, 내도 우리 한울이가 좋아하는 거 알려 줄게.”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올리던 지민은, 강 할머니의 말에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발딱 들고 말했다.
“제가 무엇을 더 알아봐 드릴까요? 오디션 일정? 무대 위치? 아니면···. 오빠분의 회차별 참석 여부?”
분명 조금 전만 해도 동태눈깔처럼 영혼 없던 지민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메!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팬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알 수 있겠지만, 일반인들이라면 잘 모를 수 있는 정보들을 나열하는 지민의 모습에 강 할머니는 지민을 다시 봤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런 할머니의 시선에 지민은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당연할 수 밖에. 고등학생 시절, 지민의 별명은 홍길동이었다. 그건 바로 최애가 근처에 나타나기만 하면 신출귀몰하게 학교에서 탈출한 다음, 선생님이 찾을 때쯤이 되면 귀신같이 나타나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였다.
“대단한데? 그럼 이 할미는 믿고 있을게?”
“네. 대신 아시죠?”
“콜이다!”
“오케이! 콜!”
무슨 작당이 오가는지 정확히 예상은 되지 않았지만, 딱 하나는 알았다. 준혁아, 아무래도 너 덫에 걸린 것 같다.
**
강 할머니와 지민의 은밀한 거래가 성사될 무렵. 마을 어귀에 도착한 박준혁은 평상 위에 어렴풋이 보이는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배님! 여깁니다!”
“이야. 박준혁이. 신수가 훤하다? 이야.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 실험실 박차고 나가니까 좋았냐?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은혜를 똥으로 갚냐!”
박준혁은 오랜만에 만난 실험실의 사수였던 이동민을 반갑게 맞이했지만, 박준혁이 유선으로 랩실 포기 선언 후, 그 대신 폭풍을 여태 동안 감당했어야만 했던 이동민은 이때다 싶어 어딘가 유순해진 박준혁의 머리에 딱밤을 날렸다.
“아! 선배!”
“뭐 이 자식아.”
갑작스러운 공격에 박준혁이 눈을 희게 떴지만, 자신보다 더 희번덕거리는 눈을 부라리는 이동민의 모습에 박준혁은 작전상 후퇴를 외쳤다.
“아, 아닙니다. 오시느라 힘드셨죠? 짐 저 주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다. 나도 손이 있고 발이 있는 데 뭘. 얼른 앞장 서기나 해. 너 하숙하고 있는 할머니 음식 솜씨가 그렇게 좋으시다며? 새벽부터 내려오느라 아직도 밥을 못 먹었더니 배가 등딱지에 달라붙게 생겼어.”
“어···. 그러시면 카페로 먼저 가는 게 어떨까요? 지금 할머니가 카페에 계시거든요.”
“어? 이 촌구석에 카페가 있어? 시내에서 여기까지 들어오는 데만 해도 1시간은 족히 걸리는 여기에?”
정말이지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다 못해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쓰러질 자신까지 있는 이동민은 박준혁이 실없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풍경이 아름다운 건 인정하지만, 이렇게 사람은커녕 새들만 지지배배 울고 있는 이곳에 카페라니.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분명했다. 아니면 돈이 마빡에 튀거나.
하지만 선배의 얼굴이 일그러지든 말든,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던 박준혁은 호주머니에서 강 할머니에게서 받은 다식을 하나 꺼내 이동민에게 건네주었다.
“여기서 별로 멀진 않은데, 그거라도 일단 드세요. 당 보충은 될 겁니다.”
“이게···. 뭐야? 다식이면 엄청 텁텁한 거 아냐? 너 사실대로 말해. 지금 내가 좀 전에 너 딱밤 때렸다고 복수하는 거 맞지? 목막혀 죽으라고!”
다식이라곤 시중에서 판매되는 씹을수록 텁텁하고 달기만 해 물을 찾게 만드는 것만 먹어보았던 이동민은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내놓았다.
“에이. 설마요. 선배가 저한테 얼마나 잘 해 주셨는지 아는데요. 자자. 한번 잡숴보십시오. 먹고 나서 무조건 더 달라고 하신다에 한 표입니다. 참고로 그것도 강 할머니가 만드신 거에요.”
“그래···?”
자신에게 모든 뒷일을 맡기고 튄 이 후배 자식놈은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박준혁이 그렇게 자랑하던 강 할머니가 만드신 거라니. 궁금은 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박준혁의 만행을 바로 응징해 주지 못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지금은 가능했다.
만약 이 다식이 박준혁의 말과 달리 일반적인 것과 같다면, 반드시 박준혁을 구워버리고 말 거라는 다짐을 한 이동민은 다식을 감싸고 있는 포장을 벗기고, 달큼한 향을 풍기는 다식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음···?”
입에 넣은 직후, 눈을 크게 뜨던 이동민은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빠른 속도로 입안에 있는 다식을 맛보더니 박준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말했다. 어서 그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 달라고.
“너 이거 더 있지? 하나 더 줘! 그리고 강 할머니가 카페를 하신다고? 당연히 하셔야지. 얼른 안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