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저스 (2)
챙이 넓은 밀짚모자.
얼굴의 반은 가릴 크나큰 선글라스.
하지만 실상은 눈만 겨우 가리는···.
벌이 날아다니다 꽃인 줄 알고 다가갔다 되려 침을 꽂아버릴 것 같은 하와이안 셔츠.
그리고 베이지색 반바지와 검정 샌들까지.
완벽한 휴양지 패션이 산골짝이 마을에 나타났다.
보통사람의 경우, 괴이쩍은 패션을 한 사람이 자신을 보고 아는 척을 하면 경계심이 생긴다.
“누구···?”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했지만, 그와 별개로 보통사람보다 작은 간을 가진 장 이장님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이장님! 접니다! 저!”
-드르륵.
“스, 스탑!”
괴이쩍은 사람이 아무리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는 척 한다 해도, 고정관념으로 인한 경계심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제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들어온다면 더더욱.
“...”
수상한 차림새를 한 남자의 등장에 신명 나게 놀던 마당에는 정적이 흘렀다.
-쨔라쨔라쨘쨘쨘!
미처 꺼지지 못한 노래방 기기 반주가 정적을 휩쓸었다.
[컁? 무슨 일이냐?]
산적을 옴팡지게 쥐고 챱챱 거리던 노을이 고개를 들고 갸웃거렸다.
찹쌀과 포동은 갑작스럽게 변한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대문을 가로막고, 장 이장님을 떨게 하는 하와이안 남자의 정체를 아는 나는 노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산적과 같은 잔치 음식은 평소에 만들기가 어려워 오늘 같은 날 마음껏 못 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호에? 컁! 바보 인간이다! 바보!]
하지만 산적을 한입에 넣고 볼록해진 볼을 하고 내 어깨에 폴짝 뛰어오른 노을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괴이쩍은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어이구. 우리 노을이 참 잘 보기도 하지.”
[맞다! 나는 한번 본 사람은 잊지 않는다! 나는 위대한 노을이다! 컁!]
내 칭찬을 들은 노을은 콧대를 하늘 끝까지 올리며 자신의 위대함을 칭송했다.
“대리님, 안 들어가고 뭐 해요?”
가슴 털을 부풀리며 자신을 칭찬하라는 노을을 쓰다듬어줌과 동시에, 대문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호에? 저 사람은 처음 본다! 분명하다!]
“응. 맞아.”
노을에게는 낯설겠지만, 나에게는 한없이 익숙한 사람의 등장에 나는 입을 다문 채 광대만 올렸다.
세상 귀찮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 안녕하세요. 이장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저희 대리님이 놀라게 했나 보네요. 하하. 저희는 김 과장님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아, 저는 한혜원입니다. 여기는 이 과장님.”
그렇다.
이 대리와 혜원 사원.
둘은 나와 같이 일했던 팀원들이었다.
“어? 난 벌써 인사했는데?”
한혜원에게 옆구리를 찔린 이 대리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바보다! 컁! 바보!]
그 모습을 본 노을이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한혜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빨리 그 선글라스 벗으라고.”
미소를 유지한 채 한혜원이 복화술을 선보였다. 효과는 굉장했다.
“어? 장원이 아이가?”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자마자 뒷걸음만 치던 장 이장님의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네! 이장님! 접니다!”
“차림새가 이상해서 수상한 사람인 줄 알았다 아이가.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고? 저 큰 가방은 또 뭐꼬?”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장 이장님은 마침 잘 왔다며 이 대리의 등을 가볍게 쳤다.
시선은 사람 하나는 들어갈 것 같은 캐리어에 고정한 채였다.
“아, 저희 오늘부터 여기서 살려고요!”
“으잉? 뭐라꼬?”
**
“그래서 회사 그만두고 왔습니다!”
당당한 이 대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회사를···. 그만뒀다고?”
“넵! 그렇습니다!”
“전부다?”
“넵!”
헤헤헤.
이 대리가 덩치에 맞지 않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봐서야는 안 될 걸 본 듯, 장 이장님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래. 일단, 잘 왔다. 먼 길 왔을 텐데, 일단 얼른 먹어요.”
낯이 익은 이 대리의 히쭉거리는 표정을 일별한 장 이장님은, 애써 썩어들어가는 얼굴을 수습하며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나머지 직원들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모든 걸 정리하고, 이곳에서 살 거라는 말을 했을 적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 시골에서 뭐 할 게 있다고 시골로 왔냐며 역정을 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사랑방 공장의 일을 도울 거라는 말 한마디에 그저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 이장님, 말 편하게 하세요.”
“어···. 그럴까?”
“넵!”
“그래. 그럼 얼른 많이 먹어라.”
“와 이거 처음 먹어보는데, 너무 맛있습니다!”
“허허. 그래. 많이 먹어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잘 부탁해야지. 그래. 맛있게 먹고 있어라.”
짐을 한옆으로 치워두고 전투적으로 음식을 흡입하는 모습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장 이장님은 걸음을 옮겨 나에게 다가왔다.
마당에서 마이크를 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내게로 옮겨졌다.
“뚜루루루- 룰루...”
마이크에 입을 대고 있었지만, 화면에 나오는 가사와 달리, 출처 불명의 가사를 읊으며 나와 장 이장님을 주시했다.
“한울아, 이게 무슨 일이고?”
가까이 온 장 이장님이 목소리를 작게 하며 물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
“내가 니는 믿는데, 저렇게 젊은 사람들이 여기서 버틸 수 있는지 그게 걱정된다.”
뭐 때문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신가 했더니···.
버틴 다라.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음···. 아마 최소 1년은 괜찮을 겁니다. 다들 탈출한 거라···. 표정 보면 뭐, 탈출 한 사람들답게 여유가 넘치네요.”
내 말을 들은 장 이장님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팀원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와. 왜 이렇게 맛있지?”
“공기도 좋고. 여기서 평생 살고 싶다.”
“아···. 평화롭다.”
“드디어 탈출했다! 다들 고생했어!”
“나는 이제 3년 동안은 서울 근처도 안 갈 거야!”
“그렇지! 이곳에서 뼈를 묻는 거지!”
“그건 좀···.”
뼈를 묻는다는 이 대리의 말에 한혜원이 그와 거리를 조금 띄웠다.
하지만 모두 삭막하고 지옥 같았던 전 회사에서 벗어나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올 수 있음을 만끽하며 면면에 만족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괜찮겠죠?”
그들의 표정을 본 장 이장님은 입을 다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오래 살겠네.”
“그래? 그럼 이제 전부 우리 마을에서 사는 거가?”
“어디서 사는 건데?”
“저 큰 가방만 가지고 온 건 아니겠지?”
“뭐 필요한 건 없나?”
장 이장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의미 불명한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반주에 맡기고 흐느적거리던 마을 사람들이 앞다퉈 뛰어와 질문을 쏟아냈다.
“뭐꼬? 노래 부르던 거 아이가? 사람 간 떨어질 뻔했다!”
“됐고, 대답이나 해봐라.”
“내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의 재촉에 장 이장님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나를 쳐다봤다.
“아, 이장님 경연하시는데 신경 쓰이실까 봐 일부러 말 안 했습니다.”
“맞다. 우리 한울이가 얼마나 세심한지 아나? 벌써 야들 살 집이랑 다 준비했다 아이가. 난 또 왜 갑자기 조용해졌나 했더니, 우리 직원이 왔네.”
“어?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오야. 인사하지 말고 먹어라. 그래.”
음식을 더 가지고 온다며 집안에 들어갔던 강 할머니가 밖으로 나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으잉? 뭔데?”
너무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장 이장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긴 뭐꼬. 장 이장 경연에 방해 안 되게 우리가 전부 알아서 처리한 거지. 안 그라나? 한울아.”
“네. 맞습니다. 숙식은 저번에 게스트하우스로 쓰려고 지어둔 곳을 임시로 사용할 거니까, 우리 마을에 사는 거 맞고···. 가방은 그게 다냐?”
손을 꼽으며 마을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던 나는, 고개를 돌려 이 대리를 보았다.
냉장고와 세탁기, 밥솥과 같은 기본 가전들은 전부 들여놓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품들이 분명 있을 테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본인에게 듣는 게 맞다.
“나머지는···. 커흡. 내, 큽, 일, 크헙”
손에 쥔 닭 다리를 맛있게 뜯으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화를 듣고만 있던 이 대리가 갑작스럽게 집중된 시선에 사레가 들렸는지 캑캑거렸다.
“어휴. 대리님, 제발 음식 먹을 때는 하나만! 말은 음식을 다 삼키고 나서!”
입 앞을 손으로 막은 채 쿨럭대느라 얼굴이 벌게진 이 대리의 모습을 보며 한혜원이 엄격하게 말했다.
“큽. 쿨럭! 크흐흡!”
“여기요. 물.”
고개를 뒤로 돌리고 연신 콜록대는 이 대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한혜원은 그에게 물을 건네고, 어질러진 자리를 정리했다.
“크흠. 고마워.”
분명 직급은 이 대리가 더 높은데, 이 대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을 보니···. 새삼 그가 업무 외적으로 얼마나 서툴렀는지가 떠올랐다.
“그···. 괜찮겠나? 우리 공장은 위생이 최우선인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강 할머니가 옆에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공장 안은 안 들여보낼 겁니다. 저 친구가···. 다른 건 좀 서투른데, 일은 잘합니다.”
“그래?”
강 할머니가 영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모았지만, 나는 모른척했다.
“크허헉! 에취!”
“어이쿠. 그냥 화장실 가서 시원하게 처리하고 오는 게 낫지 않겠나?”
때마침 심해지는 이 대리의 재채기에 강 할머니의 눈썹이 더욱 모였다.
“절대, 공장 안에는 들여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에취!!”
*
요란하게 존재감을 알린 이 대리 덕분에 그와 다른 팀원들의 주변에는 어느새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아이고. 우리 한울이랑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라고? 우리 마을에 온걸 환영한데이.”
“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일 잘하는 우리의 이 대리 곁에 사람들이 더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얼. 우리 같이 농사만 짓는 사람들한테 뭘 배울 게 있다꼬?”
너스레 떠는 이 대리의 말에 심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아직은 낯선 이 대리에게 점잖은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보았지만, 뽈록 솟아오른 광대는 숨길 길이 없었다.
“왜 없습니까! 저희 전부 다 시골은 처음이라서요.”
우리의 영업왕, 이 대리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이라고? 우예 그러노?”
엉덩이를 움직여 심 할아버지에게 한 뼘 더 다가간 이 대리는 다년간 배운 영업 스킬을 발휘했다.
“저희가 이렇게 보여도, 사실 전부 서울 촌놈들입니다.”
“오, 그래?”
심 할아버지는 의외라는 듯, 이 대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흥미를 보였다.
“의왼데?”
심 할아버지의 상체가 제 쪽으로 기운 걸 확인한 이 대리는 다음 스킬을 썼다.
“그렇죠?”
“글네!”
“사실 저쪽에 있는 사람들은 서울 사람티가 나지 않습니까? 딱 봐도 막! 어? 내가 서울 사람이다! 새침하고! 깔끔떨고! 깍쟁이!”
“맞다. 서울깍쟁이라는 말도 있다 아이가.”
“그겁니다! 근데, 저는 막 깍쟁이처럼 생기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 대리가 말하면, 심 할아버지가 받아친다.
10년은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티키타카가 쉬지 않고 오갔다.
태생적으로 서울 사람이지만, 생긴 건 촌놈같이 생긴 얼굴이라는 주제로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한 이 대리는, 마지막 스킬을 쓰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억울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저는···. 농사라고는 하나도 모르는데! 금이야 옥이야 기르신 부모님의 하해와 같은 사랑 안에서 흙도 한번 못 만져 본 사람이 접니다!”
얼씨구.
거짓말을 하려면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던가.
이 대리 집이 잘산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태 흙을 만지지 않았을 리가.
지난번 이곳에서 서리태를 직접 털겠다고 흙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던 사람은 아마 귀신이었나보다.
싸악.
감정을 모으느라 눈을 내리깔던 이 대리는 내 표정을 보고 바로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는, 세상 간절한 표정으로 지으며 말했다.
“...시골이 고향일 것 같은데 왜 이 식물이 뭔지도 모르냐! 저 나무가 무슨 나무냐고 왜 말을 못 하냐! 왜 못하긴! 나도 모르니까 못하지!”
“허허···.”
주먹을 불끈 쥐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 대리의 열정적인 스피치에, 심 할아버지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떠올랐다.
청자의 연민까지 끌어올린 이 대리의 스피치는 극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저는,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꼭!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 대리의 스토리에 심 할아버지가 반응했다.
“그래! 같이 해 보자!”
“알겠습니다!”
심 할아버지의 주먹 쥔 오른팔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이 대리의 오른팔도 자연스럽게 앞으로 뻗어 나갔다.
진지하게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뻗어진 팔을 엑스자로 엮더니 돌연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외쳤다.
““크로스!””
“아이고 깜짝이야!”
“뭐꼬? 무슨 일인데?”
갑작스러운 외침에 가까운 곳에서 담소를 나누던 꽃분이 할머니와 강 할머니가 펄쩍 뛰었다.
이 대리야.
그쪽 아니다.
네가 잘 보여야 할 실세는 이쪽이란다?
나는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이 대리를 보며 고개를 저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짠!
“하하하! 좋다! 좋아!”
“저도 좋습니다! 하하하!”
싸아아-.
마치 도원결의라도 하듯,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부딪치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그늘진 나뭇잎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청명한 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