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소문 (2)
각각 아이들을 한 명씩 대동하고 온 아기 엄마들은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는 강 할머니가 있는 계산대 앞에 섰다.
“규빈 엄마, 뭐 먹을 거야? 여기까지 운전해줬으니까 이건 내가 살게.”
“어머. 승민 엄마. 아까 오는 길에 밥도 사주고, 기름까지 넣어줬으면서 뭘 이걸 또 산다 그래. 이건 내가 살게. 사장님, 여기 뭐가 제일 맛있어요?”
서로 자신이 사겠다고 하던 엄마들은, 우선 메뉴나 골라 보자며 메뉴판을 탐독하면서도 강 할머니에게 메뉴를 추천받았다.
“맛있는 거는 다 맛있지.”
처음으로 마을 사람들이 아닌 외지 사람의 메뉴 추천을 받은 강 할머니는, 침착하게 모든 메뉴가 맛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정말요? 우와. 근데, 여기 진짜 생소한 메뉴가 많네요? 유과랑 약과는 아는데···. 다른 건 하나도 모르겠어요. 매작과···. 는 내가 한식 시험 준비할 때 한번 봤던 메뉴인 것 같고···. 주악? 정과? 이게 다 뭐야?”
“승민 엄마 한식 시험도 봤었어? 어쩐지. 요리를 잘하더라.”
“에이. 수빈 엄마, 우리 집에서 밥 먹어봤으면서 무슨 소리야. 자격증은 장식이지. 장식. 그럼 사장님, 여기 간식들은 양이 얼마나 돼요?”
강 할머니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메뉴판에 있는 한과들을 해석을 하다말고 고개를 들어 다시 할머니에게 양에 관해서 물었다.
“어···. 잠시만 있어 보소. 내 그릇에 담아가 보여 줄게.”
강 할머니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작은 도기에 메뉴판에 단일로 파는 한과를 담아 와 보여 주었다.
“여기 이게 정과. 거기 메뉴판 밑에 보면 정과 종류 정하라고 되어있지예? 정과라는건, 과일이나 견과류, 아니면 뿌리 같은 거 있지예? 그걸 꿀에 푹 절여서 만든 디저트인 거라. 여기 내가 가지고 나온 거는 사과 정과. 이렇게 천원.”
옥빛을 띠는 도기에 담긴 새빨간 껍질을 가진 사과 정과는 과육 부분까지 껍질이 지닌 붉은 색이 수묵화처럼 스며들어있어 그 모양을 보는 것만 만으로도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어머 예뻐라. 정과 라면 홍삼 정과만 알고 있었는데. 다른 재료로도 꿀에 재면 그걸 정과라고 하나 보다. 그렇죠?”
보기만 해도 새콤달콤할 것 같다며 정과를 주문시킨 아이의 엄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과의 종류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따마.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아네. 맞다. 정과랄게 특별할 게 없다 아입니까. 그냥 다 뭐든 꿀에 절이면 그게 정과라. 낸중에 도라지 철 되면 도라지정과도 만들 거니까 그때도 와보이소.”
“어머. 도라지정과, 저 선물로 들어와서 딱 한 번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더라고요.”
한번 설명했을 뿐인데 정과에 대한 이해를 한 번에 한 아이의 엄마에 강 할머니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앞으로 선보일 정과 재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픈 전에 메뉴별로 촬영해서 메뉴판에 사진을 넣을 필요성도 있겠네.”
나는 커피류를 제외한 나머지 메뉴들을 생소한 눈으로 보는 손님들의 모습에 메뉴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시각적인 정보도 추가할 것을 메모했다.
지금처럼 생소한 한과의 이름만 메뉴판에 적혀 있으면, 설명이 길어질 수밖에 없게 되고, 지금은 괜찮겠지만, 같은 설명들을 반복해서 하게 되면 이건 결국 노동이 되어버린다. 그런 일은 사전에 막는 것이 일하는 사람으로서도,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좋았다.
일하는 사람은 노동을 덜 수 있어 좋고, 손님의 입장에서는 주문 시간이 줄어 들을 수 있어 좋으니 말이다.
“그럼 저희 한과 한 상 2세트랑 유자차, 귤피차, 그리고 카페 라테 2잔 주문할게요.”
손님들은 고심 끝에 한과를 모두 즐길 수 있는 세트와 전통차 2잔, 그리고 커피 2잔을 시켰다.
“잠시만 있어 봐요. 내가 오늘 처음이라 이게 좀 느려.”
여태까지 포스 주문은 지민이 한 터라 강 할머니가 포스 주문을 넣는 건 처음. 할머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손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네.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다행히 손님은 조금 느린 할머니를 이해해 주었다. 할머니는 손님의 응원에 천천히 포스기 메뉴에서 주문받은 메뉴를 찾아 입력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새댁. 어디 보자···. 한 상 2세트가···. 요있네. 유자차랑 귤피차는 따뜻한 거가?”
메뉴 세팅은 오픈 전 아이스와 핫 별로 모두 해 둔 터라, 강 할머니는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누르기만 하면 되었다.
“네. 전부 따뜻한 거로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어요. 귤피차, 유자차, 카페 라테···. 다 해서 38,000원!”
강 할머니는 조금 느리긴 했지만, 끝내 주문에 성공하셨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은 난관이 있었다.
“네. 여기요.”
그건 바로 결제.
“으잉? 핸드폰?”
요즘 어르신들은 예전과 달리 현금 대신 카드도 종종 쓰시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어르신이 현금으로 계산으로 하시곤 한다. 여태 어르신들이 결제한 수단도 모두 현금인 걸 보면 우리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카드보다는 현금이었다.
그런데 지금 손님이 결제한다고 강 할머니에게 내민 것은 바로 카드가 화면에 띄워진 핸드폰. 카드 결제도 오픈 전 연습을 통해 습득한 강 할머니에겐 핸드폰 결제는 갑자기 닥친 폭탄과 같았다. 손님의 인내심이 떨어지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 시한폭탄.
“그러니까···. 이게···.”
강 할머니는 일단 핸드폰을 건네받았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미처 내가 알려드리지 못한 것을 탓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가려고 할 때였다.
슝.
의자에서 일어나는 내 옆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민이 강 할머니 옆에서 핸드폰을 대신 받아 들었다.
“할머니, 이건 카드 결제 일단 누르시고요, 손님, 여기에 핸드폰 대 주시겠어요?”
능숙하게 강 할머니에게서 받아든 핸드폰을 손님에게로 넘긴 이동민은, 할머니에겐 포스 조작을, 손님에게는 카드 리더기에 핸드폰을 대게 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오?”
마치 이곳에서 몇 년은 일을 한 직원처럼 능숙하게 손님의 영수증 필요 유무까지 물어 계산을 마친 이동민의 모습에 나는 감탄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할머니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밀려드는 주문에 가뜩이나 주방 일도 바쁜데, 계산까지 맡기는 건 조금 힘이 들어 보이긴 했다.
거기다 시골이라 어르신들은 주문하고, 다시 주문한 음료를 가지러 오시는 게 익숙지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도 많았고.
나는 강 할머니를 주방으로 보낸 뒤, 뒤이은 그룹들의 주문까지 받고, 주방으로 전달해 준 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이동민을 붙잡고 물었다.
“저기, 아르바이트해 볼 생각 없어요?”
**
“아르바이트요?”
이동민은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에게 아르바이트를 제의하는 신비농장 사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4대 보험.
연차수당 지급.
연차 보장.
퇴직금 보장.
주5일, 일 6시간 근무.
월 250
예전, 박준혁이 신비농장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을 구한다며, 단톡방에 올렸던 글이었다. 일 6시간 근무 중에 점심시간도 있는 것도 놀라울진대, 연차도 챙겨주고, 퇴직 시 퇴직금도 준다는 말에 같은 랩실에 있던 동기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지원서를 넣었더랬다. 물론 한 명도 합격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때 이동민 또한 굉장히 열정적으로 자소서를 썼던 만큼,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실망을 금치 못했었다.
외부 사람이 듣는다면, 어떻게 나중에 졸업만 하면 유수 기업에서 스카우트해갈 대학원생들이 이런 알바에 목을 매겠냐고 하겠지만,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탈모를 완벽히 해결한 제약회사는 없었다.
그러니까, 신비농장의 말도 안 되는 알바 대우도 알바 대우지만, 합격할 경우 모두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교수님을 구슬려 박준혁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
그런데 그렇게 원하던 제의를 신비농장의 사장에게 듣다니. 꿈인가? 이동민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한울을 바라보았다.
“네. 아르바이트요. 아까 보니까, 한과에 대한 지식도 뛰어나신 거 것 같고, 포스도 잘 사용하시고, 손님 응대도 뛰어나신 것 같아서요. 할머니도 잘 도와주시기도 했고요.”
“아아···.”
할머니를 잘 도와주어서라니! 이동민은 어려서 부터 자신을 외할머니댁에 자주 데려가 준 부모님께 감사를 표했다. 외할머니 덕분에 세상 모든 할머니에게는 친절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으니까.
한과의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호기심이 컸다. 농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옛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발전시켰고, 그에 따른 생활방식을 연구하다 빠지게 되었다.
포스를 다루는 것은 어릴 적 경험 삼아 해보았던 카페 아르바이트 덕분이었고, 손님들을 응대하는 기능은···. 망할, 아니 이제는 고마운 교수님 덕분이었다.
하루에도 365번 기분이 바뀌는 교수님을 모시다 보면, 일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 따위는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아르바이트 시간은 이동민 님의 과제에 부담이 되지 않은 선에서 조율할 생각입니다. 시급은 2만 원이고요.”
“시급이 2만 원이요? 1만 원이 아니고요?”
“네. 아시다시피 저희 동네가 접근성이 안 좋아서, 시급을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줍니다.”
시급을 준다니. 그것도 법정 시급보다 2배인 2만 원을 준다니! 이곳은 천국인가?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럼 신인 것인가?
이제서야 이동민은 박준혁이 그렇게 기를 쓰고 신비농장을 돕고, 서울로 올라오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퇴근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고, 당연히 법정 시급이라는 존재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옥에서 해방이 되어 이런 파라다이스 같은 곳을 찾았는데, 돌아오고 싶을 리가.
“네! 하겠습니다! 얼마든지 시켜주십시오!”
이동민은, 지금 이 아르바이트함으로써 교수님이 자신에게 내린 지령이 늦어지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었다. 여기까지 내려온 것, 어쩌겠나. 절대 엉덩이가 무거운 그 교수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신비농장의 사장이 자신의 연구에 필요로 하다면, 작물들 샘플과 토양도 제공해 준다니, 아주 오랫동안은 교수의 눈을 피해 박준혁처럼 이곳에서 파라다이스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지금부터 주문과 서빙 좀 맡아서 해보실래요? 이동민 님의 주 역할은 주문과 서빙이지만, 할머니들이 힘겨워하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그 또한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만약 동민 씨 선에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하시고요.”
“어? 그럼 사장님은 여기 안 계시는 건가요?”
“네. 저는 다른 곳에도 하는 일이 있어서요. 안타깝게도 이곳은 거의 이동민 씨가 상주할 겁니다. 아, 여기 근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어후. 괜찮다마다요.
사장이 없는 직장이라니.
이 무슨 교수님 없는 랩실과 같은 평화로운 곳인가!
“무조건 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