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바람(2)
“너 이거 더 있지? 하나 더 줘! 그리고 강 할머니가 카페를 하신다고? 당연히 하셔야지. 얼른 안내해!”
이동민은 방금 입에서 사라진 다식의 맛을 되새기며 박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응당 하나가 아닌 3개를 줘야 한다. 하나면 정이 없고, 둘도 아쉽다. 셋이 딱 좋다.
“예? 저도 아직 하나밖에 안 먹었는데···.”
“그래서 몇 개 있는데?”
박준혁은 다식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선배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강 할머니에게서 잔뜩 받기는 했지만, 자신도 아직 하나만 먹고 연구할 때 조금씩 꺼내 먹으려고 아끼고 있던 상태였다.
“여기요. 얼른 갑시다!”
다식이 가득 든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박준혁은 눈을 질끈 감고 다식을 한 움큼 꺼내 이동민에게 건넸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다식은 카페로 가 할머니께 더 달라고 하면 된다. 이곳에 머물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나눔이었다. 혼자 먹을 때 보다는 맛있는 건 같이 먹어야 더 맛있어진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헐? 이만큼이나?”
이동민은 자신의 손에 올려진 여러 개의 다식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박준혁이 누구인가. 교수님의 커피 심부름이 싫어서 설탕을 소금으로 모조리 바꿔치기한 맑은 눈의 광인이었다. 그 후로도 얌전히 있다가도 교수님이 먹을 것에 관해 코멘트를 하면 이를 드러내면 드러냈다. 그런데 이렇게 순순히 이만큼이나 준다고? 확실히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도 많은듯했다.
“이야···. 고맙다. 근데 지금이면 사람들 많아야 하는 거 아니냐? 왜 이렇게밖에 사람들이 없어?”
밤을 곱게 갈아 꿀에 쟀는지 입안에 들어가면 사르르 녹아버리는 다식을 3개째 까 입에 넣으며 이동민이 물었다. 아무리 시골이라고 해도, 지금은 오전. 농사를 짓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밖에 나와 있어야 할 시각인데, 하나같이 빽빽하게 작물들이 심겨 있는 논밭과 달리 그걸 관리하는 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 원래 지금쯤이면 선배님 말씀대로 다들 나와계신 데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라서요.”
“특별한 날?”
농촌에서 특별한 날이라고 해봤자, 모내기 철, 수확 철. 그리고 계절에 따라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대비 철밖에 없을 텐데. 아니지. 지금 나열한 것들을 하려면 사람들이 더 많으면 많았어야지 이렇게 없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선배의 모습에 박준혁은 이해가 간다며 설명했다.
“아마 지금 가고 있는 곳에 다 모이셨을걸요? 선배님 다른 건 몰라도 먹을 복은 타고나셨네요. 오늘이 미화리 산골 마을 카페 가오픈 첫날이거든요.”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겠지. 하지만 이동민은 박준혁의 설명을 듣고 나자 더욱 혼란스러워졌을 뿐이었다.
“오픈도 아니고, 가오픈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싹 사라진다고? 그것도 카페 때문에?”
**
그 시각 카페 사랑방안은 몰려든 마을 사람들로 인해 테이블이 대부분 차 있었다.
“아이고! 좋다! 그래! 커피는 이런 맛이지.”
할아버지 4분이 앉은 테이블에는 커피와 쌍화차, 대추차, 그리고 오미자차와 한과 한 상 4세트가 놓여있었다.
“뭐꼬? 여기 와이리 좋노? 인테리어가 죽이네!”
초록빛 다기에 담긴 따뜻한 오미자차를 한 모금 마신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정과를 한입 먹으며 말했다.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오미자차의 산뜻함을 정과가 달콤함으로 감싸주는 맛이 일품이었다.
“마. 저 위에 서까래 샌딩질있제? 그건 내가 다했다 아이가!””
쌍화차의 달걀 부분을 호로록 마신 할아버지는 달걀의 신선도가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내는 벽에 퍼티칠 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할 때는 언제 끝나나 했는데 해놓고 나니까 억수로 멋지네. 그체?”
대추차에 수북이 띄워진 견과와 도르륵 말린 대추를 스푼으로 떠 입으로 가져가던 할아버지는 참 보람찼다고 말했다. 그때였다.
-탁.
할아버지들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온 지민이 들고 있던 접시를 내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추가로 시키신 약과 나왔습니다. 아, 강 할머니로부터 전언도 있어요. ‘고만 시키고 작작 먹고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시간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몰려든 손님들로 인해 할머니들과 같이 있던 지민이 서빙과 계산대를 맡았기 때문.
‘내도 주문 좀 받아주소!’
‘내 주문 먼저!’
‘돈 내고 먹겠다는데 왜 주문을 안 받노!’
처음 몇몇 주문은 강 할머니가 받았는데, 주문을 받으랴, 주방에 가서 세팅을 하느라 바쁜 나머지 정신을 못 차리는 할머니의 모습에 지민은 강 할머니가 준 강정을 오독거리며 씹어 먹다 자원했다.
“뭐, 뭐라꼬? 작작 먹으라꼬? 싫다! 내 여기서 오늘 저녁까지 먹을끼다!”
지민에게서 강 할머니의 전언을 들은 할아버지들은 배째를 시전했다.
“맞다! 그 뭐꼬. 뉴스에서 뭐 음료만 하나 시켜놓고 몇 시간 동안 퍼질러 앉아가 있는 사람들 때문에 카페 사장들이 고생이라 카드만. 우리는 계속 시킬 거니까 괜찮지 않나?”
배째를 시전하면서도 주방을 힐끗거리는 모양이 강 할머니의 눈치를 보는 듯했지만, 지민은 그런 할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죠. 이렇게 많이 시켜주시는데···. 다만, 오늘이 첫날이라 정신없어서 그러실 거에요.”
“하기사. 우리가 이날만을 기다렸으니까. 한울이 친구도 한과 먹어봤제?”
“네. 전 일찍 와서 오자마자 먹었어요.”
“그럼 알겠네. 우리가 왜 이렇게 진을 치고 있는지.”
“그럼요. 저도 왔다 갔다 하면서 하나씩 집어먹고 있는데, 쉬는 날에는 여기 와서 공짜로 일하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현재 어쩌다 보니 서빙을 하게 되었는데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할머니들이 고생이라며 입에 하나씩 넣어주시는데, 그게 또 별미였다.
“그래? 일하면 그냥 먹게 해줘? 그럼 나도···.”
지민의 긍정에 솔깃한 할아버지 한 분이 아르바이트에 관심을 가지려 할 때였다.
“뭐라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먹고 집에나 가라. 우리 지민이가 와 이리 안 오나 했드만 여기에 붙잡혀 있었구먼. 지민아, 저런 영감탱이들 말 들어줄 필요 없다. 얼른 온나.”
“아니 우리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는 자신을 영업방해꾼으로 취급하는 강 할머니의 모습에 발끈해 소심한 반항을 해 보았지만.
“쓰읍-!”
“알았다. 얼른 먹고 간다. 팔아준다고 해도 난리고. 근데, 한울이는 어데갔노?”
눈을 부릅뜨며 방울뱀 소리를 내는 강 할머니의 모습에 어깨를 움츠리며 카페의 진짜 주인, 한울을 찾았다.
“한울이 바쁘다. 지금 옆에 직판장 가 있을 구로? 거기 가 보든가.”
“가오픈날이라면서 직판장도 하나? 손님이 있겠나?”
“하이고. 내가 이 말을 오늘 두 번이나 할 줄은 몰랐네. 한울이가 보통 아가. 다 계획이 있을끼다. 그러니까 얼른 가라. 나중에 직판장에 손님들 오면 여기 자리 모자란다.”
강 할머니는 별걱정을 다 한다며 재차 할아버지들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걸음을 옮겨 다른 테이블을 돌기 시작했다.
“안가나! 가라!”
“다 먹었는데 왜 안가노!”
**
강 할머니가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주문 때문에 아침 내내 준비한 한과들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걸 목격하고 마을 사람들을 쫓아낼 무렵.
[산골 장터]
한울은 전쟁터 같은 카페와는 사뭇 다른 공기를 가진 옆 건물 직판장에 와있었다.
“이거 이렇게 쓰면 되나?”
“네. 좋네요.”
나는 심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나무판에 적힌 글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쌈 채소 모둠>
<오이>
오늘치 일은 빨리 끝났다며 직판장으로 달려온 심 할아버지는 내가 상품명으로 적은 나무판 밑에 할아버지만의 코멘트를 달고 있었다. 가령, 쌈 채소 모둠의 같은 경우에는.
<쌈 채소 모둠>
-나 같음 적겨자 하나 더!
오이 4개가 같이 나란히 묶여있을 때는.
<오이>
-등산 갈 때 이만한 게 없지!
등등.
심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의견을 밑에 달아놓으셨다.
“이게···. 괜찮을라나? 사람들이 보고 안 사는 거 아니겠제?”
“아뇨. 원래 인터넷 판매할 때도 비슷한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후기를 많이 보고 사거든요. 예를 들어 저기 할아버지가 적겨자 하나 더 사겠다고 코멘트한 쌈 채소 모둠 사려고 한 손님들 나중에 보시면, 적겨자 하나씩 더 들고 있을걸요? 오이도 여기가 전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하나씩 집어 들 테고. 그럼 순식간에 완판되겠네요.”
“글나?”
“네.”
“오케이! 그럼 알았다. 내가 다른 것도 다 쓸게! 쪼매만 기다리라!”
내 말에 심 할아버지는 신나하며 열정적으로 나머지 나무판들을 들어 자신의 코멘트를 써나갔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씩 웃은 나는 작물 정리를 마치고 허리를 펴 직판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목장 같고 좋네.”
하얀색과 우드톤, 그리고 싱그러운 초록색 화분들로 전통적이지만, 약간은 이국적인 인테리어인 카페와는 달리, 직판장은 전부 나무를 사용했다.
-삐걱.
바닥은 진짜 나무로 마루를 깔았는데, 사람이 밟고 지나갈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감 있었다. 옛날 할머니 집의 마루를 걷는 느낌. 이 나무들은 카페를 만든 집에 있던 마루를 뜯어 옮긴 거라 세월의 흔적이 있어 자연스레 빈티지한 무드를 만들어주었다.
-끼익
“한울아! 이거 여기다 두고 가라고?”
“네 할아버지. 제가 정리할게요!”
“오. 고맙다!”
부드럽게 열리는 카페 문과는 달리 직판장의 문은 옛 나무문을 그대로 살려 여닫을 때마다 바닥과 같이 끼익하는 소음을 자아내었지만, 그 또한 인테리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읏차.”
나는 방금 들어온 작물을 가판대에 올렸다. 가판대 역시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이 나무는 이 집을 철거 할 때 나온 나무들을 재가공해 만든 것이었다.
“한울아? 내가 좀 도와줄까?”
“아뇨. 다했어요. 여기 세팅도 아침에 벌써 노 할아버지가 오셔서 하고 가신 거예요.”
작물들을 가지런하게 가판대위에 올려둔 분은 바로 직판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시는 노 할아버지.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농사라고는 집안 텃밭만 하시는 그분은, 직판장을 맡을 사람을 뽑을 때 제일 먼저 손을 드셨었다.
‘안 그래도 맨날 새벽에 일어나면 할 일이 없어서 멍하니 있었는데, 내가 하꾸마. 작물들만 그 앞에 놓고 가라. 다들.’
그래서 정해진 규칙. 이곳 직판장에서 판매하는 작물은 오직 우리 신비농장의 비료를 쓴 작물들만 판매할 수 있었다. 대신, 작물의 종류는 상관없을뿐더러, 다른 사람들과 중복이 되어도 상관없다. 다만, 새벽 5시 전에 직판장 앞에 두면 노 할아버지가 분류하여 가판대에 올려두지만, 그렇지 못한 건 들고 온 사람이 알아서 정리하기.
“아. 맞네. 그치가 여기 담당하기로 했지. 그럼 판매는?”
“판매는 말이죠···.”
다른 어르신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해 주신다고 하긴 했지만, 역시나. 상주하며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가 오픈 기간 동안 생각해 보죠.”
일주일 정도의 가오픈 기간 동안 상황을 본 후, 사람을 구하거나 할 생각이라고 심 할아버지에게 말할 때였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이 동시에 등장했다.
“사장님! 선배 데리고 왔습니다! 인사하세요. 선배님. 저분이 신비농장 사장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이동민입니다.”
피곤함을 가득담은 낯의 박준혁의 선배가 꾸벅인사를 했다.
“네. 반갑습니다. 김한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분이 바로 제2의 박준혁이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