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또 같이 (4)
[...전 국민 트로트 오디션!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빠바밤!
두 팔을 활짝 벌린 MC의 뒤로 생긴 화려한 이펙트와 사운드를 총동원한 오프닝은 인상적이었다.
“이야. 냄새가 난다. 냄새가.”
장 이장의 친구, 창식은 술을 마시다 말고 멍하니 화면을 보더니 코를 씰룩거렸다.
“뭔 냄새?”
술 한잔 마시고 벌써 주정인가 싶어 장 이장은 고개를 돌려 창식을 보며 물었다.
“냄새가 난다! 대박 냄새!”
“...”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내 고개를 다시 돌리긴 했지만, 어쨌든. 프로그램은 그런 소리가 나올 만큼 자막이건 CG건, 돈을 들인 티가 팍팍 났다.
나는 대박 냄새가 난다는 창식 할아버지를 무시한 장 이장님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컁! 맛있는 냄새가 난다!]
[이거 맛있다! 이거 만들어줘라 한울! 꽈악!]
[킁!]
순서대로 노을과 찹쌀, 그리고 포동. 이동 범위라고 해 봤자 뒷산과 농장, 그리고 집이었던 이들의 범위가 사랑방이 생긴 시점부터 넓어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다른 일들로 바빠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 때 즈음부터.
“알았어. 기억하고 있어. 나중에 해 줄 테니.”
[꽈악! 역시 한울이 최고다!]
[컁!]
앞에 있는 음식들을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요령 좋게 집어서 냠냠거리던 찹쌀과 노을이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와 몸을 비비적대며 기쁨을 표현했다.
[포장할 거 더 없나? 킁.]
포동은 통통한 배 위에 산적을 올려 먹다 말고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일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다.
“아니, 괜찮아. 지금도 충분해. 고마워.”
정령들과 함께 있을 때면 항상 고마운 마음이 넘쳐 흐르곤 했다.
“하하하! 장 이장 니 쫄았나!”
“아이거든! 심호흡하는 거거든!”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내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정령들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호에에? 표정이 이상하다!]
[배가 고픈 거냐! 꽈악?]
양반다리를 한 내 다리 가운데에 쏙 들어와 앉아 앙증맞은 두 발로 약과를 움켜쥔 채 조금씩 음미하던 노을의 말을 필두로 각자 다른 음식에 정신이 팔려있던 정령들의 고개가 나에게로 휙 돌려졌다.
[...]
말없이 나를 본 포동은, 제 배 위에 놓아둔 음식 중 하나를 띄워 내게로 건넸다.
“하하. 잘 먹을게.”
포동이 내게 건넨 음식은 바로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만들어진 해물전이었다. 포동은 산에서는 볼 수 없는 해산물로 만들어진 음식을 특히나 좋아했다. 평소에도 식탐이 있지만, 해산물로 만든 음식에는 그 식탐이 최고조에 달했다.
[컁! 나도 줘라!]
[킁!]
역시나.
해물전을 보고 입을 헤 벌린 노을이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나도!를 외쳤지만, 포동은 누가 무슨 말을 했냐는 듯 귀를 후비고는 제 배 위에 올려진 음식에 집중했다.
“한울이 배 많이 고팠나 보네. 있어봐라. 내가 저짝에서 좀 빼앗아 올 테니까.”
포동의 소중한 해물전을 먹고 있으려니, 주방에서 나온 꽃분이 할머니가 메고 있던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내가 앉은 상으로 다가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정령들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았지만, 꽃분이 할머니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있어봐라. 내가 저짝에 거 빼앗아 올게!”
꽃분이 할머니가 가리킨 곳은 장 이장님이 있는 상이었는데, 과연 빈 술병만 보이고, 음식은 거의 그대로였다.
“원래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하는 거라. 저짝은 모질라면 내가 또 만들어 주면 되니까, 걱정 말아라.”
“네. 할머니도 어서 앉아서 드세요.”
“오야. 잠시만 있어봐라.”
그래도 술을 드시는데 안주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꽃분이 할머니는 바로 장 이장님의 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컁! 걱정 마라! 우리 모습은 안 보인다!]
꽃분이 할머니가 앞에서 사라지자, 할머니의 기척이 느껴질 때부터 먹던 걸 멈추고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할머니를 살피던 노을이 말했다.
꼬리가 살랑거리는 걸 보니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아직도 자신의 능력이 통하는 걸 확인해 만족스러운 모양.
“그래.”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든 후 컁컁거리며 웃는 노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을 때였다.
“참나. 니 진짜 간이 콩알만 한거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껄껄 웃으며 장 이장님을 놀려대던 창식 할아버지의 방정맞던 목소리가 사뭇 심각해져 마을회관 안에 울려 퍼졌다.
[꽈악? 무슨 일이냐?]
왁자지껄했던 조금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노란 부리로 열빙어 튀김을 야무지게 뜯어 먹고 있던 찹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창식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크긴 해도, 이렇게까지 온 방에 퍼질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많기도 많거니와, 다들 서로서로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령들에게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보자, 마을 사람들의 고개는 하나같이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맞나?]
화면에는 장 이장님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고개 숙인 얼굴과, 구부정한 등. 카메라에 찍힌 이장님의 뒷모습은 화려하게 빛을 반사해대며 반짝이는 자켓과 달리, 초라했다.
[...언제 이렇게 늙었노.]
등을 비추던 카메라는 이내 장 이장님의 앞모습을 비추었다.
물끄러미 자신의 굽은 손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장 이장님의 목소리는 구슬펐다.
“크흠, 흠.”
화면에는 동그랗다 못해 점점 작아지는 장 이장님의 모습과 대조되는 다른 젊은 참가자들의 모습이 교차했는데,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대기실에서 가장 어두운 장 이장님의 모습에 스크린을 보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코를 훌쩍거렸다.
“나이가 뭔 대수라꼬···.”
마을회관에 들어와 장 이장님을 발견했을 때부터 짓궂게 이장님을 놀리던 창식 할아버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창식 할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마을회관에는 침묵이 흘렀다.
[아이고, 이게 왜 이라노!]
[...미안, 미안합니데이.]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알림들이 울릴 때마다 펄쩍 뛰며 사방으로 사과를 하는 장 이장님의 모습이 방영되었을 때, 침묵은 극에 달아있었다.
“저게 왜 미안한데! 할 줄 알잖아! 당황해서 그런 거 아이가!”
장 이장님의 고개가 10번쯤 숙어졌을까.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던 창식 할아버지가 술잔을 상에 꽝 놓으며 울분을 토했다.
그 울분이 장 이장님을 향한 것인지, 할아버지 자신에게 말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
입을 꾹 다문 어르신들의 시선은 젊은 사람들의 틈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장 이장님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따금 입술을 달싹이며 창식 할아버지처럼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끝내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화면을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자자. 심호흡하시고···.]
[...저도 긴장했어요!]
동그란 뒤통수가 낯익은 피디가 장 이장님을 잡고, 꽃분이 할머니가 주머니가 터져라 챙겨준 다식을 나누어주고, 다식을 먹은 젊은 청년 둘이 이장님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다라란.
그와 동시에, 음울한 음악과, 짙은 색채의 화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말없이 입을 달싹이며 애꿎은 손만 괴롭히던 어르신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저 청년 누꼬? 아가 참말로 착하네!”
“뉘 집 자식인지 몰라도 가정 교육을 참 잘 받았다! 다음에 오면 내가 특별히 맛있는 거 사준다!”
“내도!”
“내는 사랑방 털어서 줄 거니까 니는 다른 거 생각해라!”
어르신들은 일면식이라고는 없는 청년들을 향해 칭찬을 쏟아냈다. 얼마나 진심인지, 두 주먹을 꼭 쥐고 월드컵 때 한일전을 응원하는 것만큼 흥분한 채로 당신들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보답하려 안달이었다.
“...하이고. 해도 내가 하지. 호들갑은 됐다마.”
마치 자기 일인 양 서로 보답을 해 주겠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장 이장님은 머리가 아프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가릴 수 없었다.
“허, 참 내. 그런 소리 하려면 그 웃고 있는 표정부터 가리고 말하든가.”
장 이장님의 친구분들은 그런 모습이 웃기지도 않는다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심각했던 아까와 달리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
화면이 밝아짐과 함께 다시 웃음소리로 가득채워진 마을 회관 안은 조금 전 침묵이 언제였냐는 듯, 떠들썩했다.
“으하핫! 니 쫄보가? 뭐 익숙한 데만 나가면 자라목이 되가지고 식은땀을 삐직삐직 흘리나?”
스크린에는 장 이장님이 대기실에서 나와 오디션 장 문 앞에서 침을 꼴깍 삼키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니가 저기 있어 봤나? 니 같으면 벌씨로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갔을 거거든?”
장 이장님은 자신이 놀랄 때나 움츠려 들 때마다 배를 잡고 웃어대는 친구 놈을 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으헉!]
“푸하하! 또 저러는 거 봐라. ‘으헉!’이 뭐꼬. ‘으헉’이!”
하지만 방송은 장 이장님의 편이 아니었다. 어둡던 대기실 초반 상황과는 다르게, 방송화면은 시종일관 발랄하게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장 이장님의 서글픔을 강조했다면, 지금은 아까와 같이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스러워하더라도, 우스운 효과와 자막으로 상황 자체를 가볍게 만들었다.
“으으···. 내 이 수모를, 반드시···!”
장 이장님만 이를 부득 갈며 훗날을 기약했을 뿐.
“그래서, 뭐 불렀는데? 뭐 불러서 합격했는지는 알려줘도 된다 아이가?”
장 이장님을 비추던 카메라가 전화되어 오디션장에 있는 지원자를 비추자, 창식 할아버지가 물었다.
“흥. 일 없다. 그냥 봐라. 좀 있으면 나오는구먼. 참을성이 그렇게 없나.”
하지만 이미 저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떠 나불거릴 친구 놈에게 이미 유감스러운 감정이 있던 장 이장님은 헹! 하고 콧방귀만 뀌었다.
“뭐꼬, 그거 좀 놀렸다고 삐친나? 아이고마. 나이 들면 뭐 여성 호르몬? 그게 많이 나와가 잘 삐친다더니만 진짜인가 보네?”
“뭐라꼬?”
“야야. 쟈 성질내는 거 봐라! 무서워 죽겠다! 크하하!”
창식 할아버지와 장 이장님의 유치한 대화가 이어지자, 조용히 그 모습을 보던 병팔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게 그 둘을 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읏차. 내는 한울이랑 맛난 거 먹으면서 조용히 볼란다. 나잇살 먹어가 푼수만 늘었나. 에잉.”
“뭐라꼬??”
“니 이리 안 오나!”
몸을 일으키며 내 쪽으로 오려는 병팔 할아버지를 발견한 창식 할아버지와 장 이장님은 싸움을 멈추고, 바로 병팔 할아버지를 공통표적으로 돌렸다.
경운기를 몰다 멧돼지와 조우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느꼈지만, 어떤 면으로는 저 세 분처럼 마음이 잘 맞는 친우도 없을 것이다.
“셋 다 조용히 안 하나? 이제 노래 할라고 들어간다!”
어린아이들처럼 투덕거리는 셋에 잠자코 있던 강 할머니가 눈을 번뜩였다.
[...그럼 노래 들어볼게요.]
스크린에는 어느새 심사위원의 신호에 따라 마이크를 움켜쥐는 장 이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어? 어···!”
강 할머니의 호통에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셋은,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장 이장의 모습에 집중했다.
[스읍.]
마이크를 타고 장 이장님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드디어···!”
숨이 뱉어지는 타이밍에 맞추어 마을 사람들의 주먹이 꼭 쥐어졌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을 사람들 모두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완전히 집중하자.
[...다음 주!]
갑자기 잔잔히 들리던 반주가 뚝 끊기나 싶더니, 모두의 눈을 비빌만한 자막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어잉?”
예상치 못한 단어를 멍하게 쳐다보던 마을 사람들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게 사실인지를 파악하더니.
[라라라~ 고혈압 예방엔 노인 보험! 지금 전화해 주세요!]
발랄하게 지금 전화를 하면 아무 조건 없이 여행용 캐리어를 주겠다는 보험광고에 하나둘, 뒷목을 잡았다.
턱.
누구보다 더 큰 동작으로 뒷목을 잡은 창식 할아버지는 지금, 이 현실이 아찔한 듯, 눈을 꾹 감았다.
번쩍.
잠시 후, 할아버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나 싶더니,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야-이- 방-송-국 놈들아---!!”
창식 할아버지의 분노가 담긴 사자후가 마을회관을 뚫고 마을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