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근원(1)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다.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福)이 된다’라는 뜻으로, 어떠한 불행도 노력과 의지로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그리고 서진태는 오늘에서야 전화위복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부터 서리태 제품 개발을 시작하는 거로 하지.”
“진짜요···?”
절대 서리태만큼은 세상에 알릴 수 없다는 이 대리를 설득해 한울의 동의 없이 선조치 후보고를 한 죄로 하루 동안 죄책감과 번민에 빠졌던 서진태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럼. 서리태 건강음료 개발하자고 한 게 서 대리 아니었나? 왜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아,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로 아무런 질책 없이 승인해준 한울을 보며 서진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여기는 가‘족’같은 회사가 아니지.
이왕 이렇게 승인 받은 거, 기필코 성공해내리라!
어진 마음을 가진 팀장에게 감동한 서진태가 메일만 보냈던 업체들에 전화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 때였다.
“크흐흡. 감사, 감사합니다.”
곰이 우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저 구석에서 먹구름을 피우고 있던 이 대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감사하지.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서리태 사업을 하려고 했었는데, 이 대리 덕분에 더 빨리할 수 있게 되었네.”
“크흐흡. 제가 기필코! 신비농장 서리태를 전 세계에 알리겠습니다! 혜원 씨, 연우 씨! 당장 회의하죠!”
서 대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불안함을 안고 있던 이 대리가 눈물을 흩뿌리며 회의를 소집했다.
“혹시 회의 주제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한울의 승인에 먹구름이 걷힌 사무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혜원이 물었다.
“뭐긴 뭐야!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서리태 제품 아이디어 회의지! 팀장님이 승인했는데, 건강음료로만 만족하면 그건 진정한 직장인이 아니지!”
방금까지만 해도 팀장님의 등장에 새파랗게 질렸던 곰은 어디 갔는지. 한울의 동의를 등에 업은 이 대리는 힘차게 다른 팀원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
갑작스러운 대리들의 변화에 한혜원과 김연우는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프린트해 두었던 자료를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대리님들이 컨택하신 나라별 선호 음료와 간식 조사했습니다.”
“동남아 쪽은 단맛을 선호하더라고요. 음료나를 만들 때 건강한 단맛을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은 무조건 Sugar-free를 하는 게 새로운 제품으로 시장을 뚫을 때 쉬운 거 같고요. 정크푸드 좋아하는 소비자들에겐 어차피 건강음료는 먹히지 않을 테니, 아예 high-end 소비자를 잡고 접근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유럽이나 미국은 수출하기 까다로워서,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한혜원과 김연우가 번갈아 가며 자신들이 조사한 바를 브리핑했다.
“...와우.”
엉겁결에 자료를 받아들었던 이 대리가 감탄했다.
사락사락.
서 대리가 진지하게 서류를 확인하는 걸 확인한 김연우는 자리를 옮겨 한울이 보고 있는 페이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팀장님, 이건 샘플 요청한 업체들 목록입니다. 승인 해 주시면, 바로 박준혁 씨랑 컨택해서 준비해 보겠습니다.”
한울이 보고 있는 페이지에는 엑셀로 만든 차트가 있었는데, 국가별로 나눠 셀링 파워가 큰 순서로 만든 차트는 각 체인이 요청한 샘플 목록뿐만 아니라, 주력 품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야. 이걸 언제 다 조사해서 정리했대? 고생했어.”
“별말씀을요. 마트 목록은 대리님 두 분이 다 정리하시고, 컨택까지 해 주셔서 저희가 한 거라곤 정리밖에 없습니다.”
컨택을 하고 난 뒤에 바로 현타가 왔는지 먹구름을 생성하긴 했지만, 서 대리와 이 대리가 업체와 주고받은 메일에는 필요한 모든 정보가 들어있어, 메일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차트를 채울 수 있었다.
“서 대리랑 이 대리도 고생했어. 원래 시작이 제일 어려운데, 물꼬를 잘 터줬어.”
혼날까 봐 기획서를 박준혁에게 주고 튀었는데···. 혼내기는커녕, 잘했다고 칭찬하는 한울의 모습에 서 대리와 이 대리는 감동을 숨길 수 없었다.
“아닙니다!”
“전부 팀장님께 배운 대로 했을 뿐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가‘족’같은 회사에 다니며 칭찬은커녕, 매일같이 자존감을 짓밟는 소리만 듣던 직원들은 결심했다.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
‘뼈를 묻을 각오로! 결과를 보이겠습니다!’
‘신비농장 서리태라면, 홍보하지 않아도 유명해질 테지만, 그 시간을 더 빨리 당기도록 하겠습니다!’
“컁? 웃는다! 한울이 기분 좋으며 나도 좋다!”
사무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등을 말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결심을 내비치던 팀원들의 외침이 떠올라 미소 짓자, 어깨에 앉아있던 노을이 발견하곤 컁컁거리며 웃었다.
웃음은 전염된다고 했었나.
온몸을 들썩거리며 웃는 노을의 모습에 나 또한 소리 내 웃었다.
이렇듯, 정령들과 함께 있으면, 기쁨은 더욱 커진다.
“오늘 저녁은 노을이가 좋아하는 거로 해볼까? 노을아, 뭐 먹고 싶어?”
“호에? 진짜냐? 잠깐만 기다려라!”
“그래. 천천히 생각해봐. 아직 저녁 하려면 멀었으니까.”
“으으음. 어렵다! 한울이 해 주는 것들은 다 맛있어서 고르기가 힘들다! 컁! 다른 정령들이랑 의논해도 되냐?”
먹고 싶은걸 고르라고 했더니, 까만 양말을 신은 발로 머리를 잡고 낑낑거리던 찹쌀이 고개를 발딱 들며 물었다.
“그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른 정령들과 같이 의논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따 보자! 컁!”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노을이 내 어깨에서 내려와 찹쌀과 포동이 있을 곳으로 달려갔다.
“그래···.”
손을 들어 배웅하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노을의 모습에 나는 손을 들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럼 나도 저녁 먹기 전에 확인을 좀 하고 가볼까.”
손을 내린 나는, 노을이 저녁 메뉴를 선정할 동안 신비농장에 어제부로 새로 합류한 라텔을 보기 위해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렸다.
‘라텔? 그게 내 이름이냐? 캬하! 좋다!’
어제부로 세상에서 가장 겁 없는 벌꿀오소리, 라텔은 서리태 파수꾼으로 임명되었다.
‘캬하하! 사자가 덤벼도 나는 지지 않는다! 나는 위대한 파수꾼 라텔이다!’
노을의 자기소개를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 라텔은 내게서 이름을 받자마자 발을 들어 락앤롤을 외쳤다.
‘호에? 사자랑 싸워본 거냐?’
내 팔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노을은 사자라는 소리에 고개를 발딱 들었다.
‘꽈악?’
부리를 내 팔꿈치에 파묻고 휴식을 취하던 찹쌀도 흥미를 보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팬인 두 정령에겐 당연한 반응이었다.
노을과 찹쌀의 시선을 한눈에 받은 라텔은, 움찔하더니, 당당히 앞을 보던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본적도 없다! 캬하하!’
‘컁···?’
‘꽉···?’
안하무인하고, 호전적인 성향은 딱 벌꿀오소리이긴 했지만, 어딘가 조금 어색한 라텔의 행동 요인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라텔의 고향은 한국이라고 했다.
“김치전을 제일 잘 먹었지.”
식사 자리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묻고 싶었지만, 전투적으로 김치전을 먹으며 ‘피쓰!’를 연신 외치는 탓에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 중요한 건 우리 식구가 됐다는 건데.”
시실 출신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라텔이 타이밍 좋게 나타난 덕분에 미루고 미루던 서리태도 도난 걱정 없이 지키며 시장에 내 보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오늘은 전병을 만들어 볼까?”
꽃분이 할머니에게 받은 묵은지를 잘 씻어 잘게 썬 뒤, 속에 넉넉하게 넣으면 전병의 기름진 맛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치전을 좋아했으니, 전병도 좋아하겠지. 내일은 김치만두를 만들어볼까.
만두는 노을과 찹쌀, 그리고 포동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오케이. 그럼 내일은 만두다.”
라텔 덕분에 내일 먹을 메뉴까지 순식간에 정한 나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산 중턱에 있는 비닐하우스로 이어진, 대나무 숲길에 들어설 때였다.
“어? 한울아! 안 그래도 니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 만났다!”
대나무 숲길 끝에서 나를 발견한 장 이장님이 손을 번쩍 들더니 내 앞으로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이장님. 어디 다녀오세요? 연습?”
찹쌀이 목청을 틔웠다는 폭포를 발견한 뒤로, 장 이장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곳으로 가 연습을 하곤 했다.
더워진 날씨에도 긴팔을 입고 있어 물었더니, 어느새 내 앞에 당도한 장 이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야. 거가 세상 노래 연습하기 좋다. 집에서 하면 다른 집에 피해 줄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해야 하는데, 거기서는 내 맘대로 마음껏 부를 수 있다. 다음에 니도 같이 가자.”
“네. 다음 달에는 꼭 같이 가보죠.”
“그래. 그러자. 아직은 좀 추워서 니 말대로 다음 달 되면 딱 좋을끼다. 참외 챙겨가야겠네···. 아. 맞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
한참 폭포 자랑을 하던 장 이장님은, 깜빡할 뻔했다며 머리를 치더니,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이 피디가 보낸 문자가···. 여 있네!”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화면을 슥슥 올리던 장 이장님이 불쑥,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들자, 장 이장님이 화면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거, 이 피디 알제? 복댕이 찍으러 왔던.”
이박복 피디. 줄여서 이 피디.
이 피디는 복댕이 영상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끝난 오디션 프로그램도 맡아 장 이장님과 인연이 깊은 피디였다.
“네. 당연히 알죠. 오디션 프로도 성공 시켜서 요새 엄청 바빠졌다고 하시던데, 잘 지내시죠?”
나 또한 복댕이의 주인이라는 신분 덕분에 이 피디와 친분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부를 물었다.
“바쁘긴. 하나도 안 바쁘다. 일은 밑에 사람들 다 시키고 탱자탱자 노는 거 같더구먼. 그 문자 봐봐라. 안 바쁘니까 또 여까지 촬영 온다 그라지.”
“촬영이요?”
“그래. 함 봐봐라.”
장 이장님의 재촉에 화면을 보니, 과연 이 피디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와 있었다.
[가제 : 장 프로가 떴다!
개요 : 오디션 1위 장 프로가 떴다! 시골 방방곡곡을 장 프로가 찾아간다···!]
‘장 프로가 떴다’라는 가제를 가진 프로그램 컨셉은 이러했다.
미화리 산골 마을 같은 ‘리’에 해당하는 시골을 방문해 그곳 마을 사람들과 신나게 노는 것.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함과 동시에 해당 방송국과 장 이장님은 1년짜리 계약을 체결했다.
방송국과 계약이 의무는 아니었지만, 1년 동안 출연 해당 방송사 프로그램 출연이 보장되어 있고, 모든 일정은 장 이장님의 의견을 우선적으로 보장한다는 조건에 흔쾌히 계약하셨다.
다른 기획사들은 기본이 3년 단위의 계약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프로그램 의의는 좋았다.
아무리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했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면 잊혀지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이 프로그램은 장 이장님과 잘 맞다.
오히려 시골이라 이장님이 활약할 점들도 많을 테고.
다만···.
“괜찮으시겠어요?”
방방곡곡을 다녀야 한다는 게, 하루라도 꽃분이 할머니를 못 보면 병이 나는 장 이장님의 특성상, 걱정되었다.
“암만! 촬영 당일에 꼭 집에 보내준다고 했다. 촬영도 한 달에 2번만 한다고 했으니까, 괜찮다. 내 힘도 세졌고!”
하지만 장 이장님은 그 정도는 이미 다 협의가 끝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좋은데요? 본방 사수하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사항을 발견하지 못한 나는, 핸드폰을 장 이장님에게 건네주고 다시 비닐하우스로 가기 위해 인사를 하려 할 때였다.
할 말이 남은 듯, 나를 붙잡은 장 이장님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참, 첫 촬영은 우리 마을이라더라. 저기···. 사랑방 공장에서 촬영해도 되나?”
사랑방을 전국에 방송해도 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