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뿔도 단김에 (1)
그런 말이 있다.
즐기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이기지 못한다고. 조금 전, 공장 생산이라는 말에 부정적이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 할머니들은 부지런히 연락을 돌렸다.
두 분 모두 일을 분담하여 같이 일할 사람들과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통화하는 방식이 확연히 차이 났다.
“...어어. 니 아직 손가락 움직이제? 그럼 됐다. 니 용돈 벌 생각 없나?”
강 할머니는 일단 본론부터 말하는 타입. 전화가 연결되면 안부를 묻는 것도 없이 일단 신체 이상 여부를 묻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뭔 잠을 벌써 자나? 어디 아픈 건 아니제? 우리 나이 되면 몸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다. 감기면 도라지가 좋은데···. 내가 내일 갖다 줄까?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반면 꽃분이 할머니는 우선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 니도 좋아할 줄 알았다. 오야. 그라믄 내가 일정 정해지면 연락 줄게. 어. 들어가라.”
단번에 본론으로 들어가 상대방의 가능 여부를 묻던 강 할머니는, 빠르게 전화통화를 마치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통화가 끝난 핸드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직까지 통화 중인 꽃분이 할머니의 모습을 슬쩍 보고는 고개를 나에게로 돌렸다.
“지금 내는 전화 돌리는 거 끝났고. 저짝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결과 나올끼다.”
“결과요?”
어떤 결과를 말하는 것인지 짐작이 갔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체 되물었다.
“오야. 니가 만두 만드는 것처럼 여러 명이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지 않나? 생각해 보니까, 그거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실, 우리 카페에서 일하는 거 보고 부러워하는 할마시들 많았거든. 다들 우리 나이 또래라 여기저기 한군데씩 문제는 있는데, 그래도 손끝은 아직 야물딱지다.”
한군데씩 문제가 있다는 할머니의 말에 자칫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손끝이 야물딱지다는 말씀은···?”
“사람은 모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니 말대로 포장 기계만 쓰는 거라면, 그 유통이라는 거, 한번 해 봐도 괜찮겠다. 이 말이다!”
여느 다른 공장 생산 방식에는 부정적이지만, 포장을 제외한 나머지 공정들을 지금 하는 것과 같이 수제로 진행한다면, 얼마든지 찬성이라며 강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다들 하면 불러만 달란다.”
마지막 통화를 끝낸 꽃분이 할머니가 핸드폰을 손에 쥐고 강 할머니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럼 충분하네.”
꽃분이 할머니의 오케이 사인을 본 강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단을 내린 듯 나를 보며 말했다.
“내 조건이 하나 있는데···.”
“무슨 조건이요?”
꿀꺽.
진지하게 조건이 있다는 강 할머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물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강 할머니의 카리스마는 강력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을 응집시키고, 통솔할 때마다 할머니의 카리스마는 극에 달했다. 전생이 있다면, 강 할머니는 분명 장군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카리스마 넘치는 대장군.
대장군의 말은 되도록이면 들어주는 것이 좋다. 전선에서 구르고 구른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일 테니 말이다.
나는 강 할머니가 말하는 조건이라면, 그게 뭐가 되었는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 뭐 그게 이상한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할머니가 진지한 만큼, 나 또한 진지한 태도로 할머니의 말을 기다릴 때였다. 조금 망설이던 할머니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 튀어나왔다.
“그 공장이라는 거, 니가 만들면 안 되나? 공장 생산 제안한 회사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우리 집에서 좀 가까웠으면 좋겠다. 공장장이랑도 말이 좀 잘 통했으면 하고. 그러려면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면 좋은데···. 그게 니면 좋겠어서. 어차피 기계별 필요 없으면 니가 그냥 공장 하나 세우는 건 어떻노?”
공장을 세우라니.
“예?”
내 계획에 없던 조건에 나도 모르게 멍청한 말투로 되물었다. 내가 잘 못 들었겠지? 설마. 공장을 짓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럴 리가 없을 거라는 질문이 함축돼있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강 할머니는 내가 잘 못 듣지 않았다며, 다시금 확실히 했다.
“공장. 니가 만들면 어떻겠냐고.”
또박또박.
**
다음 날 아침.
“형님, 여기 커피요.”
사랑방 카페 한구석에 마련된 스탭 테이블에 앉아있으려니, 박준혁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페 라테를 가져다주었다.
“어. 고맙다.”
카페를 만들고 나서 좋은 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것. 아침마다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워머로 따뜻하게 데워진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니, 부드러운 우유 거품과 함께 고소함이 가득한 우유와 하모니를 이룬 에스프레소의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이 어떤가요?”
커피 맛을 음미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박준혁이 앞에서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주 좋아.”
“예쓰!”
커피 맛이 아주 좋다며 엄지를 내밀어 보이자, 박준혁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두 손을 불끈 쥐더니 커피 머신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할머니! 저 통과했습니다!”
“어이고. 잘했네. 내가 뭐랬드노? 오늘 잘했다고 했제?”
“넵! 감사합니다!”
박준혁이 쪼르르 달려가 자랑 한 사람은 바로 사랑방의 음료 담당, 이명옥 할머니.
체험 농장 김 할아버지의 아내인 이 할머니는 믹스커피를 시작해 에스프레소 머신 커피는 물론이거니와, 모카포트 커피, 그리고 드립 커피까지 모든 커피를 내릴 줄 아는 사랑방의 커피 마스터이기도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매일 커피 내리는 직원들 부러워하기만 했었는데···. 신기합니다.”
박준혁은 사랑방이 오픈되고부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와서 커피 내리는 법을 배웠다. 대학원생 시절, 매일 아침 커피를 원하는 교수님의 성화에 못 이겨 반강제적으로 실험실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로 커피를 픽업 할 때 항상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커피 내음이 물씬 풍기는 카페 안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내리는 카페 직원처럼 언젠가는 자신도 커피를 내려 볼 거라던 다짐.
다짐을 이루는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빨리 이룰 거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박준혁은 지금은 자신을 이곳 미화리로 보낸 교수님에게 고마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신기하긴 뭐가 신기하노. 언젠가는 니가 원하는 건 다 했을 건데. 그럼 오늘은 모카포트 쓰는 거 좀 배워 볼래? 모카포트 커피에 소금 넣은 크림 넣어 마시면 그게 또 별미지. 맛이 고급지다. 고급져.”
이명옥은 어린아이처럼 커피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고 기뻐하는 박준혁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사랑방을 오픈 하기 전부터 커피를 내릴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나타나 보고 갔더랬다. 그러더니 사랑방을 개업하고 나서는 카페를 오픈하기 전부터 나타나 오픈준비를 도와주고, 커피 내리는 법에 대한 가르침을 요구했다.
가르침이라고 해봤자, 자신도 이제 심가에게 배운지 얼마 안 된 것들을 전해주는 식이었지만, 어찌나 열정적으로 배우던지. 음료 마스터 자리를 준혁에게 넘겨줘야 하나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물론, 준혁이 자신은 그저 가게를 오픈하기 전, 커피를 내리는 것에 만족한다고 해 그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지만.
“오. 드디어! 모카포트! 드디어 레벨 업인가요!”
“드디어는 무슨. 아, 드디어가 맞지. 내가 가르쳐 준다고 그래도 니가 우유 스팀 완벽하게 하기 전까지는 안된다고 해서 내가 못 가르쳐준 거 아이가.”
누가 대학원생 출신 아니랄까 봐 박준혁은 자신이 정한 선을 넘기 전까지는,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것부터 그랬다. 에스프레소는 그저 그라인더에서 나온 원두를 포터 필터에 담아 템핑한 뒤, 에스프레소 머신에 끼우면 끝이다.
하지만 박준혁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에스프레소의 맛이 결정된다며, 그라인더에서 원두를 담은 뒤에 원두양을 측정하기 위해 저울을 구매했고. 템핑 하는 힘과 각도를 통일시키겠다며 오토템핑기를 구매하였다. 사비로.
물론 나중에는 한울에게 사비로 구매했다는 사실을 들켜 구매 대금을 돌려 받기는 했지만, 아무튼, 박준혁은 여태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수치에 민감했다.
“하하. 뭐든 스텝 바이 스텝이라고···. 서두르면 이도 저도 안 되는 법이지 않습니까! 뭐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 최선의 결과가 나오는 법이니까요!”
“그래. 니 말이 맞다. 니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사는 거겠제. 우유 스팀은 이제 완벽하게 습득한 거 맞제?”
비록 조금 느리더라도 차근차근히 하는 것이 좋은 거 아니겠냐는 박준혁의 말에 이명옥은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준혁이 오토템핑기를 구매한 이후로는 손목과 팔꿈치가 더이상 아프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 우유 스팀은 제가 몇 주 동안 여러 각도로 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제일 처음 스팀기를 피처에 집어 넣을 때는 스팀기 끝부분의 2/3가량을 45도 기울기로 우유에 넣은 후, 약 3초간 큰 거품을 생성하고···. 아, 이건 스팀기마다 다른데, 오른쪽 스팀기는 압력이 세서 3초면 되고, 왼쪽 건 스팀이 조금 약해서 5초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뿔싸.
이명옥은 조금 전의 스스로를 꾸짖었다. 왜 질문을 해서. 그저 이제는 우유 스팀에 미련이 없냐는 가벼운 질문이었을 뿐이었는데, 박준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깨달은 바를 줄줄 읊었다.
스팀기의 각도와 피처의 각도, 그리고 피처를 잡는 손의 모양까지 얘기하더니, 이제는 큰 거품을 만든 후 우유 거품을 벨벳처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 스팀기를 몇 센티미터 깊이로 넣어야 하는지까지 말하는 준혁을 조금 질린 눈으로 쳐다본 이명옥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제일 믿음직한 사람을 향해 헬프를 외쳤다.
“...한울아!”
**
“아는 척한 데···. 말이 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온 이 할머니가 커피 머신쪽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글보글
커피 머신 뒤쪽에 박준혁이 서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모카포트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2분 43초···.”
모카포트 앞에 서 있는 박준혁은 핸드폰에다 대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 연구원이었으니까요.”
작물들을 관찰할 때도, 비료 연구를 할 때도 핸드폰 녹음기는 박준혁과 함께였기에 익숙했다. 기록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나···.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나와는 달리, 이 할머니는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며 쓴 음식을 먹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동민이는 안 그러더구만···. 근데, 어제 말한 거 진짜 할끼가? 니가 공장 만들끼가 진짜?”
정말이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은 이 할머니가 물은 건 바로 공장 설립 여부. 어젯밤, 강 할머니와 꽃분이 할머니가 나에게 강력히 요구한 조건이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읍내 나가서 알아보려고요.”
바로 사랑방 한과 공장의 주인도 나였으면 한다는.
-탁.
나는 깔끔히 비운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결과는,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