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또 같이 (5)
[컁! 깜짝 놀랐다! 저 인간 뭘 잘못 먹었냐?]
창식 할아버지의 괴성에 깜짝 놀란 노을이 펄쩍 뛰어오르며 말했다.
털이 바싹 서 있는 게 고슴도치 같았다.
[이상한 음식은 없다 킁!]
노을이 전방을 주시하며 고개를 휙휙 돌리자, 포동이 소란에도 끄떡없이 자신의 배 위에 음식을 먹어치우며 말했다.
“방송국놈드으으을!!”
여전히 창식 할아버지는 스크린에 대고 화를 내며 제자리 일어나 방방 뛰고 있었다.
“아이고 시끄러버라. 고마 앉아라.”
그런 창식 할아버지의 모습을 꼬숩다는 표정으로 본 장 이장님은 실실 웃으며 제 친구를 자리에 앉혔다.
“우와. 니 그 피디 전화번호 알고있제? 내놔봐라. 내가 바로 전화를 해서···!”
“전화는 무슨. 모른다. 내도. 아니, 알아도 니한테 주겠나?”
“와 안 주는데? 아아. 니는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이거제? 후···. 이거 일주일에 한 번 밖에 안 하나?”
건수를 잡았다는 듯,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장 이장님의 눈을 본 창식 할아버지는 숨을 길게 내쉬며 진정하기 위해 애를 썼다.
“어. 한 번밖에 안 하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와? 와 한번 밖에 안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만 방영한다는 소리에 또다시 천장을 보고 사자후를 뱉었다.
[호에에! 나 저거 TV에서 봤다!]
[불 뿜는 용 말하는 거냐? 나도 동의한다 꽈악!]
“푸읍.”
노을과 찹쌀은 손에는 먹을 걸 꼭 쥔 채 TV쇼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눈으로 창식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나는 정령들의 말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아 시끄럽다. 여기 니만 있나? 됐고. 다들 모여봐라.”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 위로 한심하다는 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 할머니였다.
-띡.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자, 강 할머니가 리모컨을 이용해 스크린을 끄고, 진중한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보고 있었다.
“와, 와그라노···?”
조금 전까지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던 창식 할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표정을 한 강 할머니에게 잘못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탓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할머니는 전직 배구선수다.
쉽게 말해, 대거리했다간, 며칠 동안 바로 누워 자지 못할 소지가 다분했다. 이것 또한 다년간의 경험으로 축적된 지식이었다.
“이쯤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게 있지 않나?”
하지만 강 할머니는 창식 할아버지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무려! 우리 미화리 산골 마을 이장이라는 사람이 테레비에 나가가! 저렇게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데! 응원을 해줘야지! 안 그라나?”
“으잉? 어! 어! 그렇제!”
강 할머니의 발언에 창식 할아버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을 정통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 당연하제!”
“마, 맞다!”
창식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강 할머니와 눈을 마주친 어르신들도 차례대로 대답했다.
모두의 동의를 얻은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좋다! 일단, 내가 알아본 결과···.”
아니, 말하려 했다.
“...뭐라카노?”
강 할머니와 조금 떨어진 상에 앉아있는 어르신이 귀를 후비며 인상을 찡그리기 전까지는.
“마이크 켜 드리겠습니다!”
강 할머니 옆에 있던 박준혁이 재빨리 일어나 한옆에 치워두었던 단상을 스크린 가운데로 다시 옮긴 뒤, 마이크를 켰다.
“참말로 빠르데이. 고맙다.”
순식간에 세팅을 끝낸 박준혁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은 강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마이크 헤드를 톡톡 치며 말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이제 다들 잘 들리지예?”
“어어! 잘 들린다!”
들리지 않는다고 눈살을 찌푸리던 어르신의 대답을 들은 강 할머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상에서 하려고 했던 말을 이었다.
“좋다. 그럼 우리 마을의 자랑!은···. 아직 아니지만, 이제 곧 자랑이 될! 장 이장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쪼매 설명해볼까 하는데···. 의의 있는 사람?”
“...”
좌중은 조용했다.
아니, 중간에 창식 할아버지가 습관적으로 손을 움찔 거리긴 했지만, 좌중을 둘러보는 강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고는 잽싸게 한쪽 손으로 위로 뻗어 올리려는 손을 눌렀다.
“좋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아이디어를 내는 거니까네, 혹시라도 내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 있으면 중간에라도 손들어라. 알았제?”
-끄덕끄덕.
강 할머니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게 제 생각들을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이 강 할머니 앞에서만 이렇게 온순한 양이 되는 모습들이 외부에서 본다면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안다.
전직 배구선수 출신인 강 할머니의 손은 아직도 아주 맵다.
“내가 장 이장이 트로트 오디션에 나간다고 해서! 내가 요 몇 주 동안 여태까지 방영했던 가수 뽑는 오디션을 싹 다 봤거든? 아, 어떻게 봤냐면, 준혁이가 찾아서 보여줬다. 고맙다. 준혁아.”
“아닙니다!”
말을 하다 말고 강 할머니는 박준혁을 칭찬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마피아 보스와 그 부하 같았지만, 나는 입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감아 물었다.
강 할머니가 지금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을 봤다는 걸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봤던 나로서는 그 영상을 모두 볼 동안 할머니가 얼마나 죽는 소리를 많이 하셨는지 알았기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강 할머니도 백조 같은 스타일이었다. 물밑에서는 열심히 발을 젓지만, 겉으로는 전혀 안내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제각기 특별하게 한다고 차별점을 넣긴 했는데···. 뭐, 결국은 다 똑같드만! 근데! 딱하나! 전부다 공통적으로 했던 게 있다. 그리고, 그거는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한 거다!”
카리스마를 장착한 강 할머니가 한 손을 앞으로 쭉 뻗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결연한 의지였다.
-꿀꺽.
강 할머니의 주먹에 한쪽 구석에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의 주먹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할머니는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슬쩍 눈길을 주고는 마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그건 바로···! 투표다!”
“...투표?”
강 할머니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빠지지 않는 참가자 선발 방법이긴 했지만, 시기가 너무 이른 탓이었다.
“투표는 아직 많이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가?”
“방금전에 처음 방송했는데···. 뭔 놈의 투표를 벌써부터 할라카노. 모름지기 투표는 중반은 돼야 시작하는 거지!”
“맞다 맞다!”
사람들의 말에 입을 두 손을 꼭 쥐고 있던 창식 할아버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괘안타. 투표라니. 그거 하나 보내는데 100원일 구로? 됐다. 그거 모아가지고 맛난 거나 사무라.”
장 이장님도 투표 소리에 쑥스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카노! 낸중에 시청자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나? 내는 여태까지 나온 오디션을 다 본 사람이여! 3배속으로 보면 을매나 눈알이 빠지는 줄 아나?!”
태평한 장 이장님의 반응에 강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삐익
강 할머니의 목청을 견디지 못한 마이크가 괴로운 소리를 냈다.
“3, 3배속? 그게 뭐꼬?”
“봤다니까···. 오디션 프로그램 그걸 3배속 해서 봤다는 거 아니가?”
“오메···. 그걸 어떻게 보노? 말도 ‘삐리리-삐릴리-’ 이렇게 들리더만.”
콧김을 뿜으며 몇 주 동안 본 오디션 프로그램명을 줄줄 읊는 강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투표는 필수다! 필수! 내가 지금부터 투표를 얘기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뭔데?”
10개가 넘어가는 오디션 프로그램명 리스트업을 모두 마친 강 할머니가 다시 한번 단상 앞으로 주먹 쥔 손을 뻗자, 가까이 앉아있던 어르신 한 분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좋은 질문이다! 다들, 핸드폰 꺼내라.”
질문이 마음이 드는지 마이크를 든 후로 처음 미소를 지은 강 할머니가 모두에게 핸드폰을 꺼내 깨톡 화면을 켤 것을 명령했다.
“켰다. 근데 이건 만다꼬?”
강 할머니의 재촉에 마을 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내 능숙하게 깨톡을 켰다.
처음 스마트폰 교육을 시작했을 때 깨톡이 뭔지도 모르던 어르신들의 성장을 눈앞에서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가슴 한켠이 뿌듯해졌다.
역시. 어르신들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몰라서 하지 못했던 거였다.
“쪼매만 있어봐라···. 됐다. 우리 마을 단체방 키 봐라!”
모두가 깨톡 화면을 켠 걸 확인한 강 할머니는 자신의 핸드폰을 조작했다.
-깨똑!
-깨똑! 깨똑!
할머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을 회관 안에 있는 핸드폰에서 일제히 메시지 수신음이 들렸다.
모두들 농사를 지으시느라 소리를 최대치로 설정해놓은 탓에 마을 회관에 무슨 경보가 울린 것 같았다.
연속해서 울리는 알림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만히 소리가 끝나길 기다린 할머니는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대고 다음 지령을 내렸다.
“자, 다들 내가 방금 보낸 메시지 복사해서 친구 목록에 있는 사람들한테 다 보내라!”
“어, 어엉?”
“뭔 소리고? 이걸 보내라고? 친구 목록에 있는 사람들한테 전부?”
“야야. 그래도 그건 좀···.”
“이거 이렇게 하면 승부 조작 소리 듣는 거 아이가?”
“스팸인 줄 알면 우짜노?”
강 할머니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채 핸드폰을 멀리 떨어뜨려 문자 내용을 확인한 마을 사람들의 하나같이 말로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가 전달한 문자의 내용은 대충 무조건 장 이장님을 찍으라는 것이였다.
여기저기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이 나왔지만, 강 할머니는 강경했다.
“스팸이라니! 홍보다!”
“홍···. 보?”
“어! 홍보다! 이게 바로 홍보지 뭐꼬? 원래 뭐든 처음에는 알려지려면 홍보가 필요하다. 홍보 안 하면 장 이장이 누군지 우예 알 거고? 화장도 매매하고! 옷도 번쩍거리는 거 입어서 못 알아보는 사람도 많을낀데, 최소한 우리가 아는 사람들한테는 알려야 될 거 아니가! 그리고 스팸? 친구 목록에 100명도 없는 거 다 안다! 우리 다 합쳐 봤자 얼마 안 될 건데 그게 와 승부 조작이고! 안 그러나, 준혁아?”
“네? 아, 네!”
옆에서 따발총처럼 끊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반발에 하나씩 반박하는 강 할머니를 왜인지 감탄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박준혁이 할머니의 말에 동의하며, 힘을 실었다.
“제가 옆에서 같이 본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결승 유료 문자 투표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경연이 괘도에 오르면서 시작되는 인기 투표 또한 출연자들 탈락 여부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걸 확인했습니다. 인기투표 탑 3에 든 출연자들은 93.2%의 확률로 본선까지 진출했으며, 그에 반해 실력은 좋으나 인기가 없을경우, 준결승 전까지는 어찌어찌 가나, 분량이 아주 적은 걸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TV에 나오긴 하는데, 한 3분 나오는 거죠. 노래 부를 때만.”
아무래도 가수라는 직업 자체가 인기로 먹고사는 부분이 많다 보니 방송국 측에서도 그런 것 같다며, 구체적인 확률까지 줄줄 읊었다.
“3분?”
가만히 박준혁의 설명을 듣고 있던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어투로 인기가 없을 시의 예상 출연시간을 혼자 중얼거렸다.
“뭐라꼬? 3분? 인기 없다고 3분?”
매번 말을 할 때마다 강 할머니의 눈빛에 지레 겁먹어 말을 도로 삼켰던 창식 할아버지도 가세했다.
“3분은 너무한 거 아이가! 그래도 명색이 우리 마을 이장인데!”
창식 할아버지 옆에 있던 병팔 할아버지도 그건 너무하다며 검지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 마을 이장은 미화리 이장! 나아가서 우리 읍 이장이고! 군 대표지! 군 대표가 3분밖에 출연을 못 한다니! 절대 안될말이제!”
“맞다 맞다! 3분 출연이 뭐꼬? 지금도 마지막에 쪼께 출연한 것 때문에 뒷골이 당기는 구만은!”
“안 되겠다. 내 내일 오랜만에 동창들 좀 만나야겠다.”
“동창회? 그럼 내는 종친회를 오랜만에···.”
“그럼 내는···.”
비협조적이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 여기저기서 장 이장님을 홍보할 방안을 내느라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어! 내다! 내일 당장 좀 만나야겠다!”
“...어! 별일 없제? 내일 뭐하노?”
모두들 핸드폰을 붙잡고 통화한다고 정신이 없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 할머니는 어느새 옆으로 와 서 있는 꽃분이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더니, 꽃분이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으며 좌중들을 향해 마지막 카운터를 날렸다.
“제일 많은 사람한테 문자 보낸 사람한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