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2)
이 대리를 박준혁에게 맡긴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간 사랑방 카페로 향했다.
-디디링~
옛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사랑방의 나무문을 열자, 어김없이 맑은 풍경 소리가 나를 반겼다. 사랑방 안에 깔린 잔잔한 음악과 창문을 열어 살랑거리는 하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봄볕은 이 공간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호호호. 너무 재밌다. 한과에 이런 백그라운드가 있는지 몰랐네요. 설명 정말 고마워요.”
잔잔한 음악 소리를 뚫고, 즐거운 대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아이 셋과 엄마 둘로 이루어진 테이블에서 나는 소리였다. 대화를 주도하는 건 다름 아닌 이동민.
“별말씀을요. 혹시 더 주문할 게 있으시면 조금 빨리 카운터로 가서 결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지금 한과 세트가 10개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 그러면 안 되지! 당장 결제하러 간다!”
“엄마! 나는 참새가 나무에 앉은 거랑 비슷하다는 거!”
“나는 사과같이 생긴 거!”
이동민이 해준 한과에 얽힌 이야기가 꽤나 재미있었는지, 한 손에 약과와 꽃처럼 생긴 매작과를 들고 있던 아이들이 먹이를 달라는 병아리처럼 제 엄마들에게 삐약 삐악거렸다.
“아이들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카드 주시면 제가 결제해서 주문 넣겠습니다. 포장이시죠?”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계산대 앞, 직원들을 위한 테이블에 자리한 나는 이동민의 영업 실력을 실시간으로 보며 감탄했다.
“어머. 그럼 저야 정말 감사하죠.”
“그럼 저도 한 세트 더요! 우리 집 아기 아빠한테도 줘야겠어. 요즘 힘들어하던데, 이렇게 맛있는 거 먹으면 좀 나아지겠지?”
“참. 은지네 엄마는 아직도 신혼이라니까. 호호호.”
정말로 한과 세트가 10세트가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순식간에 3세트나 팔아버리는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평할 수 있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엄마들에게서 카드 두 장을 받아든 이동민은, 이런 것쯤은 일상이라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계산대를 향해 갔다.
“어? 사장님 오셨습니까!”
직원용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를 발견한 이동민이 눈을 크게 뜨며 인사했다.
“그렇게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편안하게 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처음 인사를 나눈 뒤, 박준혁보다 4살은 더 많은 이동민의 나이를 안 나는 말을 편안하게 하라고 제안했었다. 내 나이와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나이가 조금 많다고 해서 높임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요. 일하는데 불편한 건 없고요?”
이미 조금 전 이동민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불편은커녕 즐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또 사람 속은 겉모습과는 다를 수 있으니까.
“네. 확실히 제가 적성을 찾은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카페 알바를 하고 싶었거든요. 교수님 커피 셔틀 하면서 카페 갈 때마다 그 향긋한 원두 향에 둘러싸여 이렇게 갈색 치마를 단정하게 입은 직원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연구실에서 썩어서 교수님의 커피 셔틀이나 하는 제가 참···. 비교가 됐었죠···.”
이동민의 내 질문에 아련한 눈빛으로 천장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나무색 팬을 보며 대답했다. 언젠가, 연구실에서 탈출하게 된 후 기업 연구원으로 취직해 고액의 연봉을 받고, 그 연봉을 차곡차곡 모아 종국에는 카페를 열고 싶었다고 말하는 이동민의 계획은 꽤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집 나간 노예, 아니, 연구실을 탈출한 준혁이를 따라오니 이런 기회가 생기기도 하네요.”
“아. 그것참 다행이네요.”
얼렁뚱땅 알바 제안을 하여 사랑방 카페의 직원이 되긴 하였지만, 이동민의 반응을 보니 일단 만족도는 최상인 것 같았다. 계속 들어주었다가는 이동민의 말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주제를 돌렸다.
“점심은, 드셨나요?”
현재 꽃분이 할머니는 장 이장님의 점심을 챙겨주시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마찬가지로 강 할머니도 점심을 드시러 집으로 가 지금 이곳엔 이동민밖에 없었다.
“네. 할머니들께서 집에 가시기 전에 주방에서 한 상 가득 차려주시고, 할머니들 밥 먹으러 갈 때까지는 쉬라고 하셔서 쉬기도 했습니다.”
“아하.”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어르신들은 끼니를 거르는 것을 정말 큰일이 난 것처럼 생각하시곤 하신다.
‘지금 안 먹은 한 끼는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어.’
어릴 적 아침잠이 많은 나를 어르고 달래 일으켜 밥상 앞에 앉히며 할머니가 한 말이었다. 아침 일찍 등교를 할 때는 나와 마주친 모든 어르신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얼른 나에게 먹을 것을 쥐여 주기도 했다.
‘얼라들은 많이 먹고, 건강해야 된다이? 니 또 밥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왔제? 가면서 이거 먹어라.’
그렇게 어르신들의 보살핌을 받아서였을까. 다행히 나는 어르신들이 바라는 데로 쑥쑥 커 키로는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크으. 집밥을 먹어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었는지···. 그 얼큰한 된장찌개에 나물들까지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서 주방에 차려 주시는데···. 아, 이건 회사 식당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된장찌개에 들은 고기는 야들하고, 제가 여태까지 먹어본 된장찌개 중에 제일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나온 나물들이 이야···. 진짜 이 동네의 땅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전부 향이. 향이···. 크으···!”
어르신들의 그 신념이 아마 이동민에게도 적용된 모양. 혹여라도 냄새가 날까 봐 주방 후앙과 창문을 열어놓고 된장찌개를 먹었다는 이동민은 입맛을 다시며 이제는 매일매일 삼시 세끼가 기대되어 잠에서 일찍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강 할머니가 손맛이 좋으시죠. 손도 크시고.”
모두가 예상한 대로 이동민은 곧장 강 할머니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할머니는 또 다른 일꾼. 아니, 하숙생이 들어왔다며 좋아했다. 힘드시지 않으시냐고 했더니 양갱을 만들던 주걱을 휘두르시며 말씀하셨다.
‘밥상에 밥숟갈 하나만 더 올리면 되는데 뭐가 힘드노! 이번에 온 학생은 대학원에서 농사만 배워서 그런지 내 텃밭을 연구하겠다고 지가 다 한다! 준혁이 비료 만드는데도 가서 같이 쑥덕거리는 거 같고. 아무튼, 내는 힘든 거 하나도 없다! 집이 북적거리니까 좋기는 하다.’
어쩌다 받은 하숙생들이 모두 농업을 연구하는 대학원생들이다 보니 할머니는 한과를 만들면서도 당신의 텃밭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굉장히 만족스러우신 듯하였다.
그러고 보니, 강 할머니도 하숙하기 전보다 더 얼굴이 밝아지셨다.
“여기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준혁이가 연구실로 다시 오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더라고요. 저도···.”
입맛을 다시며, 내 말에 동의하던 이동민이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려 할 때였다.
-디디링~
“여기, 주문할게요!”
맑은 풍경 소리가 울리며 한 무리의 손님들을 쏟아냈다.
**
손님들의 주문 러쉬가 지난 후.
“후. 사장님이 도와주셔서 살았습니다.”
점심시간이 다른 할머니들보다 빠른 이 할머니와 함께 커피를 뽑고, 한과 세팅을 끝낸 이동민이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뇨.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요.”
내가 여기 사장인데. 바쁘면 일손을 보태는 게 당연했다.
“오···. 우리 교수님이 사장님의 반의반에 반만이라도 닮았었더라도···. 아니, 손톱만큼만.”
이동민은 당연하다는 내 말에 감동하였는지, 나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우러러보았다.
“하하. 할머니, 며칠 세에 엄청나게 빨라지셨는데요?”
나는 그런 이동민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무시한 채, 오늘의 에이스. 이 할머니를 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내가 원래 좀 손이 빠르다 아이가? 호호호.”
내 칭찬에 기분이 좋으신 이 할머니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머지 한 손으로는 옆에 있는 이동민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이 할머니가 웃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으윽. 할머니, 저 팔 부러져요!”
“내 힘이 을매나 약한데 팔이 뿌라진다고? 아이고. 안 되겠네. 가만있어봐라. 내가 오늘 저녁에 곰 고와서 줄테니까 강 할매한테 데워 달라고 해서 먹어라? 알았제?”
팔이 부러지겠다며 엄살을 피우는 이동민의 모습에 이 할머니는 이동민을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처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 정도는···.”
이동민도 팔 한번 맞았다고 뼈가 아직 덜 여문 미취학 아동 취급을 받는걸 당황해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결정한 이 할머니를 막을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됐다. 사람은 자고로 나이가 들수록 뼈가 튼튼해야 하는 거라. 젊다고 막 잘 안 먹고 그러면 나중에 늙어서 뼈에 구멍이 숭숭 나요. 우리 남편도 내가 젊어서부터 몸에 좋은 거 끓여줘 가 저렇게 건강하지 않나. 그러니까 해주는 거 무라? 알았제? 니는 지금 삐쩍 골아가, 많이 무야 된다. 그리고···.”
“네···.”
이 할머니에게 손사래를 치던 이동민은, 삐쩍 골았다는 할머니의 말에 뼈를 맞은 듯, 손을 털썩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저 커피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이 할머니에게 죽도 못 쓰고 K.O.패를 받아 한쪽에 쓰러져있는 이동민에게 딱한 눈빛을 보낸 뒤, 계속해서 건강해지는 비법을 설파하며 잔소리를 쏟아내는 할머니로부터 이동민을 구해냈다.
“아이고마! 당연하제! 사장이 달라고 하면 당연히 줘야제. 뭐 마시고잡노?”
다행히 이 할머니는 내 부탁에 바로 이동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음···. 아이스커피?”
“아이스커피? 있어봐라. 내가 또 그건 기차게 잘 만들제! 크림이···. 아이고마! 벌써 다 써버렸네.”
내가 방금 이 할머니께 부탁한 커피는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독일식 아이스커피. (Eiskaffee)였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안 모자라세요?”
“어. 그거는 저 냉동고에 아직 있드라. 네가 말한 대로 하나 꺼내서 쓸 때마다 꼽표 치고 있다.”
독일식 아이스커피의 ‘아이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얼음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뜻했다. 그러니, ‘아이스커피’란, 아이스크림을 올린 커피이다.
“할머니! 만드시는 김에 제 것도···. 크림은 제가 치겠습니다!”
설명만 듣는다면, 자칫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부어 먹는 아포카토(Affogato)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스커피와 아포가토는 달랐다.
“크림을 니가 쳐준다고.? 그라믄 나야 좋제.”
“넵! 얼른 치겠습니다!”
우선 아이스커피는 에스프레소를 뽑은 뒤, 차가운 물을 적당히 섞어 잔에 붓는다. 커피가 준비되면, 커피가 있는 잔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스쿱을 퍼서 조심스럽게 넣는다.
“자. 아이스크림 다 넣었다. 다 됐나?”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의 유리잔에 커피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모두 넣은 이 할머니가 이동민에게 크림이 완성되었는지 물었다.
-위이잉이.
고속으로 돌려지던 휘핑기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나 싶더니, 이동민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 완료했습니다.”
“아이고. 잘했네. 농도가 딱이다. 설탕 넣었제?”
“네. 유기농 설탕으로 넣었습니다.”
“잘했다. 잘했어.”
이 할머니는 적당히 단단한 동시에 크리미한 생크림 텍스처를 확인한 뒤, 마음에 쏙 든다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담긴 잔 위에 하얀 생크림을 넉넉히 올린 이 할머니는, 설원처럼 폭신해 보이는 생크림 위에 다크 초콜릿 덩어리를 강판에 갈아 올렸다.
“이제 초콜릿까지 뿌리면···. 끝이다!”
이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커피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생크림과 초콜릿까지 올려져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완성품을 내밀며 활짝 웃으시며 말했다.
“함 잡솨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