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 후 귀촌 힐링라이프-151화 (151/163)

나부터 먼저! (3)

갑작스레 등장해 인사를 마친 금발벽안의 백인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해 곧바로 말했다.

“...I’m looking for Mr. Kim.”

“Oh... Wow. I wanna be Kim.”

김 씨를 찾으러 왔다는 리처드의 말에 내 뒤에서 얼빠진 한혜원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혜원 씨 한 씨잖아?”

김 씨가 되고 싶다는 한혜원의 말에 리처드 옆에 서 있던 서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 서 대리님? 가만히 계시면 될 것 같아요. 호호호.”

“헐. 혜원 씨 어디 아파?”

“으니그든여.”

마을에서 카메라를 발견한 지민처럼 순식간에 웃음을 장착한 한혜원의 변검술에 놀라는 것도 잠시. 이를 악물고 복화술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서 대리는 입을 합 다물고 말았다.

나는 두 사람의 만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리처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Good afternoon. I’m Eric Kim, the owner of Sarangbang.”

그리고 악수를 하며 나를 소개했다. 사랑방의 소유주라고.

**

[오! 만나길 고대했습니다. 사실 불쑥 찾아온 터라 만나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했었는데···.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자신이 찾던 사랑방의 사장이라는걸 알게 된 리처드는 눈에 띄게 반가워하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실례인 걸 알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찾아왔습니다. 여기.]

웃음을 귀에 걸고 반가움을 숨기지 않던 리처드는 내 손을 크게 흔들더니,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심플한 명함에는 Healthlux에서 딴 H와 L이 겹친 멋들어진 로고가 금색으로 양각되어 있었다.

로고 밑에는 리처드의 이름과 직위가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Richard Portman

C.E.O

명함을 받아 확인함과 동시에, 리처드의 옆에 있던 서 대리가 목을 쭉 빼고 명함을 확인하더니 꽥하고 소리쳤다.

“CEO?”

꽤 큰소리에 나는 명함을 확인하다 말고 고개를 올려 서 대리를 보았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리처드를 뚫어져라 쳐다 보더니 사시나무처럼 몸을 달달 떨었다.

“왜 저러신데?”

흡사 기절할 것처럼 구는 서 대리에 리처드의 얼굴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한혜원도 시선을 옮겨 걱정했다.

“아, 아니. C.E.O잖아! C.E.O! 저 사람이 얼마나 유명하냐면···.”

“?”

서 대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한혜원의 모습에 답답함을 숨기지 못하고 제 가슴을 퍽퍽 때렸다.

스스로도 마음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 모양.

서 대리가 멀쩡한 걸 확인한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리처드를 보았다.

[사진보다는 실물이 훨씬 낫네요.]

[오우. 제 사진을 보셨군요?]

[네. 여기, 서 대리 덕분이죠. 그럼, 이쪽으로.]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긴 하였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계속 서 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안쪽으로 안내했다.

자신이 컨택한 바이어와 내가 움직이자, 서 대리도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에? 제가요? 사진을? 언제요? 저도 이분 오늘 처음 보는데?”

자신이 도대체 언제 사진을 보여준 건지에 대한 의문을 안고.

“뭘 그렇게 고민하세요. 팀장님이 알아서 찾아보셨겠죠. 팀장님이잖아요.”

“아. 맞다. 그렇지. 맞네.”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 대리는 한혜원의 말에 깨달았는지, 주먹 쥔 오른손을 왼쪽 손바닥에 탁! 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여, 귀사의 양해를···. 어? 누구···?”

임시 회의실을 가린 파티션에 두 번 노크 후, 안으로 들어가니, 아직까지도 창과 방패 놀이를 하던 이 대리와 깜이 동시에 우리를 쳐다보았다.

[...?...!!]

특히나 깜의 표정 변화는 극적이었다.

무언임에도 불구하고 깜이 생각을 실시간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는, 미국에서 온 리처드. 보아하니 둘 다 우리 제품 구매하러 온 것 같은데, 같이 앉아서 얘기해 보자고. 이 대리, 그쪽 반응은 어때? 설득됐나?”

“아니요. 요구하는 바가 너무 명확해서···. 계약 안 하면 안 간답니다. 지금 공장에 있는 물량만이라도 괜찮으니 무조건 산다고 하네요.!”

“오케이. 수고했어. 이제부터는 내가 맡을 테니까 이 대리는 공장 가서 샘플로 보냈던 제품들 가져와.”

“넵! 알겠습니다!”

불안한 표정으로 이 대리와 나의 대화를 듣던 깜은, 이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션 너머로 사라지자,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와 리처드 쳐다보더니, 결연한 눈빛으로 리처드를 보며 말했다.

[어디서 온 누군지 모르겠지만, 제가 먼저 왔으니, 헤어붐은 제겁니다.]

밑도 끝도 없는 깜의 경고에 제지할까 했지만, 리처드도 만만치 않았다.

[오. 공교롭게도 저랑 같은 목적을 가지고 계시군요. 혹시 어디서 왔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전, 이곳에 오기 위해 12시간을 비행기에 몸을 구긴 헬스럭스의 C.E.O 리처드라고 합니다. 혹시 오시는데 비행시간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비행시간을 따지고 있다. 비행시간을 어필해 집에서 먼저 나온 건 자신이라는 소리라도 하려는 모양.

이게 바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먹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흠.

열심히 서로를 날카롭게 보는 두 명의 김칫국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헛기침을 한 나는, 두 명의 시선이 나에게 향할 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둘 다 안됩니다.]

**

SNS의 스타이자, 미국 MZ 세대들이 사랑하는 헬스 브랜드의 창시자인 리처드 포트만은 굉장히 오랜만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왜? 왜 안된다는 말입니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저희 시설이 증설 중이라, 최소 6개월 이후에나 해외 판매 관련 계약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여동생이 요즘 제 방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한국 아이돌처럼 생긴 사랑방의 오너, 김한울의 말에 뒷머리가 당기는 것만 같았다.

앵무새가 저 몸을 차지하기라도 했는지,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김한울이 제 뒷목 당김의 원인이었다.

[지금 계약하면 안 되는 겁니까? 제가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라서요 하하.]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미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리처드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모두가 사랑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느라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긴 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맞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최대한 맞춰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어느새 리처드 옆에 앉은 깜도 힘을 실었다.

이미 사랑방 공장 제품의 위력을 알아버린 둘은, 경쟁자라 생각하고 반목했던 초반과 달리, 절대 한번 꺼낸 말을 수정할 생각이 없는 듯한 김한울을 설득하기 위해 마음을 합심한 지 오래였다.

계약을 해달라!

도대체 계약을 거부하는 생산공장이 어디 있냐!

우리가 제일 많이 팔아주겠다니까?

아니, 그 전에 우리가 먼저 먹고···.

하지만 급조된 동맹은 서둘러 만들어진 만큼, 이어진 끈이 약했다.

[수출하기가 어려우면, 저희가 직구를 하는 방향으로 할 수 있는···.]

직구 방식으로 판매하게 되면, 정식으로 수입신고를 통해 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건너야 할 관문들이 줄어든다.

[우리! 베트남은! 저 미국처럼 까다롭지도 않고! 돈만 주면 세관은···. 헙.]

깜은 리처드의 의견에 옳다구나! 하고 제 나라의 장점을 읊다, 정신을 차렷다.

아직까지 돈으로 많은 것이 해결되는 나라인 건 사실이지만, 제 입으로 자신의 나라의 뒷면을 보여주는 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는 깜의 행동을 본 리처드는 도움이 안 된다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더니, 이내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항복.]

[으응? 항복?]

항복이란 소리에 깜은 입을 가렸던 손을 내려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리처드를 보았다.

하지만 리처드의 눈은 결심을 한 듯, 올곧았다.

“팀장님이 뭘 원하는지 아는 사람?”

한편. 팀장을 제외한 팀원들은, 그들의 모습을 불구경하듯 파티션 건너편에서 관중 중이었다.

“모르지?”

“나도 몰라.”

“...”

으쓱.

이 대리의 물음에, 나머지 셋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 정도로 원한다고 하면, 안쓰러워서라도 해준다고 할 건데 말이지···.”

물론 팀장님은 모두 계획이 있겠지만, 그런데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이 대리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저렇게 몸이 달아 있는데!

저것만 성사돼도 사랑방 빌딩의 고지는 그리 멀지 않을 텐데!

“어휴. 대리님, 언제 팀장님이 틀린 적 보셨어요? 지금도 뭔가 노림수가 있으시겠죠.”

한혜원이 불쌍하게 뜯기는 이 대리의 손톱을 손을 끌어내려 구해주며 대답했다.

“그렇긴 하겠지. 근데 답답하니까 그렇···.”

“어? 쉿! 조용! 팀장님 말씀하시려고 한다!”

한혜원은 기민하게 팀장의 움직임을 포착하고는, 이 대리의 입을 막았다.

“아니, 지금도 소곤거리는데···. 읍!”

“조용하시라고요.”

지금도 독서실에서 아주 잠시 잠깐 대화를 하는 정도의 데시벨로 대화를 나누는 중인데···. 라고 이 대리는 억울함을 표시해 보았지만, 역시나. 효과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순간이라고요.”

“...”

한혜원의 서슬 퍼런 눈빛과 마주한 이 대리는 조용히 두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오케이 사인이었다.

*

바스락.

타닥.

나는 앞의 바이어들과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소리에 팀원들의 발걸음 소리에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궁금하면 들어와서 앉으면 될 텐데. 내가 배턴을 이어받기 전까지 이 대리가 깜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목격한 팀원들은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파티션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뭐가 마음에 드시지 않는 거라도···.”

힐끔.

내 작은 고갯짓에도 예민하게 반응한 리처드가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며 물었다.

바이어가 갑(甲)이고, 공급처가 을(乙)일 수밖에 없는 업계에서 을이 갑이 되는 때 쓰는 말이 있다.

슈퍼을(乙).

말 그대로 을의 파워가 엄청나 을이 갑의 위에 올라설 때 업계에선 그 을을보고 슈퍼’을’이라 한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희 헬스럭스에서는 모든 조건을 사랑방에서 제시하는 대로 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트남 전국에 사랑방의 제품이 깔릴 겁니다! 게다가 홍보도 저희가 할거고, 프로모션도! 저희가 부담해서···.”

사랑방 제품은 특별하다.

그리고 유일하다.

특별하면서도 유일한 제품을 가진 업체는 많은 것들을 바이어에게 요구할 수 있다.

어떤 슈퍼을은, 자신들의 제품을 쓸 수 있는지 바이어를 테스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슈퍼을은 특정한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제품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

“귀사들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미 사랑방의 제품들로 슈퍼을이 될 걸 알고 있었다.

이런 날이 올 거란 것도.

“딱 한 가지, 귀사에 저희 제품을 공급할 방법이 있긴한데...”

“그게 뭡니까?”

“그게 뭐든 저희 헬스럭스는 그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이들에게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우리 사랑방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지키면서도, 복지를 더 키울 수 있는 방법.

나의 다음 말이 나오기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이어들을 보며 나는 말했다.

“각자의 나라에서, 저희 제품을 생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슈퍼을(乙)로서의 첫 번째 요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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