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근원(3)
쫑쫑쫑.
녹음이 푸르른 산길을 헤치며 작고 까만 발이 나타났다.
“컁!”
까만 발의 주인공은 바로 노을.
요즘 노을은 산책에 취미가 들렸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까만 발로 커다란 눈을 쓱쓱 쓸어 아직 눈꼬리에 대롱대롱 달린 졸음을 내쫓고 나면, 노을은 풍성한 제 꼬리를 바닥에 팡팡 털어 밤새 묻은 먼지를 털어내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끝났다.
몸을 단장한 뒤에는 잠든 다른 이들이 깨지 않게 폭신한 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밖으로 나가 밭을 순회한다.
“캬항! 다들 잘 자라고 있다!”
밭을 순회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하루종일 돌아야 할 크기지만, 노을은 위대한 정령!
이곳으로 쌩, 저곳으로 쌩-!
노을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원한 바람만이 남는다.
“그럼 오늘도 탐험을 시작해 볼까! 꺙!”
산 중턱에 있는 밭을 마지막으로 순회를 마치고 나면 비로소 노을의 새로운 취미, 산책이 시작된다.
“캬항? 너 언제 익었냐? 맛있는 냄새가 난다!”
길이 나지 않은 숲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다 빨갛게 잘 익은 산딸기를 발견하면 그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향을 자랑하는 몇 알을 신중하게 고른다.
“내가 딴 산딸기를 제일 맛있다고 했다! 히힛.”
항상 자신들을 위해 입에서 살살 녹는 음식을 해주는 한울을 위한 것이었다.
“고맙다! 컁!”
가장 맛있는 열매가 달린 가지를 조심스럽게 갈무리한 노을은, 다음 목적지로 가기 전 덤불에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캬하항-!”
오늘도 한울에게 줄 맛있는 산딸기가 가득 달린 가지를 입에 문 노을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산의 정기를 듬뿍 머금은 산딸기는 분명 한울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다.
촉촉하고 윤기 나는 코를 하늘 높이 올린 노을은 한울에게 오늘은 특별히 머리부터 등까지 쓰다듬어 달라고 할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다음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후욱.
마지막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더워지는 공기가 노을을 맞이했다.
킁킁.
더운 공기에 담뿍 실린 달콤한 냄새를 날듯이 따라가니, 노을의 마지막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읏차. 여기. 카페 거야.”
“넵!”
노을의 마지막 목적지는 바로 사랑방 공장.
사랑방 공장 앞, 넓은 공터에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느라 힘들었지? 가기 전에 이것 좀 마시고 가. 안에서 줬다.”
“넵! 감사합니다! 석호야, 너도 좀 먹어.”
하얀 빵모자를 쓴 직원에게서 음료를 받아든 박준혁은, 신비농장이라고 적힌 트럭 위에서 카페에 가져갈 한과를 싣던 지석호에게 손을 뻗어 건넸다.
“크흐. 마실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진짜 죽이네요. 감사합니다!”
박준혁이 밑에서 올려주는 한과 박스를 받아 테트리스 쌓듯이 정리하던 지석호는, 그가 건넨 음료를 망설임 없이 원샷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오늘은 뭐가 들어간 거예요? 이거 딱 제 스타일입니다!”
“몰라?”
“예?”
오늘따라 제 입맛에 착 달라붙는 음료의 재료를 알고 싶었던 지석호는, 저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이는 하얀 빵모자 직원의 대답에 벙진 표정을 지었다.
“컁! 나는 아는데! 바보다! 바보!”
히힛.
공장과 맞닿은 산에서 내려와 트럭 위, 가장 높게 쌓인 상자 위에 선 노을은 음료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니, 내가 우예 알겠노? 내도 그냥 아침에 일어나면 강순자한테 끌려와서 여 있는데.”
“아···.”
“뭐, 나중에 강 씨한테 물어봐라. 요새 새로운 거 개발한다고 이것저것 섞다가 남은 재료 갈아서 만드는 것 같더구먼.”
지석호에게 할아버지라 불린 하얀 빵모자의 주인공은 바로 한울의 옆집에 사는 심 할배였다.
“넵. 할아버지.”
지석호는 저도 끌려왔을 뿐, 음료의 정체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는 심 할아버지의 말에 음료의 정체를 알아내는 걸 포기하고, 트럭에 그물망을 씌우기 시작했다.
“던집니다!”
“오케이. 받았으.”
“그럼 묶을게요.”
“나는 벌써 다 묶었지.”
없어서 못 파는 한과를 카페에 가져갈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해줄 그물망을 트럭에 단단히 고정한 박준혁은 굽혔던 허리를 펴 빙글,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 그럼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같이 드시는 거죠?”
“오야. 이따 보자.”
“엥? 뭐에요. 저만 빼놓고 먹는 거예요?”
“빼놓긴 뭘 빼놔. 너는 4시면 집에 가니까 못 먹는 거지.”
“아, 맞다.”
저녁 식사 때 보자는 박준혁의 인사를 손을 들어 대충 받던 심 할배는, 만담 콤비 같은 둘의 대화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옆에 두었던 접시를 집어 들고 걸음을 옮겼다.
“어?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등 뒤로 아직 인사를 못 한 지석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모른척했다.
호기심이 넘치는 20대, 지석호는 말을 걸어도 대답 없는 심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시골 태생인 그에게 인사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엥? 할아버지, 그건 왜 버리세요? 버리시지 말고 저 주세요!”
대답 없는 심 할아버지를 따라가던 지석호는 그가 멀쩡한 간식거리로 채워진 접시를 풀숲에 놓아두는 걸 발견하고는 경악 어린 소리를 내지르며 급히 다가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이가 있었으니.
“캬항! 저건 내꺼다!”
슝.
바람을 가르고 달려온 노을은, 심 할아버지가 놓은 접시 주변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지석호에게 호통쳤다.
“얼른 가라! 이건 내꺼다 컁!”
슈웅-.
옹골찬 노을의 호통에 바람이 일었다.
“오. 시원해.”
갸웃.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인데!
자신이 불러일으킨 바람에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시원하다고 말하는 지석호의 반응에 노을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컁? 컁!”
지석호를 쳐다보며 대체 왜 자신의 바람이 통하지 않았나를 고민하던 노을은 이내 머리를 털어내고 다시금 기합을 내지르기 위해 자세를 바로 했다.
“호에에에-!”
이번에는 큰바람을 불러일으키리라.
노을은 아주 진지한 태도로 호흡을 모을 때였다.
“떽! 건들지 마라.”
“예?”
“컁?”
지석호를 향한 심 할아버지의 호통에 인간 한 명과 정령 한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산신을 위한 거니까 건들지 마라. 부정 탄다.”
“예?”
“저-짝에 가 있어라.”
부정을 탄다니.
자신을 향해 손을 훠이훠이 젓는 심 할아버지의 행동에 지석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제 손을 보았다.
깨끗한데?
부정 탄다는 말에 손을 앞뒤로 뒤집으며 혹여나 더러운 곳이 있나 확인하던지 말든지.
의도대로 지석호를 풀숲에서 떨어뜨린 심 할아버지는 접시를 다시금 조심스럽게 놓으며 눈을 감고 외쳤다.
“고수레! 많이 잡숫고 지금처럼만 돌봐주소.”
“고수레?”
지석호가 낯설지만,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있는 단어를 중얼거릴 때였다.
“캬항 알겠다! 잘 먹겠다!”
노을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 아니. 까만 앞발을 번쩍 들며 대답했다.
“캬하항! 내가 가져가서 잘 나눠 먹겠다! 고맙다! 인간!”
그렇다.
노을이 새벽 산책을 이곳까지 다니게 된 이유는 바로 아침마다 고수레로 뿌리는 간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나는 고수레가 뭔지 안다! 컁!”
한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노을은 사람들이 ‘고수레’라고 외치며 밥 한 덩이나 떡 따위를 던지면, 고수레를 위해 딱 한 입만 적게 먹고 고이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인사도 꼭 남겼더랬다.
‘고수레야 나 딱 한 입만 먹었다! 고맙다! 컁!’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고수레가 인간이 아닌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위한 것이란 걸.
“원래는 이 자리도 숲이었다. 공장 짓는다고 나무도 많이 베고, 땅도 많이 팠다.”
“...”
“많이 빼앗아 갔는데도 아무 일 없고, 잘돼가는 게 다 우리 마을이 산의 정기를 받아서 아니겠나. 고수레 정도는 해 줘야지. 자, 이만 가자. 이건 내가 낸중에 치울 테니까 걱정 말고. 얼른.”
“넵.”
지석호는 심 할아버지가 말하는 바를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뒷짐을 쥐고 산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등 뒤로 느껴지는 씁쓸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탈탈탈.
“이따 뵙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오야. 운전 조심해라!”
인사가 오간 트럭이 떠나고.
탁.
하얀 빵모자를 쓴 노인을 안으로 들인 공장의 문이 닫혔다.
“호에? 다 갔나? 갔다!”
동시에 노을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바쁘게 돌아갔다.
이윽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노을이 접시 위로 뛰어들었다.
“캬하항!”
미화리 산골을 정령, 노을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
노을이 희희낙락 심가가 챙겨준 간식거리를 챙겨 들고 집으로 향할 때 즈음.
“룰루루~ 좋은 아침!”
이 대리는 휘파람을 불며 눈이 마주치는 팀원들을 향해 즐겁게 인사하고 있었다.
“대리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컨택한 업체들에 샘플을 성공적으로 보낸 뒤부터 이 대리는 하루하루 비를 맞은 새싹처럼 파릇파릇해졌다.
생기가 넘친다는 말이다.
“좋은 일? 있지! 여기에 내가 지금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하하하!”
“...네에.”
팔을 활짝 벌리며 자신의 행복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이 대리의 모습에 김연우는 스스로를 탓했다.
아, 괜히 물어봤어.
“오늘도 파이팅!”
왜인지 힘이 빠진 것 같은 김연우에게 파이팅을 건넨 이 대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 자리로 향했다.
타닥.
의자를 꺼내며 즐겁게 발을 굴린 이 대리는, 고개를 옆으로 빼 저만큼이나 기분 좋은 아우라를 뿜고 있는 옆자리 동료에게 인사했다.
“서 대리, 좋은 아침!”
“어! 좋은 아침!”
하하하!
인사를 마친 두 대리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왜 저러는지 아는 사람?”
때마침 출근해 사무실로 들어오던 한혜원이 김연우를 보며 물었다.
“글쎄?”
으쓱.
김연우는 어깨를 위로 올렸다 내렸다.
“뭐, 뭐 때문인지 알 것 같네.”
여상한 친구의 반응에 한혜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메일 보셨나 보네.”
끄덕끄덕.
이번에는 김연우도 한혜원과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서 대리, 메일 봤어! 아니, 싱가포르에서 독점 계약을 요청했다며? 메인 라인에 다 깔아준다고 하면서!”
“하하하! 그러는 이 대리도 베트남에서 전국에 깔아 줄 테니, 계약하자고 했다며?”
“하하하! 베트남뿐인가. 다른 곳들에서도 다 계약하자고 연락이 와서 머리가 아파. 아아. 팀장님께 뭐라고 보고를 드려야 할까 걱정이야.”
“나도 전부 마진 최대로 챙겨줄 테니, 물건부터 보내라고 해서 고민인데···. 이거 우리 공장 큰일 났구먼! 하하하!”
하하하!
허허허!
꺄륵!
“...? 나 지금 이상한 소리 들은 것 같은데?”
“어. 나도 방금 이상한 소리 들었어. 꺄륵···. 이라고···.”
“너도? 어. 나도!”
애써 두 대리의 만담 아닌 만담을 무시하며 오늘 처리할 일들을 정리하던 한혜원과 김연우가 의자를 뒤로 빼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일이나 하자. 마음껏 즐기게 두자고.”
“어. 파이팅.”
“파이팅.”
얼마나 좋으면 꺄..로 시작하는 웃음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긴. 컨택한 업체들에게 바로 계약하자는 소리를 들었으니. 실무자로서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한 두 군데도 아니고, 컨택한 모든 업체들에게서.
“팀장님 언제 오시려나?”
“그러게 말이야. 난 아-까 전에 팀장님께 드릴 보고서를 아주 깔끔하게 완성했는데···.”
“나는···.”
몇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울이 언제 올까 두려움에 떨었던 두 대리는, 어깨를 쫙 편 채 미어캣처럼 사무실 입구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의 세운 공로를 사실로 만들기 위해선 팀장의 허락이 필요했다.
“팀장님, 얼른 오세요~”
“어디까지 오셨을까~?”
한울의 서명란만을 남긴 두 대리가 기다리다 못해 한울을 위한 세레나데를 흥얼거릴 때였다.
끼익.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울의 얼굴이 보이자-
“오오! 팀장님 오셨다!”
“팀장님! 기다렸습니다!”
오매불망 목이 빠져라 한울을 기다리던 두 대리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제 걸 먼저 보셔야 합니다!”
“팀장님! 제가 맡은 바이어는 한국으로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어미 새를 기다린 새끼 새들처럼 쫑알거렸다.
팀장님! 제가 컨택한 바이가 말이죠···.
팀장님!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