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1)
“으하하하!”
초반의 이 대리는 빨랐다.
호주 워홀을 갔다 온 경험이 있다고 하더니. 그곳에서 블루베리 따기만 하다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속도였다.
[저 바보 인간! 인간치고는 빠르다! 하지만 나, 위대할 노을을 이길 수는 없다! 컁!]
한번 따는 시범을 보여줬을 뿐인데 가공할 속도로 청매실을 수확하는 이 대리를 보면서 노을이 내 어깨에서 본격적으로 점프하여 매실나무를 털기 시작했다.
[컁!!!]
노을은 밭을 갈거나, 작물을 심기 위해 구멍을 뚫을 때나 사용하는 발톱을 꺼내 하늘 위로 높이 들었다.
파칭.
어느 장인이 만들어도 노을의 발톱의 날카로움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한 노을의 발톱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한울! 내가 이기게 해 주겠다! 컁!]
도대체 TV에서 무엇을 보는지. 아주 완벽히 한국식 위너 사상에 적응한 노을이 나를 보며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솜털이 보송한 앞발을 야무지게 쥐며 콧김을 킁! 내뿜었다.
“천천히 하자. 조심히.”
나는 열정 과다로 인해 혹시라도 어렵사리 키운 매실나무를 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어 노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물론, 상하더라도 노을이 복구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무리하지 않는 게 가장 베스트가 아니겠는가.
“괜찮습니다! 하하! 저는 단순 노동이 체질에 맞는 것 같습니다!”
노을을 진정시키려는 내 말에 앞에 있는 나무의 청매실을 수확하던 이 대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걱정 마라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위대하고 똑똑한 정령 노을이다! 과일만 완벽하게 딴다! 봐라! 한울!]
노을 또한 걱정은 접어 두라며 가장 가까운 매실나무 위에 올라가 본격적으로 청매실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투둑!
본격적으로 노을이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청매실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그저 발톱을 과실이 달린 꼭지 부분을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청매실이 노란 바께스에 우수수 떨어졌다. 가공할만한 속도였다.
“허? 이 소리는! 과장님도 블루베리를 좀 따 보셨나 봅니다? 하지만 전 사과 농장에서도 일한 전적이 있습니다! 자두 농장도! 감 농장도!”
청각으로만 내가 따는 청매실의 양을 가늠한 이 대리가 지지 않겠다는 듯, 손은 쉴 새 없이 놀리면서 자신의 이력을 읊었다.
“그게, 1년 안에 가능한 일이야?”
내가 알기로는 워홀이라 불리는 워킹 홀리데이의 비자 기간은 1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대리가 말한 것들을 정말로 모두 했다고 친다면, 1년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아! 농장에서만 일하니까 비자를 연장해 주더라고요! 일 잘한다면서!”
“너 일하는 직장 주변에 뭐가 있었는데?”
“들판이랑 소? 양도 있었습니다!”
“마트는?”
“마트는 날 잡아서 같이 일하는 사람 차 타고 갔다 왔습니다! 감 농장은 운이 좋았죠. 차 타고 30분만 가면 마트가 있었으니까요!”
“그래. 얼른 따.”
“네! 알겠습니다!”
참. 그러니까, 호주 워홀을 갔다 왔는데도 불구하고 할 줄 아는 영어가 이상하다 싶었다.
쉽게 말해 이 대리는 호주에 가서 지금 이곳처럼 깡촌에 박혀 블루베리나, 감 따위나 따는 외국인 노동자 역할을 무려 2년 동안이나 하고 왔다는 셈.
“노을아, 어떻게 조금 봐주면서 할까?”
허허벌판에서 마트를 가기 위해 자동차가 있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하루하루를 손꼽아 기다렸을 이 대리를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아무리 젊어서 고생은 한다고 하지만, 할머니가 그러셨다.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쪼잔하게 굴면 안 된다. 그게 하루 도와주는 사람이라도. 잘 맥이고, 잘 쳐줘야 한다. 그 사람도 먹고살라고 하는 기고, 내는 일 해 주는 사람 덕분에 몸 안 아파도 되고. 안그나?’.
다른 건 몰라도 나를 대신해서 일을 해 주는 사람에게는 뭐든 후해지라고. 물론 이 대리가 내 일을 대신에 해 주는 건 아니지만(매실도 포동이가 슬쩍 와서 한꺼번에 따버린다) 그래도 그 콩물 하나 얻겠다고 저러는걸 보니, 안쓰러웠다. 하지만 우리 똑똑하고 위대한 정령, 노을의 생각은 달랐다.
[컁! 아니다! 승부는 정정당당한 법!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정정당당.
뭔가 발톱 하나로 땅을 가르고, 매실을 순식간에 하는 노을의 멘트로는 굉장히 어폐가 있지만, 노을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래. 최선을 다 해보자.”
[컁! 알았다!]
**
1시간 후.
노란 바께스를 꽈 채운 이 대리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으아아! 끝!!”
얼마나 수확을 하며 집중을 했었는지, 밀짚모자 밑으로 보이는 이 대리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되어있었다.
아무래도 저 밀짚모자는 영영 이 대리의 것이 될 것 같다.
“과장님도 끝내셨습니까? 제가 너무 빨리해서 과장님 면을 죽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아직까지 자신의 노란 바께스에 가득 담긴 청매실을 뿌듯한 눈으로 보느라 내 바께스를 보지 못한 이 대리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음···. 글쎄? 뒤를 좀 돌아볼래? 이 대리?”
나는 이미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게 뻔한 이 대리에게 뒤를 돌아볼 것을 명했다.
“하하. 제가 그래도 열매 따는 건 경력이 좀 있으니···. 조금 덜 채우셨어도 제가 이해하겠습니다······. 아?”
몸을 돌리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허세를 부리던 이 대리는 내 앞에 조르르 놓은 노란색 바께스‘들’을 보며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입에 파리 들어간다. 입 닫아라.”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는 이 대리의 모습은 썩 보기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대리는 내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내 앞에 놓은 노란 바께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아, 아, 니. 이, 이, 게, 무슨.”
종국에는 말을 더듬기까지.
“그래. 이해해. 하지만 전문 농사꾼이랑 일반인이랑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아, 여기서 말하는 전문 농사꾼은 당연히 노을이다. 나는 노을이의 비하면 정말 이 대리보다 못할 수도 있다.
여하튼. 노을은 내 어깨 위에서 두 발로 선 상태로 두 앞발을 허리에 얹고 승리의 자세를 취하고는 외쳤다.
[캬하항! 내가 바로 전문 농사꾼 노을이다!]
마치 농업의 사이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도무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 대리의 모습에 노을은 두 앞발을 모아 컁컁거렸다.
“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시간 만에 3박스를 채우다니···.”
놀랍냐? 나도 놀랍다.
나는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리는 이 대리를 보며 연민의 미소를 보냈다.
“그, 그럼, 제, 콩물은···. 어흑.”
이 대리는 제가 자신 있었던 분야에서 진 것보다, 콩물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 억울한 듯, 콧대를 잡고 커흑, 거렸다.
멀대같이 큰 남자의 눈물을 보기는 싫었기에, 나는 내 어깨에서 뾰족하고도 촉촉한 코를 하늘 높이 여기저기 뽐내는 노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려가자. 여긴 청매실이라 진짜 노동만 했지, 체험 농장은 못 했잖아? 내려가면 콩이 많은 곳이 또 있지.”
“콩이 많은 곳이라면···. 설마, 서리태···?”
“뭐, 다른 콩들도 많지만, 서리태가 대부분이지?”
밑의 밭으로 가면 서리태가 대부분이라는 내 말에 이 대리는 나를 구세주라도 되는 무릎을 털썩 땅으로 내리며 말했다.
“오오오! 김한울 과장님! 오늘도 믿습네다!”
‘오늘도 믿습니다’라. 오랜만에 들어도 참, 괜찮은 문장이었다.
“그래. 그 믿음을 내가 져버리면 안 되겠지. 가자. 이 대리가 그토록 원하는 서리태가 있는 곳으로.”
**
“흐흐흥. 흐흐흥. 흐흥!”
콩만 재배하고 있는 비닐하우스 안.
곰 같은 덩치를 소유하고 있는 남성의 콧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형님, 저분 진짜 괜찮은 사람 맞습니까?”
천국이라도 온 듯, 옆에 소쿠리를 낀 채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는 이 대리를 보며 박준혁이 내게 바짝 붙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 괜찮아. 겉으로는 좀 이상해 보여도, 애는 착해.”
“에? 그래도···. 형님 전 회사 사람이라면, 식품 회사 사람일 텐데···. 만약에 이 콩을 가져가서 뭐라도 하면 어쩝니까!”
무슨 걱정 때문에 그렇게 불안한 눈을 하고 있나 했더니. 자신의 서리태를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함에 억울함을 피력하는 거라 생각했건만. 서리태 유출을 걱정하다니.
“준혁아. 서리태 유출은 네가 제일 먼저 한 거 기억하니?”
그렇다. 박준혁은 처음 콩물을 먹은 후 그 효과를 몸소 체험한 뒤, 아깝지만 그래도 신비농장 스토어에 올릴 시험 성적서를 요청하기 위해 서리태 ‘한 알’을 이동민에게 보낸 전적이 있었다.
“아니, 그때는 진짜 제가 저희 농장 작물들 전부다 데이터베이스 만들어서! 아주 스토어에 성적서라는 성적서는 다 올리려고 했던 거죠. 그리고 그때 서리태 한 알 밖에 안돼서 기본 검사밖에 못 했었다고 합니다.”
“그 기본 검사에서도 아주 놀라운 결괏값이 나왔다고 했었지?”
“....네.”
서리태 한 알에서 보통의 서리태가 지닌 영양소들의 수치보다 몇백, 몇천 배가 더 나왔다고 들었다. 연구실에서는 오류가 분명하니, 정확한 실험을 위해 서리태 시료를 당장 더 보내라고 했지만, 박준혁은 끝내 보내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렇게 귀한 걸 교수에게 알리기는 아까웠다고 했다.
“쟤도 마찬가지야. 서 팀장이라고 아주 역대급 낙하산이지만, 아만티움으로 만들어진 낙하산이라 끊어내지도, 불태우지도 못하는 상사를 받들고 살고 있거든.”
그래서 나는 박준혁에게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주었다. 이 대리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삶을 하루하루 지키고 있는지.
“... 어후. 개XX 같은 XX네요! 아니 어떻게 그런 짓을···! 그런 사람은 저희 교수님만 있는 줄 알았는데···. 후. 제가 그 기분 잘 알죠. 저런 사람은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예민했습니다. 가서 응원이라도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내 말을 들은 박준혁은 순순히 이 대리에 대한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고 이 대리에게 다가갔다.
그래. 둘 다 맑은 눈의 광인들이니 대화를 하다 보면 통하는 것이 많을 거다. 서 팀장의 일화를 2% 풀어놓은 것만으로도 이 대리에 대한 박준혁의 경계심을 해제시킨 나는, 노을과 함께 작물의 상태를 살피느라 쭈그렸던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한 소쿠리씩만 따고 나면 사랑방으로 와. 거기로 가 있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준혁이는 문단속하는 거 잊지 말고.”
“넵! 여부가 있겠습니까!”
옛 썰!
내 말에 걱정하지 말라며 경례를 붙이는 박준혁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내 어깨에서 꼬리를 살랑대는 노을과 함께 콩이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나와 사랑방으로 걸음을 향했다.
“이동민은 잘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