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리 산골 마을의 비밀 (1)
싸늘하다.
비수가 꽂힌 것처럼 회의실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정적을 깬 건 파티션과 거의 물아일체가 된 팀원들이었다.
“지금 팀장님이···.”
“바이어한테···.”
“제품 생산하라고 시킨 게 실화임···?”
“헐.”
이제는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팀원들의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what...?”
팀원들의 웅성거림에 정신을 차린 리처드가 아연한 표정으로 귀를 후벼팠다.
도무지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임을 부정하는 리처드의 몸짓에 나는 다시 입가의 미소를 깊게 하며 말했다.
[저희 제품 생산을 해당 국가에서 한다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바이어에게 요구하는 바는 이러했다.
우리 사랑방의 시설을 사용하는 게 아닌, 해당 나라에 있는 생산 시설을 사용해 우리 제품 생산을 하는 것.
[보시다시피, 저희 공장은 아직 규모가 아주 작습니다. 직원들도 계속 모집을 하고 있긴 하지만, 지역 특성상, 빠른 시일 내 저희가 원하는 만큼의 맨파워를 가지는 것도 요원한 게 사실입니다.]
지금은 작은 수량도 괜찮다고 얘기해도, 결국에는 더욱 많은 수량을 원할 게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저들이 원하는 수량을 모두 맞추려고 한다면, 일이 아주 어렵게 된다.
아마, 미화리 주민들을 모두 고용해 생산에 투입한다고 해도 저들이 원하는 수량을 맞추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저들의 오더만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큰 오더라고 하더라도, 국내 유통이 먼저였다. 먼저 신비농장과 사랑방을 사랑해 준 국내 고객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하는 게 마땅하니까.
네가 지금 들은 내용이 맞다고 다시 한번 확답하는 내 말에 멍하게 있던 리처드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입을 뗐다.
[음···. 미스터 킴. 물론 그렇게 되기만 하면 저희도 수입 절차 없이 바로 제품을 가져갈 수 있으니 좋긴 하지만, 문제는 미국 임금이 굉장히 높아서···.]
임금 때문이라도 수지가 맞지 않을 것 같다는 리처드의 말에, 조용히 앉아 골똘히 생각하던 깜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미국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 같군요. 임금이 비싸서 안될 것 같다니. 아직 헤어붐을 얻을 자격을 가지기엔 이른듯합니다. 저희, Big-D는 다릅니다. 지천에 널린 인력! 미국이나 한국보다 저렴한 임금! 저희는 얼마든지 미스터 킴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바로 계약하실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마침 Big-D PB(Private Brand; 자사 제품) 생산을 위해 맡기는 공장이 있다는 정보까지 공유한 깜의 손은, 그의 앞에 있는 노트북 키보드 위에서 날듯이 춤추었다.
마지막으로 엔터를 화려하게 친 깜은, 고개를 들어 파티션에 딱 붙어 있는 이 대리를 불렀다.
[자, 브래드! 괜찮다면, 제가 방금 보낸 계약서를 좀 프린트 해줄 수 있을까요? 프린터가 연결이 안 되어 있네요.]
“예? 예쓰!”
브래드, 라고 불린 이 대리는 화들짝 놀라더니 황급히 파티션에서 몸을 떼고 자신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브래드라는 이름은···. 그 영화배우에게서 따온 이름이 맞다. 부부싸움 영화를 본 뒤로 여자친구가 남자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에게 반한 이후로 쭉 그 영어 이름을 사용했더랬다.
“Here you go!”
강 할머니 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먹으러 갈 때처럼 발놀림을 빨리한 이 대리는 순식간에 깜이 요청한 자료를 프린트해 건넸다.
“Thank you.”
빠른 속도로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이 대리를 향해 감사 인사를 전한 깜은 손에 든 프린트물을 내게 내밀었다.
[읽어보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깜이 내민 건 바로 계약서.
[공장 선정과 공임도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QC나 QA도 원하신다면 저희 측에서 할 예정입니다만, 사랑방 직원분들이 와서 보시는 것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저희에게 판매하는 금액은 사랑방 본사에서 생산해 판매하는 금액과 똑같이 판매하셔도 됩니다. 저희공장을 그냥 제2의 사랑방 공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
깜에게서 받은 계약서에는 그가 말한 사항들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그저 우리는 재료만 보내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모두 Big-D에서 알아서 하겠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크흠. 생각해보니, 저희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깜의 말을 심각하게 듣던 리처드는 조금 전과는 다른 스탠스를 취했다.
마치 조금 전, 미국에서 생산이 어렵다고 했던 건 다른 사람이었다는 듯,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저희는, ‘lux’가 붙은 만큼 귀사의 제품을 아주 제대로 만들고, 매우 비싸게 팔 계획 중입니다.]
[언제부터?]
머리를 쥐어뜯던 걸 분명히 봤는데!
순식간에 거지에서 왕자로 바뀐 만큼 리처드의 커다란 변화에 깜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조금 전 했던 임금과 관련된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해주시면 합니다. 제품의 품질이 이미 high-end인데, 그만큼 좋은 곳에서 생산하는 게 맞는 법이니까요!]
[법···.]
주먹까지 불끈 쥐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리처드의 모습에 깜이 또다시 이상한 무언가를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지만, 이미 SNS 인플루언서의 경력과 헬스럭스 사장의 지위를 가진 리처드에게는 깜의 시선은 아무렇지 않았다.
[제 SNS를 통해 홍보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할 생각입니다. 아, 자랑은 아니지만, 제 계정 피드가 한 번에 5만 달러 정도 됩니다. 하하하.]
5만 달러.
한국 돈으로 약 6천만 원이 넘는 금액.
정말 유명한 인플루언서일 경우 억 단위의 광고비를 받는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희 홍보와 헤어붐의 품질이라면, 분명 빠른 시간내에 미국 시장을 점령 할 수 있을 겁니다.]
[하-! 저희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식품들은, 동남아 곳곳으로 퍼지는 건 말하면 입 아픈 소리인 건 아시는지?]
[미안한 말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제품들 대부분은 우리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제품들 대부분은 우리 베트남에서 생산하고 있다는 거···.]
[우리 미국은!]
[우리 베트남은!]
왈왈. 멍멍.
김칫국 씨들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
한울과 팀원들이 사무실에서 서로 싸울 기세로 제 주장을 우기는 리처드와 깜을 진정시킬 무렵.
“냄새가 난다. 냄새가. 안 그래, 경배야?”
공장 마당에서 흥에 겨운 장 이장과 핑크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직원들의 모습을 찍던 이박복 피디는, 외국인들이 2명이나 들어간 사무실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냄새요? 피디님?”
한창 카메라에 찍히는 화면을 모니터링하던 박경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 냄새가 안 나냐고!”
“무슨 냄새가···. 킁,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아. 맛있는 냄새?”
이 피디의 재촉에 박경배는 느릿하게 제 팔을 들어 코를 씰룩였다. 하지만 아무리 맡아도 사랑방 직원분들이 준 달콤한 간식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아니! 당연히 간식 냄새는 달콤하지. 그거 말고. 대박 사건의 냄새가 나지 않냐고.”
“아아. 또 무슨 소리인가 했네요. 냄새가 나긴 하죠.”
“그치? 너는 나처럼 느낄 줄 알았지.”
“저 안에 들어가시고 싶으신 거죠?”
박경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피디와 일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이제는 그가 무엇을 원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 대충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저 안쪽 사무실로 들어간 외국인들과 신비농장의 사장이자, 이제는 사랑방 카페와 공장의 사장이기도 한 한울과 얘기를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피디의 다음 말은 박경배가 예상한 바와는 달랐다.
“아니. 일하는 데 인터뷰 따러 가면 민폐지. 우리도 촬영하는데 누가 말 걸면 짜증 나잖아?”
“...”
박경배는 지금 바로 피디님께서 촬영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은 부하 직원이기에 그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매너 있게 촬영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 저 사람들이 퇴근하면 인터뷰를 해야 한다.”
“...”
하하.
이번에도 박경배는 이 피디에게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퇴근하는 사람 붙잡고 인터뷰하면 더 싫어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려는 입을 말리기 위해 진실을 알려주는 대신, 어색한 웃음만 뱉어냈다.
“경배야, 여긴 저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들만 흥미로운 게 아니야. 봐봐. 저기 이장님이랑 같이 있는 어르신들. 뭐 이상한 거 느껴지지 않아?”
이번 질문은 대답이 가능했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기 위해 박경배는 이 피디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진!실!인! 거어야~”
고개를 돌린 곳에는 이 피디가 말을 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박경배가 모니터링하던 장면이 보였다.
흣쨔흣쨔!
제작진이 방송국에서부터 여기까지 들고 온 노래방 기계에서 나오는 음에 맞춰 온몸을 들썩이며 신명 나게 즐기고 있는 어르신들.
모두가 하나같이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었다. 보기만 해도 같이 기분 좋아지는 미소.
“확실히. 잘 노시네요.”
어르신들에게서 이상한 점을 굳이 찾자면, 박경배가 다른 곳에서 만난 어르신들보다 훨씬 기운이 넘친다는 것.
하지만 이 피디는 박경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듯, 다시 한번 자세히 보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거 말고. 얼굴을 자세히 봐봐. 바뀐 거 없냐?”
“...?”
그럼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이 대리의 성화에 다시 한번 눈을 비벼 마을 사람들을 보았지만, 아까와 같았다.
마이크를 잡은 장 이장님이 노래하면, 앉았다가도 다 같이 두두두 일어나 함께 분위기를 즐기는, 제작진들이라면 언제든지 반기는 협조적이고 밝은 일반인들. 이상 한 점은 없었다. 오히려 티브이 방송에 출연한다고 핑크색 티를 맞춰 입고, 다 같이 몸을 흔드는 모습을 보자면, 자신도 모르게 저곳에 같이 합류하고 싶을 만큼 신나 보였다.
그래서였다. 박경배는 이 피디가 원하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제 자리로 돌렸다.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는 박경배의 모습에 이 피디가 비밀을 말하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 왜 이 마을 사람들은 전부 다 안 늙는 거 같지 않냐? 장 이장님은 카메라 마사지 받고, 요즘엔 소속사에서 피부과도 보내준다고 하니 그렇다고 치지만···. 다른 어르신들 좀 봐봐. ‘멧돼지와 춤을’ 촬영 왔을 때보다 얼굴이 활짝 폈어. 아니, 주름이 없어졌나? 아무튼. 다 같이 동안이 되어버렸네? 이상하지 않아? 경배야, 네가 좀 알아봐라. 뭔가 있다.”
“어?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이 피디는 드디어 자신의 물음에 미소 대신 자신과 동의하는 말을 내뱉은 박경배의 답에 오른손을 주먹 쥐어 왼손 손바닥에 내리쳤다.
“그래! 그거야! 자, 그럼 경배야?”
“네?”
“출동!”
멀뚱멀뚱하게 자신과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는 박경배를 향해 이 피디는 검지를 앞으로 쫙 뻗었다.
“예이···.”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흥이 넘치는 어르신들에게 흡수되는 박경배의 모습에 이 피디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그램의 첫 스타트를 미화리에서 한 건 신의 한 수가 될 게 틀림없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직감을 믿은 그는 확신했다.
여태 이 직감을 밀어붙이며 이 자리까지 온 만큼,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유명해지게 될 거라는 걸.
유명해지는 게 자신일지, 이 마을일지, 아니면 어르신들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