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115화 (115/163)

함께, 또 같이 (1)

장 이장은 옆에서 들리는 물음에 감았던 눈을 가만히 뜨고는 끔뻑거렸다.

“내 이야기?”

“예. 어르신.”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홍경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붉은 게 또 훌쩍이고 온 모양.

에잉. 사내 자식들이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는. 장 이장은 뒤로 젖혔던 자세를 바로 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다식을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던 속담이 피부로 닿는 순간이었다.

“뭐, 내 이야기라고 해봤자, 별거 없는데? 노인네 얘기가 뭐가 그리 재밌으려고.”

장 이장은 깊숙한 주머니에 다시금 손을 넣어 혹여나 남은 다식이 있을지 뒤적거리며 여상하게 말했다.

“그래도···. 보통은 어르신 나이 때 되면···. 아, 이상하게 듣지 마시고. 원래 은퇴하시고 노년을 즐기는···. 그런···.”

홍경우는 자기 생각과 달리 심드렁한 장 이장의 모습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오해 안 한다. 어디 보자···. 내가 왜 여기를 왔느냐면은···.”

오해하지 말라며 허둥거리는 홍경우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장 이장은 다식을 감싼 포장지를 뜯으며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래. 나 때는 말이다. 전기가 없었어! 다들 호롱불이라고 아나?”

그리고는 아주 오래된, 하지만 아직도 어제같이 생생했던 기억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

“순택아!! 소 풀 먹이러 갔다 온나!”

장 이장, 그러니까 장순택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예. 다녀오겠심더.”

학교를 다녀오면 소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 풀을 먹이는 게 어린 장순택의 일과 중 하나였다.

-음머어.

“그래. 많이 무라.”

적당한 곳에 가 소를 풀어놓은 장순택은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로 가 앉았다. 소가 배가 부르게 풀을 뜯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낮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이야. 이게 뭐야.”

하지만 어린 장순택의 생각은 쉬려던 나무에 다가가면 갈수록 풍기는 맡아지는 달콤한 냄새에 바뀌었다.

“아직 남은 게 있네.”

때는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피부를 스치는 가을. 넝쿨 열매인 으름이 산 곳곳에서 익을 시기였다.

“음. 맛 좋다.”

키위처럼 갈색의 껍질은 가진 으름은 잘 익으면 한쪽이 세로로 터지며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길쭉하게 생긴 하얀 과육은 씨를 한가득 품고 있지만, 달콤한 맛 덕분에 씨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엇차. 왕건이.”

익으면서 껍질을 벌리는 으름은 새와 벌레들이 특히나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였다. 딱딱한 껍질을 깔 필요도 없이 알아서 익었다고 입을 딱딱 벌려주니 가서 먹기만 하면 될 일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른 선객이 파먹지 않은 온전한 으름을 발견하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흐흐흥~”

입에서 사르르 녹는 달달한 과육을 먹고 있자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크흠. 아무도 없제?”

씨를 땅에 투두둑 뱉은 그는 괜스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머어.

하지만 이곳은 깊은 산속.

사람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었다. 제 주위에는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밖에 없는 걸 확인한 어린 장순택은 옆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스읍.

숨을 내쉬며 감았던 눈을 뜬 장순택은 어깨를 들썩이며 어젯밤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길가를 밝히는 불빛 아래~”

들썩들썩.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나무 그늘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 문뜩 바람이 불어 장순택에게 그늘을 선사한 나무를 흔들었다.

싸아아-

바람결에 흔들린 나뭇가지는 내리쬐는 햇볕에 틈을 내주었다.

“나만을 비추는 가로등~”

틈 사이로 비친 햇빛은 마치 핀 조명처럼 장순택을 비추었다.

“라라라~ 라라라~”

눈을 감고 노래에 푹 빠진 장순택은 그렇게 제 눈 위를 어룽어룽 비추던 해가 질 때까지 노래를 부르곤 했다.

“뭔 놈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나! 어서 가자!”

그렇게 매일, 장순택은 풀밭을 무대로 삼고, 소를 관객으로 두고는 저만의 콘서트를 했었다.

*

“이야. 발성 연습은 제대로 하셨겠네요.”

장 이장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끝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홍경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롬! 사람도 없지, 탁 트였지. 노래하기 딱 이었지! 근데 내가 이번에 우리 마을에서 더 좋은 곳을 찾았다 아이가!”

“더 좋은 곳이요?”

“고롬. 폭포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그 안에 들어가서 발성 연습하면 딱일끼라!”

홍경우의 반응에 장 이장은 신이 나서 최근 발견한 폭포에 대해 말했다.

“예? 폭포에서 발성 연습이요?”

폭포라는 말에 양재성이 듣기만 해도 추운 것 같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큰 폭포 소리를 뚫고 내 소리가 나올 수만 있다면 그 추위는 이길 수 있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추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장 이장은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다.

“폭포를 뚫고 나오는 거면···. 발성이 아니라 득음 같은데···. 그리고 가수는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요···. 너무 춥지 않을까요? 폭포는···?”

남자라면, 추위 따위는! 이라며 스리슬쩍 팔을 걷어붙이는 장 이장의 모습에 양재성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폭포수를 맞고 발성이 좋아진다면 좋았지만, 아무래도 추운 건 별로였다. 누가 효과를 봤으면 몰라도.

혹시 어르신은 효과를 보셨냐며 물었더니, 당당하게 ‘남자는!’이라고 외쳤던 어르신이 돌연 걷었던 소매를 다시 내리더니 작게 말했다.

“아니. 아직 춥다. 내는 여름에나 해볼라고.”

“예?”

잠깐 전까지 그깟 추위! 를 외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장 이장의 모습에 양재성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아이고 허리야. 갑자기 왜 허리가 아픈 건 같지?”

그런 양재성의 질문을 못 들은 척, 장 이장은 괜히 등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늙으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도 조심해야지. 암. 내는 나이가 들어서 잘 못가지만, 자네들은 갈 수 있을 거로? 암. 내가 자네들 나이 때는 쇠도 씹어 먹었지. 만약에 한다 그러면 내 너튜브 촬영할 때 같이 가자!”

“아, 예···.”

나이가 든 나머지 지금은 뼈가 쑤셔서 추울 때 폭포 밑에서 발성 연습을 했다간 얼어 죽는다며 주절주절 변명하는 장 이장의 모습에 양재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 폭포는 어디에 있는데요?”

추위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양재성과 달리 홍경우는 너튜브 촬영이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폭포? 우리 마을에 있지. 와? 관심 있나? 관심 있으면 함 온나. 어디 보자···. 내가 다음 영상 촬영일이···.”

장 이장은 홍경우의 관심이 기꺼운지 무음 상태의 핸드폰을 꺼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핸드폰 달력을 살폈다.

“너튜브 촬영 같이하시게요? 진짜 폭포 맞으면서?”

“...”

옆에 있던 양재성이 진짜 갈 거냐고 속삭였지만, 홍경우는 가볍게 무시했다.

폭포면 뭐 어떤가. 가수는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불리기 위해서는 유명해져야 하고,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이런 오디션을 통해 TV에 출연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어떻게든 다른 매체를 통해 알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어르신은 제안은 바로 잡아야 할 동아줄 중 하나였다. 눈앞에 기회가 내려오는데 추위가 뭔가. 일단 잡고 봐야지. 요즘엔 너튜버로 유명해진 일반인들도 TV에 자주 나오는 마당에 이미 너튜브 영상으로 TV 출연까지 한 어르신의 채널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왜 없지···? 아아아. 맞다. 이거 한다고 다 취소했지.”

하지만 홍경우의 바람과는 달리 장 이장의 향후 너튜브 촬영 스케줄은 없었다.

“없다고요···?”

촬영을 위해서라면 여름이 아니더라도 차가운 물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었던 홍경우가 아연하게 물었다.

“그게 말이지. 우리 손녀가 오디션 결과에 따라 촬영 스케줄 다시 짜겠다고 그랬었는데 내가 까먹었네. 테레비 촬영이 먼저라고. 근데 그런 표정 할 거 없다. 그짝은 이미 합격했제?”

“..네.”

“어차피 방송하면서 따로 촬영할 시간은 없다고 그러던데?”

“...”

“그럼 간단하네. 내도 합격해서, 스케줄 같이 맞추면 되겠네.”

“아···. 맞는 말씀입니다.”

홍경우는 장 이장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너튜브로 방송까지 출연한 사람의 출연 요청에 지금 오디션에 통과하여 이곳에서 촬영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본 장 이장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럼 여서 떨어지면 내가 우리 마을로 초대할게! 그때 같이 합동 무대에 서자! 우리 피디가 참 영상을 잘 찍어. 참고로 우리 마을 너튜브 피디가 내 손녀다.”

합동 무대라는 소리에 귀가 쫑긋했던 양재성은 피디가 장 이장의 손녀라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헐. 대박. 진짜요?”

“고롬! 왜? 안 믿기나?”

“실례지만, 손녀분 나이가···.”

“손녀? 이제 22살!”

“헐!”

양재성은 피디의 나이가 고작 22살밖에 안 되었다는 것에 진심으로 놀랐다.

“왜 그리 놀라노?”

“전 무조건 회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회사?”

“네. 요즘 너튜브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회사가 있어요. 편집도 알아서 해주고. 컨셉도 잡아주고.”

양재성은 장 이장이 어느 너튜브 크리에이터 회사에 소속되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 이유는 비교적 타당했다.

첫 번째로는 저 어르신의 행동. 확인한 바로는 꽤나 많은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다. 댓글들도 칭찬과 호평이 일색. 영상에서는 농담도 잘하고,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이곳에서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이건 분명 대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였다.

거기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확연히 달라진 영상의 퀄러티. 전에는 누가 봐도 아마추어의 영상이라면, 요즘 올라오는 영상은 프로의 손을 거친 영상이었다.

한순간에 이렇게 퀄이 상승한다는 건 영상 편집을 전문가가 해준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개인이 고용했을 수도 있지만, 비용이 꽤 들어가는 만큼 대부분 어느 정도 성장하면 회사로 들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손녀라니.

“그거 우리 손녀가 다 한다! 처음에는 한울이가 다 해줬는데, 요즘 갸가 억수로 바빠가. 아, 한울이가 누구냐면···.”

회사 소속이 아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회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리한 걸 요구할 수도 있지만 개인이라면···. 폭포에 정말 뛰어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 마을을 아주 일으켜 세웠지! 암! 멧돼지랑 내를 찍어서 올려준 것도 갸고! 내가 준 간식 사장도 야고! 아주 서울서 야 볼 거라고 오는 사람들이 억수로 많다!”

“대단하신 분이네요.”

“하모! 내가 사실상 따져보면 한울이 금마 덕분에 여까지 왔지. 안 그랬으면 못 왔다.”

“오. 그런가요?”

“그치! 내가 한울이한테 받은 게 많아가···. 보답을 해 줘야할낀데... 나이 이만큼 먹고 주책이제?”

거기다가 사람을 띄울 줄 아는 거부까지 곁에 있는 모양.

양재성은 그저 장 이장의 말에 맞춰 방청객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홍경우를 제치고 장 이장의 옆으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는 또다시 땅을 파고 들어가려는 할아버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어르신! 주책이라뇨! 할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도 60살이 넘어서 창업을 했다고요! 어르신도 충분히 성공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1차 오디션을 통과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운이 좋으면 최후의 10인 안에 들 수도 있겠지만, 당장 다음 라운드에서 떨어져 방송을 타지 못 할 수도 있다.

양재성은 이번 오디션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제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기에 양재성은 결심했다.

플랜 B를 계획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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